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나〉는 비나베르가 추구했던 일상극 중에서도 극의 규모가 작은 실내극의 대표작이다. 비나베르는 1978년, <명백한 배반자Dissident, it va sans dire>와 함께 〈니나〉를 발표하면서 실내악에 빗대어 실내극이라는 이름을 두 개의 작품에 붙였다. 실내악과 마찬가지로 작은 소리들이 모여 때로는 조화로운 음색을,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며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진 연극을 일컫는 실내극은 연극의 예술적 · 이념적 정치성이 강한 이데올로기극과 대조되는 일상극의 내용과 형식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니나〉의 원제는 Nina c’'est autre chose이다. 지역하자면 <니니는 달라> <니나는 굉장해> 등의 뜻이라 할 수 있다. 니나가 비록 사회적으로 미용실 조수에 불과하지만 두 남성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야기한 인물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마흔이 넘은 두 남자 형제 세바스티앙과 샤를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이좋게 살고 있다. 세바스티앙은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공이다. 나름대로 세계정세에 관심이 많고 다양한 국가의 국민성을 분석하는 등 동생 샤를르에 비해서 지적인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한편 동생 샤를르는 미용실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형보다는 훨씬 단순한 성격의 인물이다. 이 두 형제는 미용실 보조인 샤를르의 여자 친구 니나가 그들의 집에 이사 와서 살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그런대로 잘 지내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두 남자형제는 세바스티앙이 저녁마다 어머니가 해주신 요리를 대신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고 지내고 있었다. 샤를르의 여자 친구인 니나의 침입은 두 형제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켜 끝내 그들의 삶을 망치기에 이른다. 세바스티앙은 니나가 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집을 나가겠노라고 선언하지만 니나의 중재로 세 사람은 설명되지 않는 삼각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그러나 니나는 결국 두 형제의 평화와 고요를 망가뜨리고 젊은 망명자와 도망간다.

니나의 침입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마흔이 넘도록,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상과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이디푸스 적인 두 형제를 니나는 어른의 세계로 돌진시킨다. 그런 만큼 니나와의 이별은 두 형제에게는 충격이며 결핍감을 준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은 계속되고, 성격 차에서 생겨난 갈등은 여전하며 그로 인한 그들의 말다툼 역시 그대로이다. 니나와의 생활은 그들의 정서적 측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인생의 근본적인 설계나 방향을 완전히 변형시키지는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협박당하고 성희롱당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은 날 것 그대로의 현실로서, 평범한 일상적 대화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이 작품은 노동의 현장에서 부닥치는 불합리한 문제를 사회적 부조리의 틀이나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고발의 형식으로 과장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언어 속에서 단순하게,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극은 언어극이다. 부조리 연극 역시 언어극이다. 부조리극의 언어는 등장인물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였다 그러나 일상극의 언어는 작중인물들이 서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연결이 되지 않는 관계 부재의 언어라기보다는 상대를 상정한 대화에 기초한 언어이다. 다만 극은 논리적 전개에 따른 일관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잡한 상황이 얽혀있어 파편적인 구조를 갖는다. 세바스티앙과 샤를르는 상이한 성격과 다른 관심사로 인해 항상 대화 진행이 조화롭지 못하고 산만하다 그들의 관심사에 따라 여러 가지 상황이 얽히기도 하고 현재와 과거가 혼재되어 있어서 극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평자들은 이렇게 단편화된 일상적 에피소드를 서술하는 방식을 ‘극 사실주의’ 또는 ‘미시 사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상극의 특정을 말한다. 승진은 했지만 불법 외국인 노동자를 해고하는 악역을 맡은 세바스티앙은 평소 외국인에게 관대한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해고한 노동자로부터 세바스티앙이 폭행을 당하는 상황을 직접화법의 즉흥적이고 비논리적인 어조까지 그대로 담아 일상회화의 언어로 서술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영상을 보는듯하다. 일상극이 일상 언어의 연극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비나베르는 실내극이라고 이름붙인 이 작품에서 모든 구두점을 없앴다. 희곡을 읽기위한 문학 텍스트로 제한할 때는 이것이 가독성을 방해하는 요소이지만, 무대 위에서 공연될 때는 진정한 구어체, 대화체의 언어가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배우의 재량과 연출의 능력에 힘입어 공연에서 비로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열려있는 가능성을 지닌 새로운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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