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코르네유 '쉬레나'

clint 2019. 3. 27. 10:16

 

 

 

 

 

 

쉬레나는 전원비극이다. 쉬레나를 사랑하고, 그에게서 사랑을 받는 위리디스를 사랑하는 파코리를 사랑하는 팔미. 이 사랑의 사슬의 원리는 전원극 장르의 창조물이다. 이 원리는 17세기의 100여 극작품의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준다. 쉬레나속에서 전원극이 줄거리의 단순한 구조에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두 주인공이 결과적으로 목동으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당장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건 전체가 전원극의 원리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에 주목히는 것이다. , 4 등장인물의 사랑의 사슬,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 사슬을 끊기 위한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여기서는 파코리)의 질투와 술책, 사랑에 빠진 쌍에게 있어 외부의 장애물로 인하여 행복을 찾을 수 없음, 아버지의 의지, 계급의 불평등.

 

 

 

 

쉬레나를 고전 전원극과 구별 짓는 것(이 작품을 역사적인 궁정과 정치적인 내기 속에 넣음으로써 생겨난 추상적 개념), 그것은 결말에서 어떤 급변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는 쉬레나가 사랑하는 공주와 결혼하도록 해주는 요소인 왕족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권위의 소지자인 등장인물도 연인들의 맹세를 옆으로 비껴 놓거나, 그들의 결혼을 허락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퇴짜 맞은 사랑에 빠진 사람은 계속 사랑해온 여인에게 되돌아가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이중 결혼에 의해 종결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연인의 쌍이 사랑의 고백에 대한 긍정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향하여 또는 모든 사람에 대항하여 서로 싸우는 고전적 전원극에 비하여, 위리디스와 쉬레나는 체념에 의해 구별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의 차이 - 한쪽은 왕과만 결혼할 수 있으며, 다른 쪽은 왕을 여럿 만들어냈지만 왕은 아닌-를 너무 잘 동화시켜서, 그들의 사랑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 사랑의 비밀, 즉 고통과 기억의 충실성 속에서 지속시키기 위해 내적 자유의 영역만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사건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우리가 주인공의 관점에서 사건을 고찰한다면, 그것은 아주 부정적이며, 외적으로는 그들의 단순한 거부에 의해 촉발된다고 단정할 수 있다. 쉬레나는 자율적인 두 영역의 만남 위에 근거하고 있다. 사랑의 영역의 핵심은, 만일 사랑이 중시되지 않는다면, 또한 절망적이지만 파괴할 수 없는 정념과 이 불성실한 사랑의 충돌에 의해서 파코리가 결혼할 수도 있을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질투로 변모되는 이 분별 없는 불성실함 때문에 위리디스의 저항이 시작되며, 엄밀하게 말해서 거기에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사건은 위리디스가 단순한 욕망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파코리의 집요한 시도에 대한 반대자가 되는

순간에 태어난다. 똑같은 방식으로 정치 영역의 핵심은 쉬레나를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쉬레나와 동맹을 맺으려는 오로드 왕의 욕망으로 이루어진다. 사랑과 정치를 고치기를 거부하는데서 생겨난 쉬레나의 저항만으로 그는 정치적 의지의 대상이라는 신분으로부터 반대자라는 신분으로 나아가며, 바로 거기에서 사건의 두 번째 측면이 시작된다. 정치적인 측면이 사랑의 측면에 중첩되며, 이 중첩이 비극의 모든 사건을 이룬다.

 

 

 

 

따라서 쉬레나는 두 주인공 각자가 욕망의 대상과 이 욕망의 실현에 대한 반대자라는 이중의 신분을 지닌 비극이다. 요컨대 두 등장인물을 통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사건이 이것뿐이라면 이것으로 족할 수도 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그들의 저항의 결과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코르네유 적 딜레마는 여기서 유일하게 허구적이다. 그들에게 제시되는 선택은 결혼하거나 죽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선택은 희망 없는 그들 사랑의 여건 속에 문제없이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우리는 여기서 황금기의 코르네유 체계의 전복을 포착한다.

보통 주인공의 의지는 가장 어려운 양자택일이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딜레마를 초월하며, 이 영웅적인 의지는 결국 비극에서 양자택일을 제거한다. 쉬레나속에서 두 주인공 중 누구도 선택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양자택일이라는 비극적 용어는 거부와 침묵 속에서 전도된 일종의 초월에 의해서 용어 자체에 부과된다. 여기에서 마지막 막의 영웅적인 새로운 전개의 부재가 유래된다. 코르네유의 마지막 비극 속에서 모든 <행렬>, 엄밀하게 말해 영웅주의는 자신에게 충실한 채로 모든 것이 나아가도록 내버려두는데 있다. 한 마디 수긍으로도 충분할 때, 사랑에 빠진 마음의 애정으로 말하기 위해 영웅적인 사랑의 개념을 잊은 채 팔미가 오빠에게 굴복하라고 간청할 때, 그는 부르짖었다. “애정은 결코 영웅의 사랑은 아냐."(53) 행동하지도 않고 그가 죽음으로 달려갈수 있는 것, 그가 관용적인주인공으로 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알다시피 숙명적인 죄악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빠져들거나 저항하는 라신느 적 사랑의 여건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코르네유에게는 사랑에 충실한 채 남아있다는 것, 그것 또한 영웅주의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