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루이지 피란델로 '산의 거인족'

clint 2019. 2. 28. 12:42

 

 

 

 

 

 

 

피란델로의 신화극 산의 거인족의 창작 배경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즘이 모든 효력을 발휘하는 정치 체제(1923-1943)시대였다. 예술에 대한 비평적·부정적 시기로서 아방가르드 경향은 패배해 종말을 맞이해갔고, 전통적 아우라를 회복하며 더 이상 변증법적 요소가 아닌 카타르시스 적· 신화적· 상징적 요소에 기대는 경향이 이어져갔다. 게다가 피란델로의 작품들은 당시 연극을 질식시킬 위험의 소지가 있던 영화와 비교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소통과 메시지를 단념하면서 꿈과 환영을 보호하고 분리시키는 세계로 물러나느냐 아니면 대중관객의 저속함에 적응하느냐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관객과 재정 부족 때문에 그는 1928년 로마예술극장 감독직을 그만두는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 나온 그의 신화극들 가운데 마지막 유작 산의 거인족은 평생 예술의 형식에 대한 실험을 지속해왔던 피란델로가 말년의 파시스트 시대를 살면서 당대의 예술에 대한 깊은 위기의식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성찰하고 조명한 결과물이다.

 

 

 

 

산의 거인족속에는 거인 신화 말고도 또 하나의 신화 바뀐 아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산의 거인족속에서 자살한 젊은 작가가 지은 작품이 되어 일제 극단이 공연하려는 극중극으로 등장한다. 한 어머니가 아들을 빼앗겼다가 되찾는다는 내용으로, 시칠리아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 극의 전개방식을 보자면 먼저 각각 코트로네가 이끄는 스칼로냐티들의 빌라 스칼로냐 이야기와 일제 극단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 관객과의 소통 실패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어 이들 두 그룹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측의 예술에 대한 입장 차이를 대비시키며 소통의 실패라는 주제를 심화시켜 보여준다. 끝으로 공연을 위해 함께 하는 일제 극단원들과 빌라 스칼로냐의 예술가 그룹, 그리고 산의 거인족의 관객 그룹, 이 두 그룹 사이 대립의 고조와 파국을 통해, ‘관객과의 소통 실패라는 주제를 확정적으로 반복해 보여준다. 이야기의 행동은 스칼로냐라는 미스터리한 빌라에서 전개된다. 이곳에는 마법사 코트로네가 이끄는 여섯 명의 괴상한 스칼로냐티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별장 이름 스칼로냐는 불행, ‘스칼로냐티는 불행한 자들이란 뭇으로 마치 불행했던 그들의 과거 흔적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곳 빌라에서 맘껏 상상력의 세계를 펼치며 소박하게 살아간다. 빌라는 마법사 코트로네의 외침과 제스처에 따라 정면에 환상적인 오로라 빛 조명이 들어오거나, 여기저기서 초록색 개똥벌레가 망령들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든 환영들과 출현물들의 마법 창고이다 뒤쪽 벽들이 투명해지며 손님들의 꿈과 생각을 보여주기도 하고, 모퉁이에서는 볼품없이 버려져 있던 인형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인다. 빌라의 모든 것은 그렇게 매일 밤 음악과 꿈속에 있으며, 그들 내부의 알려지지 않은 꿈들이 그들 밖으로 나와서 생명을 얻어 산다. 따라서 코트로네는 빌라는 영()들의 것이며 그 영()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한다. 즉 코트로네의 마법의 행위는 작가가 그의 머릿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벌이는 창작 활동이고, 빌라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창작 행위의 산물을 뜻한다. 즉 빌라는 정신과 본성의 신비한 힘이 살아있는 공간, 그들만의 새로운 유토피아, 그들이 깨어있건 꿈을 꾸건, 말하고 상상하고 열망하는 그대로 장면들이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게다가 그 모든 환영들 즉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들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그것은 속임수가 아닌 정신과 본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진실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코트로네가 현실을 떠나 빌라로 온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는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 이곳으로 도피해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작품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증오한다. 그는 독자나 관객과 대면할 필요 없이 자신의 창작의 공간 안에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작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스칼로냐에 백작 부인 일제가 이끄는 거의 해체 상태의 극단이 도착한다. 일제극단의 단원들이나 코트로네는 서로가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임을 금방 알아챈다. 일제 극단의 상황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훌륭한 작품을 공연해왔지만 와해되기 직전의 비참한 위기에 처한 예술 활동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들이 공연하는 작품은 작품자체로서나 공연으로서나 예술적 완성도를 이미 확보된 훌륭한 작품이다. 일제의 남편인 백작은 일제와 공연을 위해 최선을 다해 후원한다. 그러나 정작 작품과 공연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관객들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공연들은 실패하게 된다. 결국 백작은 파탄상태에 이르며 극단은 거의 해체 상태에 이르고 단원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일제는 만신창이가 된 극단을 이끌고 그들의 극을 봐줄 수 있는 관객을 찾아 떠돌다 이곳 시골의 빌라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극단은 예술성 높은 작품을 공연하는 극단이지만 관객이 외면해버린 비참한 상황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패한 예술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코트로네와 스칼로냐티’, ‘일제 극단’, 이 두 그룹 모두 과거 현실 속에서 독자나 관객을 상대로 소통에 실패했기는 마찬가지이다. 각각 이들 그룹의 지난 이야기를 통해 소통에 실패한 예술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주제는 두 그룹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더욱 심화된다. 즉 관객과의 소통이나 그들의 반응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와 배우의 창작 과정에 충실하고 만족하느냐, 아니면 반드시 관객을 전제로 한 공연이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느냐 하는 입장 차이가 이 두 그룹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코트로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작품의 아름다운 가치만은 인정하는 일제극단 사람들을 옹호한다. 그래서 일제에게 자신들의 빌라에 머물기를 권하고 빌라에서는 모든 장면을 상상하는 대로 살릴 수 있다며 그녀 극단의 극을 자기들끼리 상상하고 표현하며 살자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코트로네와는 달리 자신들이 공연할 작품은 반드시 사람들(관객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녀는 작품의 예술성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코트로네는 일제에게 산의 거인족 앞에서의 공연을 주선하지만 이미 거인족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연 결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은 빌라를 벗어나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대신에 그녀가 그와 스칼로냐티들을 알아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공연제작의 권한을 위임한다. 작가는 상상력을 텍스트를 통해 자유로이 형상화시킬 수는 있지만 이후의 과정은 작가의 영역을 넘어서게 되는 점을 나타내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공연하기로 서로 합류한 공연자들의 입장(작가와 배우들)코트로네· 스칼로냐티와 일제 극단원들그룹, 그리고 관객의 입장인 산의 거인족그룹, 이 두 그룹 사이의 상호 관계를 통해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하는 예술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거인족이란 실제로 신화 속 거인족은 아니지만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체격이 큰 자들이라서 그렇게 불린다. 물론 공연은 거인족 앞이 아니라 그들과 인생의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칠고 야수적인 하인들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그들은 그들의 이해력과 만족도와는 거리가 먼 공연을 원치 않는다. 높은 수준의 공연이 아닌 오락거리를 원할 뿐이다. 이들은 코트로네와 일제극단의 입장에서는 예술에 대한 아무런 기초 개념도 없는 층의 관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객석은 예술작품을 관람할 준비라곤 전혀 되지 않은 아수라장이다. 결국 참다못한 일제가 관객들에게 짐승 같다는 말을 퍼부은 순간 그녀는 부러지고 찢겨 죽임을 당한다. 따라서 산의 거인족 공간은 예술이 패배한 공간-엄밀히 말하면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 공간-을 나타낸다. 또한 물질과 정신의 투쟁 속에서 정신이 패배한 곳이다. 이곳은 문명과 자연, 억압과 본능, 진정성과 비진정성 사이의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곳이다". 극의 이러한 분위기는 당시의 예술적 분위기와 피란델로가 파시스트 치하에서 바뀐 아들 이야기를 공연한 후 겪었던 예술적 상황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죽자 백작은 인간들이 세상에서 시를 파괴했다고 울부짖지만 코트로네는 그것이 누구 탓도 아님을 이해한다. 이것이 피란델로의 당대 예술의 분위기에 대한 결론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을 이해 못하는 거친 자들에 대한 경멸이나 모욕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소통을 위해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대한 성찰의 고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생활에만 급급한 거칠고 야만적인 정신세계를 지닌 관객들을 가리켜 피란델로는 생활에 광적인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들의 정신세계로는 일제의 공연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에게 순간적이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줄 쇼만을 원할 뿐이고 작품에 대한 이해는커녕 공연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존중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피란델로는 그들도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잠재된 미래 관객으로서 가능성을 존중한다. 한편 피란델로는 관객의 상황과 현재 상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작품을 이해하라고 밀어붙이기만 하며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무식한 짐승 취급하는 예술가들을 가리켜 예술에 광적인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피란델로는 자신이 예술가라고 해서 예술가의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 물론 피란델로에게 예술은 인생을 온갖 모습을 진실 되게 담아낸 형식상으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어야 한다. 그는 그 점을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이 그 자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 인터뷰에서도 예술은 인생의거울이 아니라 인생을 위한거울이다라고 말했듯이 그에게 예술이란 정신적 도덕적으로 보다 완성된 인생을 위해 필요한 이상들을 고안해내도록 도와야 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즉 그에게 이상적 인간이란 인생의 매순간마다 하나하나의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충분한 정신적 도덕적 유연성을 지닌 자이다. 그리고 그에게 지혜란 외부로부터 형식이 우리를 강요하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형식을 구성하는 데 있고, 그 형식 속에서 즉 우리가 선택한 도덕적 형식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생은 완성되어져야 한다고 한다. 피란델로에게 예술은 바로 이 점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예술은 인생의 거울이란 표현처럼 인생을 잘 담아내야 하는 것은 예술의 기본이지만, 그렇게 탄생하는 예술의 존재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위해서 이다. 따라서 예술의 상징인 일제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들과의 소통에서 실패했음을 드러낸다. 이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과제로 남는다. 일제가 죽고, 백작은 갑자기 가벼워지고 악몽에서 해방된 듯한 느낌을 갖는다. 크로모와 다른 배우들도 백작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은 무작정 질주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거친 관객들과의 싸움을 멈출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소통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이들의 새로운 지향 점이자 과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거친 인간들의 마음과 몰이해속 온갖 놀라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듯이, 예술가 또한 당장 소통이 되지 않는다 하여도 서로에게 보다 고양된 의식을 갖도록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라센의 올리브 나무는 바로 이를 위한 새로운 시발점을 나타내기 위해 피란델로가 상징적으로 사용한 무대 장치일 것이다. 용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사라센의 올리브 나무를 통해 피란델로는 소통에 실패한 예술에 광적인 자들생활에 광적인 자들’,이 양측의 화해를 암시하고 미래의 평화를 꿈꾸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