한국희곡

홍진형 '가족연극'

clint 2019. 5. 20. 21:46

 

 

<가족연극>꼭 닮은 두 딸을 전제로 한 도입부 설정을 개연성 면에서 관객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야기 진행에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점을 수용한다면 ‘12이라는 연기 비즈니스, 잘 설계된 극적 아이러니 구조에 참여하는 맛을 누릴 수 있다. 어느 재혼가정이 있다. 딸은 엄마의 불륜을 알게 되고, 환멸과 혐오의 감정으로 외국으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이 딸은 어떤 사고로 사망한다. 아버지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아내를 위해 죽은 딸과 꼭 닮은전처와의 소생인 딸을 시켜서 죽은 딸 노릇을 하도록 한다. 이 딸은 아비에 대한 복수심으로 아비와의 거래에 응하게 되고 이제 가족연극이 시작되는데.

 

 

심사평

올해는 66편이 응모하였는데 마감시간 이후 접수된 6편을 제외하고 총 60편을 예심, 본심, 최종심으로 심사하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가족연극> <미라> <울타리에 머무는 햇살의 온도> <이상한 회의>(제목 가나다 순)이다.

<가족연극>은 한 남자(아버지)의 결혼, 불륜, 이혼, 재혼으로 이뤄진 두 가족의 전사(前史) 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이혼가족의 첫 번째 딸은 홀엄마와 살며 부친부재의 상실감과 부친 증오로 살아왔고, 재혼가족의 두 번째 딸은 엄마의 불륜을 목격하고 모친과 불화하다가 스스로 삶을 끝낸다. 시한부 병동에 있는 아내(재혼한 부인)를 위해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숨기고, 첫 번째 딸에게 죽은 두 번째 딸 역할을 해달라고 제안한다. 두 딸이 아버지를 빼닮아 가능한 극적 조건이다. 극의 주인공은 첫 번째 딸이다. 흔한 막장 가족 드라마, 일수도 있는 이 극의 미덕은 치밀한 시간표(극적 서사의 진행)와 정밀한 심리묘사 그리고 적절한 소품(오브제)의 역할이다. 의도(주제)를 삭히며 차분한 질문으로 마감하는 결말이 사족이 될지 방점이 될지는 궁금하다. 또한 아버지의 역할이 틀에 맞춘 유형(類型)성에 머문듯하다.

 

<미라>는 유해 화학물질로 오염된 휴지공장에서 작업하다 다치고(산업재해) 실종된 남편을 미라mirra로 만들어 보관하며 남편의 부활(직장복귀)을 계획하는 아내(약사)가 주인공이다. 컬트적 발상과 기괴한 분위기에 합당한 인물들이 나타나 아내의 집(실험실)을 염탐, 방문하며 남편을 찾거나 냄새나는 집에서 나가달라 재촉한다. 꿋꿋한 아내는 방해꾼들을 물리치고 남편을 20년 만에 다시 출근시킨다. 이 극의 미덕은 작가가 설정한 이상한 세계와 사건이 우리시대의 어느 곳을 정확히 가리켜 풍자하는 것이다. 그 연극적 상상력과 정제된 대사도 장점이다. 그런데 아내의 흔들림 없는 능력과 활약이 꽉 찬 드라마의 틀이 되어 풍자 너머의 무엇(주제)을 약화시킨 듯하다.

 

<울타리에 머무는 햇살의 온도>는 유기견 보호소와 (여성)노인들의 양로원이 교차되며 그곳의 개들이, 노인들이 서로 갈등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누구는 그 누구를 그리워하고, 무엇을 훔쳐 감추고, 누구를 의심하고, 누구는 사라진다. 보호소 개들의 사건과 양로원 노인들의 사건이 넘겨지고 이어지며 묘한 동질감과 공감을 일으킨다. 안락사나 입양을 기다리는 유기견 보호소와 죽음 앞둔 노인들의 양로원을 대비시킴이 기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이 함께하는 메르헨(Märchen, 동화)이 아니라면 굳이 개들과 노인들을 동급 대비 할 필요가 있을까? 양로원(에서 일어난) 이야기로 다층, 다양한 성격들과 사건으로 짜인 휴먼 극이 되면 좋겠다.

 

<이상한 회의>는 광고회사에서 구조조정 대상이 된 회사원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이다. 정년퇴직 앞둔 60, 결혼 앞둔 30대 등등이 제 나름의 사연으로 명퇴당하지 않으려고 의 투정과 내기와 배팅을 해댄다. 유쾌한 반전으로 살아남은 들은 다시 일 잘하자며 의기투합한다. 단막극에 맞은 상황과 구조를 담고 있음이 장점이다. ‘의 처지인 직장인의 애환과 그들 사이에서 벌어질만한 사건을 사실바탕의 과장(誇張)으로 그린 것도 좋다. 하지만 극적 상황과 그것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행동이 예측가능한 선에 머물고 풍자의 대상이 모호하다. 풍자를 인 그들(자신)에게로 증강시키며 페이소스까지 일궈내면 좋겠다.

 

 

 

<가족연극><미라>를 두고 고심했다. 기발한 발상과 연극적 퍼포먼스가 뛰어난 <미라>는 단막보다는 장막극이 되도 좋겠다. <가족연극>은 의도적 관계 설정이지만 그 설정을 책임지는 단정한 구성력과 극 속에 녹인 가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믿음을 줬다. <가족연극>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당선 작가와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의 힘써 씀을 원한다.

 

예심/ 백하룡 양수근 오세혁 최세아

본심/ 위기훈 차근호

최종심/ 김수미 홍원기

 

 

 

당선소감 - 홍진형

스무 살 '문연자'라 불리던 학과 도서실에서 처음으로 희곡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스물한 살 극작동아리 노리터에서 난생 처음 희곡을 썼습니다. 그 이후 희곡을 쓰며 사는 삶, 내가 쓴 글이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을 상상했습니다. 때로는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과연 가능할까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최근 몇 년간은 의심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냥 몸에 밴 습관처럼, 좀처럼 떨치지 못하는 버릇처럼 계속 희곡을 썼습니다. 이제는 조금 확신을 가지고 글을 써도 좋다는 증거를 얻은 것 같아 기쁩니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연극이라는 예술이, 희곡이라는 글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걸 앞서서 증명해준 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 1 쇄가 다 팔릴까 싶은 희곡을 과감히 출판해준 출판사들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연극과 희곡에 대해서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에 고맙습니다. 그 경험이 내 삶을 많이 바꿨습니다. 난 아직 그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진지하게든 가볍게 든 나와 함께 예술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내 글을 읽어주었던, 그리고 내 글을 읽어 보고 싶다고 말해주었던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 덕분에 버릇처럼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난주 씨에게 감사합니다. 내가 표현하지 못해도 내 삶의 많은 부분에 당신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순간 그 흔적들이 내가 글을 쓰는 동력이었습니다. 당신은 종종 내게 많은 것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난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을 당신, 어머니 덕분에 가지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도 내가 당선된 게 맞나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심사평을 다시 읽어봅니다. '<가족연극>을 당선작으로 올린다'라는 문장은 몇 번을 봐도 낯섭니다. 이런 의심을 떨칠 수 있도록 몸에 밴 습관처럼 계속 힘써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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