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들에게>는 1905년 가을에 반혁명세력과 흑색 백인조 세력의 협박 때문에 아파트를 계속해서 바꿔야했던 안드레예프는 10월 11일부터 20일까지 4막 드라마로 탈고한다. 그러나 그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전면적인 개작에 착수하여 같은 해 11월 3일 새로운 판본을 완성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이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여 같은 해 11월 10일 ‘예술극장’ 배우들이 자리한 가운데 희곡 낭독회가 개최되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는 1906년 해외순회공연을 위하여 <별들에게> 공연을 기획하였으나, 검열당국은 상연을 허가하지 않는다. 결국 <별들에게>는 오스트리아 빈의 ‘자유극장’에서 1906년 10월 21일에 초연되었다. 그런데 이 상연은 1906년 9월 사회민주당기관지 ‘노동자신문’에 부속되어 창립된 ‘자유 민중극장’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초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하는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17년 7월 ‘말라호프스키 극장’에서 자가로프 연출로 상연되기 전까지 <별들에게>는 러시아에서 줄기차게 금지되었다. 1906년 1월 2일자로 상연을 금지한 검열관의 평가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재능과 엄청난 고양의 분위기로 집필된 이 상징적인 드라마는 혁명과 활동가들을 이상화하는데 봉사할 것이며, 따라서 상연을 허가할 수 없다.” 사회주의 시월 학명 이후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별들에게> 상연은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트쿨트 극장’ 에서 므게브로프의 연출로 이루어진 것인데, 초연은 1921년 11월 27일이었다.
이 작품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관객의 면전에서 비록 혁명운동이 전개되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거기에 참가한 인물들의 구체적인 면면들이 객석에 직접적인 양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해도 <별들에게>는 강력한 연극성과 긴장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혁명운동의 발원지와 멀리 떨어진 천문대에서 무대의 사건이 진척됨으로써 ‘저기’와 ‘여기’ 사이의 대비효과가 발생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가시적인 무대 위의 사건들뿐만 아니라, 그것들과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비가시적인 사건을 각자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면서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혁명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니콜라이는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언어와 사유 및 행위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극적인 사건의 진척과 종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안드레예프의 희곡 <별들에게>의 공간적 배경은 시종일관 산악지대에 위치한 천문대의 안팎으로 설정되어 있다.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그러하듯 극작가는 매우 상세하게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제1막 무대지시의 특징은 엄격하고도 소박한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방은 식당 비슷한 큰 방으로 하얗고 두꺼운 벽을 가지고 있다 몇 점의 판화가 있다. 천문학자들의 초상화와 예수를 가리키는 별에 인도되는 점성술사들 도서관과 서재로 올라가는 계단. 이런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은 산악지대의 눈보라가 울부짖는 한겨울 밤중에 ‘여기’와 거리를 두고 있는 ‘저기’를 생각하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특히 혁명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맏아들 니콜라이와 약혼자 마루샤 그리고 딸 안나 내외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는 ‘저기’에 대한 상념 때문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다. <별들에게>에서 지주 반복되는 ‘저기’의 모티프는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생한 거대한 사회 · 정치적인 변혁운동의 진행과 그것에 끝없이 관심을 보이는 무대의 등장인물들 사이의 연관을 강조한다. 인나뿐 아니라,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 된 페챠 역시 ‘저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또한 혁명이나 사회변혁과 같은 지상의 일들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해 보이는 천문학자인 아버지까지도 ‘여기’와 대립적인 개념의 ‘저기’를 말한다. 그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기의 개념은 저기와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죽음과 고통 및 투쟁의 ‘저기’와 별들이 지배하는 평화와 안락의 세계인 ‘여기’ 사이의 심연은 참으로 깊다는 인상이 생겨난다. 결국 천문대와 혁명운동이 발발한 도시, 여기와 저기, 차안과 피안의 대립적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작품에서 니콜라이는 관객에게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가 참여하고 있는 혁명운동의 실상과 진행과정 및 그 후의 이야기들은 다른 등장인물들, 예컨대 그의 약혼자 마루샤나 누이동생 안나 내외 혹은 다가올 새로운 혁명세력의 주체인 노동자 트레이치 등의 말을 통해서 객석에 전달된다. 더욱이 이곳은 혁명운동이 발발한 도시의 공간과는 너부도 멀리 멀어져있는 천문대이며, 띠라서 지상의 존재나 이야기들보다 천상의 주인인 별들과 천체, 혹은 그들의 대화가 더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안드레예프는 소용돌이치는 혁명운동의 양상 전체와 참여자들의 면모를 약여하게 그려냄으로써 드라마의 긴장과 이완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세르게이 니콜라에비치는 언제나 별이 빛나는 천상의 공간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의 흉중에 위치하는 니콜라이의 운명 전반에 대한 고통스러운 심려는 지상과의 안타까운 제휴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무도 멀리, 너무도 완전하게 격리된 공간 속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고뇌하고 있는 사회적 존재와 개인적 의식 사이의 괴리에서 당대 인텔리들의 혁명에 대한 사유의 일단을 엿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별들에게>는 지상과 천상, 혹은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 ‘지금’과 ‘여기’에 대응하는 ‘영원성’ 등의 대립적인 개념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충돌은 세대의 갈등 양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전자는 혁명운동에 깊이 가담하고 있는 아들 세대고 후자는 그것과 무관하게 하늘의 별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버지 세대가 대표한다. 특히 안나와 베르호프세프 내외와 세르게이 니콜라에비치 사이의 대화는 긴장과 충돌로 두드러진다. 아들 세대가 지금 치열하게 사유하고 충돌하는 모든 지상적인 것을 덧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세르게이 니콜라에비치는 천상의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아들 세대가 혁명운동에 부여하는 현재적 당위성은 지상의 저급한 번뇌를 무시하고 별들에게로 나아가려는 아버지 세대의 영원성 추구와 지속적으로 갈등 · 반목한다. 그러나 피날레에서 양자의 대표자인 마루샤와 세르게이 니콜라에비치는 대립과 항쟁이 아니라, 조화와 화해를 통하여 서로 손을 맞잡는다. 그는 ‘영원의 아들에게 죽음이란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피력하면서 니콜라이가 마루샤와 페챠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살아 있음을 확언한다. 그러므로 혁명의 순교자 니콜라이를 매개로 하여 천상의 대표자와 지상의 대표자는 각자의 길을 떠나되 거기에는 더 이상 화해 불가능한 갈등과 반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강력한 비극성이 어느 정도 희석된 ‘비희극’의 분위기를 <별들에게>에서 조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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