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의 사랑은 영문학사상 최고의 로맨스이며, 세계문학사상으로서도 그 유례가 드문 男女 두 시인의 사랑의 드라마이다. 엘리자베스 배리트의 최고의 날은 1846년 9월 12얼. 그날 비밀결혼으로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브라우닝 부인이 되었고, 1주일 후 딸들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는 폭군적인 아버지가 지배했던 런던 윔폴 街 50번지를 떠나 햇볕이 화창한 이탈리아의 태양과 행복을 찾았다.
엘리자베스 배리트 브라우닝은 1806년 3월 6일 엘리자베스 배리트 모울튼(Elizabeth Barrett Moulton)이란 이름으로 11명의 자녀 중 장녀(한 애는 아기였을 때 죽었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메이카에서 많은 토지와 노예를 가졌던 영국인으로서, 노예제도가 철폐되자 영국으로 돌아와 헤리퍼드쉬어에 400에이커의 땅을 사고, 첨탑과 돔이 있는 ‘터키式집‘을 지었다. 엘리자베스의 원래의 집은 더럼 군에 있는 콕스 홀이었으나, 소녀시절을 헤리퍼드 쉬어에 있는 호프 엔드에서 보냈다. 6살 때 아버지는 엘리자베스에게 「호프 엔드의 계관시인」이란 칭호를 주었고, 매우 조숙했던 그녀는 8살에 벌써 호메로스를 그리스어로 읽었고, 서사시 〈마라톤 전투〉(The Battle of Marathon)가 14살 때에 사적으로 인쇄되었다. 15살에 포니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쳐 줄곧 침대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1826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족이 런던 윔폴 가(Wimpole Street) 50번지로 이사했다. 바로 그 해에 18살 때 썼던 <精神論>(Essay on Mind)이 출판되었다. 1838년에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번역과 유명한 「쿠퍼의 무덤」이란 시가 수록된 〈天使들과 다른 시편들>(The Seraphim andOther Poems)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에 엘리자베스와 가까이 지냈던 메리 러슬 미트퍼드는 그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표정 많은 얼굴 양쪽으로 소나기처럼 검은 곱슬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까만 속눈썹이 선명한 크고 부드러운 눈에, 햇빛 같은 미소를 띤, 호리호리하고 연약한 모습” 이었다고.

1840년 7월 엘리자베스가 가장 좋아했던 동생 에드워드가 영국 남부 해안 토키에서 보트를 타다가 익사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일생을 변화시켰던 비극적 충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폐병으로 위협받고 있었고, 그때부터는 방문객들이 별로 없는 어두컴컴한 커다란 방(그녀의 표현으로는 “뉴게이트감옥 안팎을 뒤집어 놓은")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탐욕스럽게 많은 언어들로 쓰인 작품들을 읽었고, 계속 글을 써서, 詩로 유명하게 되었다. 두 권의 시집이 1844년에 나왔는데 여태까지 이 시십보다 더 그녀에게 값진 보답을 해준 詩集은 없었다. 왜냐하면 로버트 브라우닝이 그 시를 읽고, 그 시를 사랑하고,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되고, 엘리자베스를 구원하러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두 녹색 표지의 시집이,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브라우닝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말에 의하면 “골치가 아플 때면 나는 돌아서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하여 1845년 1월 10일 詩集의 저자에게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미스 배리트, 나는 당신의 詩를 나의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나의 속으로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 위대한 살아있는 詩가.… 신선하고 이상한 음악, 풍요한 언어, 절묘한 애수, 그리고 참다운 새로운 용감한 생각… 나는 이 詩集을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5월 중순 엘리자베스는 답장에서 경고했다.
“내게서 볼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내게서 들을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혹시 저의 詩가 사람들의 눈에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저의 꽃예요… 그것이 제 색깔들을 지니고 있어요. 저의 그 나머지는 흙과 어둠에 어울리는 한낱 뿌리에 불과해요.”
로버트 브라우닝은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의 詩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정신의 특질에 마음이 끌렸다. 브라우닝 부부는 이상적인 연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지적(知的)인 반려자들이었다. 왜냐하면 로버트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자기의 詩를 이해해 주고 찬탄해주는 독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무명시인이었던 브라우닝이 엘리자베스를 알기 전에, 엘리자베스는 이마 테니슨의 라이벌로 대중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1844년에 ᄂᆞ온 시집 중에 있는 “레이디 제럴디언의 求愛"(Lady Geraldine’s Courtship)에서 엘리자베스는 그 당시 별로 읽히지 않던 브라우닝의 작품에 언급했고, 그것이 로버트를 우쭐하게 하고 감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편지 왕래가 시작된 것이었다.
1846년 엘리자베스의 사촌이며, 로버트 브라우닝의 친구이기도 한 존 케년의 소개로 엘리자베스와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열렬한 사랑에 빠져, 질투하는 아버지를 무릅쓰고서 비밀결혼(엘리자베스 40세, 브라우닝 34세)을 하고 1주일 후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 박토리아 朝 아버지의 완벽한 典型인 에드워드 배리트는 결코 엘리자베스를 용서하지 않았고, 다시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브라우닝 부부는 맨 처음엔 피사에, 그 다음엔 피렌체에 정착하여 구이디 館(Casa Guidi)에 살았는데, 그 집은 그 당시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영국인 名士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들은 이따금 파리, 로마, 런던에 여행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네 번의 유산 후에 아들 Robert Barrett Browning (Penini)을 낳았다. 브라우닝 부인은 이탈리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동정하여 〈구이디 館의 창)(Casa Guidi Windows, 1851)을 썼다. 1850년엔 너무나도 유명한 〈포르투갈인의 戀歌)(Sonnets from the Portuguese)가 수록된 〈詩集〉을 내었다. 9卷으로 된 大作 〈오로라 리)(Aurora Leigh, 1857)는 無題 詩로 쓴 로맨스로, 한 고아의 사랑과 생애의 이야기로 가장하여, 자기 자신의 로맨틱한 경력에 관해 고찰하고, 심미적, 사회적, 정치적 및 경제적 주제들에 관한 자기 생각을 피력한 것으로,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1862년의 〈最後詩集〉(Last Poems)은 그녀가 건강이 허약해지고 있을 때 쓰인 것으로, 죽고 난 1년 후에 출판되었다. 1861년 6월 30일,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팔에 안긴 채 55세를 일기로 죽어, 피렌체에 있는 신교도 요지에 묻히었다. 그녀의 생애를 통하여 엘리자베스는 남편보다 훨씬 더 유명했고, 크리스티나 로제리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영국 여류시인의 타이틀을 겨룬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의 원제목은 〈윔폴 街의 배리트家)(The Barrelts of Wimpole Street)로서, 결혼하기 전 엘리자베스 배히트가 살고 있었던 집이며, 로버트와의 극적인 사랑의 중심지이다. 번역시 작품명을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사랑〉으로 바꾼 것은 원제목이 한국 독자에게 너무나도 생소하고 이미지가 확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랑의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엘리자베스이며, 그녀의 러브스토리인 동시, 「사랑」이란 말이 「애인」이란 뜻도 있어, 로버트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작가 루돌프 베지어(Rudolf Besier, 1878∼1942)는 자바에서 출생,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극작을 시작했다. 그러나 w. s. 길버트의 말로는 “그는 영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영국 서섹스 출신의 처녀와 결혼하고 런던에 정주한 후, 다양한 문학 활동을 했다. 프랑스 극을 번역, 각색하기도 했고, 두 대중 소설가 휴 월폴과 H.G. 웰즈와 합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성공했던 그의 어떠한 노력도 이 작품(1930)와 견줄 수가 없다.
베지어는 로버트와 엘리자베스의 참다운 로맨스가 극작가들이 상상력으로 짜낸 어떠한 러브스토리도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런던의 연출가들은 의견을 달리했다. 이 작품이 너무 문학적이어서 대중을 기쁘게 할 수 없으리라고 믿었다. 한편 베지어는 이 극을 뉴욕 연출가들에게 넘겼었는데, 27번이나 거절당했다. 마지막에 탁월한 여배우인 캐서린 코오넬 (Katherine Cornell)이 이 희곡의 장점을 보고, 1931년 클리블랜드에서 개봉했다. 처음부터 그 인기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상연을 거부했던 연출가들은 그 기록을 보고 속이 쓰라렸으리라. 무려 뉴욕에서만도 370회, 전부 700회의 공연기록을 세웠다. 또 이 작품은 영화화되었고 1960년대에 서울에서 상영되었다.
이 희곡은 로버트 브라우닝과 엘리자베스가 만나게 되는, 그리고 극적인 구애를 하게 한 실제 사건들을 면밀히 따르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의 묘사가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것은 극작가가 엄격한 불굴의 에드워드 배리트를 의도적으로 과장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빅토리아朝의 분위기와 매너를 아주 생생히 포착했고, 주인공과 여주인공을 사실 적이고도 믿을만한 인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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