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슈로펜슈타인 일가'

clint 2019. 3. 21. 14:57

 

 

 

작품은 도입부에서부터 재산문제 때문에 상호 반목하고 증오하는 두 가계의 적대적인 대립으로 인한 슈로펜슈타인 백작가문 전체의 분열상황을 보준다. 슈로펜슈타인 가문에서 분가한 두 가계, 즉 루페르트, 오이스타헤 부부와 아들 오토카르로 구성되어 있는 로지츠 가(), 질베스터와 게르트루데 부부와 딸 아그네스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 질비우스로 구성되어 있는 바르반트가()는 예부터 내려오는 상속계약문제로 서로 대립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한쪽 가계가 멸절이 되면 다른 가계가 전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는 상속내용 때문에 두 가계에는 상대방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혐오의 감정이 자리하게 된다. 사촌지간인 루페르트와 질베스터의 대립관계 사이에 제3의 가계, 즉 오토카르의 삼촌인 예로니무스가 존재한다. 그는 적대적인 두 가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중재의 기능에 충실하지만 32장에서 루페르트의 부하들에 의해서 타살 당함으로써 가족공동체 속에 잠재된 분열적 상황의 냉혹함을 암시해준다. 작품의 도입부는 로지츠가 사람들이 루페르트의 어린 아들 페터의 관 주위를 둘러싸고 바르반트 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산속에서 막내아들인 아홉 살짜리 페터의 시신과, 그 옆에 피 묻은 칼을 들고 서있는 두 남자를 발견한 루페르트는 장례미사에서 장남 오토카르와 아내 오이스타헤에게 바르반트가 전체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도록 한다. 자신의 연인 아그네스가 질베스터의 딸이란 사실을 안 오토카르는 그녀와 함께 두 집안사람들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하지만 아버지 루페르트의 복수심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어느 날 산속 동굴에서 만난 아그네스와 오토카르는 로지츠가 사람들에게 발각된다. 오토카르는 루페르트로부터 아그네스를 보호하려고 옷을 서로 바꿔 입는다. 루페르트는 아그네스의 옷을 입은 자신의 아들을 찔러죽인다. 마침 그 자리에 와 있던 질베스터는 죽어가는 오토카르에게 몸을 던진 아그네스를 오토카르로 오인한 나머지 칼로 찌른다. 결국 페터의 죽음도 타살이 아니라 단순한 익사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두 사람의 시체를 앞에 두고 두 집안의 가장들은 절망의 상태에서 서로 화해의 손을 내민다.

 

 

 

 

이런 가족공동체 속의 대립적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클라이스트의 목적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서술주제는 이 세계의 분열적 속성과 그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 가능성이라고 볼 수 있다. 클라이스트가 가족모티브와 관련된 이런 서술 주제들에 천착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모티브의 제반 문제들이 세계의 분열성과 통일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특히 적합하기 때문인 것이다. 서로 대립된 슈로펜슈타인 가문의 두 가계 사이의 갈등 속에는 외면적으로는 선과 악을 각각 구현하는 질베스터와 루페르트의 개인적인 투쟁이 이미 예고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질베스터의 상황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설득력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두 가계 사이의 갈등의 시작단계부터 적당한 절제와, 두 가계가 하나의 핏줄이라는 동질성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냉철하고 사려 깊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소유욕과 불신의 유혹으로부터 압도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루페르트의 사악함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질베스터의 선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속성은 여전히 상대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는 선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제한된 자아의 존재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도 루페르트 처럼 궁극적으로는 자아의 요구를 변호하는 자기중심성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선한 의도나 의지가 상대방에 대한 적대성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는 극한상황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오해에서 비롯된 루페르트 측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복수욕의 격정에 휩싸인 질베스터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부터 나는 복수 외에는 다른 어떤 감정에도 사로잡히지 않겠소.” 오랫동안 선한 의도 속에 은폐되어 왔고, 호의적이며 객관적인 행동의 힘에 의해서 절제되어 왔던 질베스터의 단순한 자아는 갑자기 강력하게 흥분된 상태로 분출된다. 이성적인 성찰이 지배하는 존재단계에서 선과 악은, 동일한 차원에 있는 두 개의 양극으로서 결국 상대적이며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 작품에서 클라이스트는 근본적인 분열의 상황 속에서 노출되는 인간행위의 가능성을 묘사한다. 클라이스트는 불신, 증오와 복수욕 등은 그 분노의 대상을 파괴시키면서 스스로 소진되는 것이며 영혼의 더 강하고 새로운 힘을 통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해준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루페르트와 질베스터는 각각 자신들의 자식인 오토카르와 아그네스를 원수의 자식으로 오인하고 살해한다. 극한까지 치달은 복수욕은 적대자를 모두 제거하려는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게르트루데가 표현했듯이 질베르트 가족의 가지를 잘라내고 자기 가족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던 루페르트는 오히려 자기 가족의 가지를 잘라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질베스터도 루페르트에 뒤지지 않는다. 복수욕에 사로잡힌 격정적인 감정이 스스로 붕괴된 후에야 비로소 불신의 광기도 소멸된다. 현실을 잘못 해석한 현실오인과 현실미망은 그것이 단순한 미혹과 착각이었다고 인식되기 전까지 영향을 발휘한다. 정신적인 황폐와 고통 그리고 그 결과 맹목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하여 증오와 복수욕의 반대편에 선 감정을 수용할 가능성이 주어진다. 체념과 고통 속에서 쓰디쓴 화해가 종말을 장식한다.

슈로펜슈타인 일가에 나타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관통하는 역동적 역사의식은 가족과 사회공동체의 정체현상을 극복하는 인간의 자유의식을 구현시키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