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타데우쉬 루제비츠 '카드인덱스'

clint 2015. 11. 5. 15:48

 

 

 

 

 

타데우쉬 루제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명이고, 『카드인덱스』는 그의 드라마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루제비츠는 『카드인덱스』에서 인간의 존재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다룬다.
루제비츠는 인물 구조에 있어서 이미 검증된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식을 선택한다. 『카드인덱스』에는 전쟁의 경험과 혼란스러운 현재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주인공 보하테르가 등장한다. 주인공 보하테르는 그저 무대 위로 내던져져 있을 뿐이다. 또한 등장인물들에게서는 개성이 사라지고, 인물들의 성격을 규정짓는 기본적인 요소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은 매우 종합적이고 집합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로서 세대와 민족, 직업 등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런 작업을 통해 루제비츠가 목적하는 바는 인간을 비인격화하는 것이며, 장기판의 말이나 마리오네트같이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루제비츠는 소외되고 고독하며,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모습을 상징화한다.
『카드인덱스』의 대화와 언어는 불연속성과 탈의미화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대화법은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여 새로운 의사소통의 구조를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상호 의미전달의 기능을 잃은 언어는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카드인덱스〉 조각난 그러나 시라지지 않는...
루제비츠는<카드인덱스>에서 각각의 장면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도록 느슨하게 엮음으로 전통적인 드라마의 구조를 파괴한다. 루제비츠는<카드인덱스〉의 초연에 대해 이렇게 기억을 떠올린다. “(...) 애초에 배우들과 비평가들 대부분은 이런 연극의 타입을 거부했다.<카드인덱스〉의 초연은 어려운 일이었고 배우들은 무대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후에 어떤 비평가들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모여들었다.”
〈카드인덱스>은 전쟁으로 파괴당하고 전쟁 후의 현실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고찰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와 연관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방 안,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다. 그들 모두는 '주인공'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독자들과 관객들에게 주인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극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의 진짜 이름을 우린 알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인생에 대한 카드인덱스를 들여다보면서도 우리는 주인공의 이력서에 쓰여진 분절된 기억의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의 이력서가 구체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혼란스럽고 조각난 인생의 파편들에 우리 스스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로 연결시켜야 한다. 그래서 드라마의 제목은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떤 카드인덱스의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겨가며, 주인공이 살았던 삶을 우리가 알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카드인덱스>의 주인공에 대해서 우린 이름도 성도 알지 못하며, 그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서 어떠한 말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우리의 주인공은 빅토르, 바츠와프, 스타시, 브와덱, 피오트르, 지덱, 바첵, 유렉, 즈비흐 야넥, 타덱 같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대게는 그저 '주인공'이라 불리어질 뿐이다. 주인공을 부르는 많은 이름은 '주인공' 안에 내재된 복잡성을 의미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상징이다. 그래서 그는 개인이자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우리는 또한 그의 나이도 모른다. '주인공' 자신이 기록한 이력서에 의하면 그는 1920년생이지만, 한번은 일곱 살이었다가, 그 다음엔 마흔 살, 그리고 또 어느 때엔 서른여덟 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인공'의 인생의 마디마디를 들여다보지만, 정말로 그가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주인공'은 세상에 무관심하고 수동적이며, 노인코러스의 격려와 비난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그 어떤 말에도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저 침대에 누워 방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할 뿐이다.

 


<카드인덱스〉은 또한 자신에게 세상을 담지 못하고, 세상 속에 자신을 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이 '주인공'의 비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불안감,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붕안감, 그리고 그 자신이 전체 속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미 하나 된 세상이 사라졌으며, 혼동과 불안, 타인에 대한 신뢰 부족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주인공'이 지닌 인간성의 분열은 그래서 기존의 가치 붕괴와 세계의 분열로 인해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비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이 이상한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다다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인간성이 붕괴되고 인생의 목표를 상실한 채 표류하는 존재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이 확인시켜 주는 한 가지는 '주인공’이 결코 인생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타데우쉬 루제비츠(Tadeusz Rozewicz, 1921~ )
1921년 10월 9일 폴란드 라돔스크에서 태어난 루제비츠는 시인이며, 수필가이고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리고 곰브로비츠(Witold Gombrowicz)), 므로젝(Slawomir Mroaek)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드라마 작가이다. 루제비츠가 가진 창작에 대한 열정과 개성은 시, 드라마, 수필, 영화 시나리오 등 다양한 문학적 장르와 형태에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중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루제비츠는 이미 1936년경에 그의 첫 번째와 시들과 드라마를 완성했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기간에는 개인교사로 육체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1942년에 폴란드 국내 군에서 조직한 장교학교를 마치고 이후 국내군 빨치산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경험은 1944년 그가 발표한<숲속의 메아리>에 담긴 시와 에세이들에 잘 나타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까지 크라쿠의 야기엘 로인스키 대학교에서 예술사를 전공했다.
폴란드에서 1920년 무렵에 태어나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 전쟁은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잃었고 또 일부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 이후의 삶은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겼던 시대에 대한 악몽과 다름없는 기억이 각인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 폴란드 작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였고 그들 사이에 루제비츠가 있다. 루제비츠가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인 1950년대 폴란드에는 미친 듯이 들리기도 하는 온갖 사회, 정치, 문화적 구호와 새로우면서도 유익하고 유일하게 올바른 체제 건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바탕 둔 예술 창작 그리고 현실을 외면한 “박수치기”가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상징'들은 처음엔 당의 의무교리로 수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이후엔 우유부단한 도덕성으로 그것을 견디어냈던 사람들에게나 또는 자신의 창작성과 태도를 사회주의와 협력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폴란드 역사에서 히틀러가 지배했던 제2차 세계대전시기와 스탈린주의가 지배한 폴란드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시기에는 정상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고방식이 생겨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루제비츠의 모든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다. 루제비츠가 가지고 있던 초기의 창작 모티브에는 전쟁의 참상과 그것을 경험한 인간들의 타락한 영혼,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형성에 대한 불가능성, 인간성의 분열, 위협, 그리고 지극히 단순한 감정과 진실, 질서로 채워진 현실에 대한 그리움 등이 나타난다. 빨치산에 대한 자전적 기억, 자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양심의 가책, 스탈린 시대에 사회에 무관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아비판, 도덕적, 철학적, 미학적 체제의 붕괴를 바라보는 작가로서의 의무감 등이 초기작품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루제비츠의 드라마들은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자리매김 되어 있다. 열린 구성으로 이루어진 행동규칙이나 시간의 연속성 등이 배제란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인공 또는 여러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연극. 이것은 루제비츠의 드라마가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대학시절부터 여러 문예지들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이미 시인으로서 인기를 얻고 있었던 루제비츠는 1960년에 드라마 〈카드인덱스>를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는 전쟁의 경험과 흩어진 카드처럼 산산조각 나버린 현재 자신의 혼란스러운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주인공/(Bohater)'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드라마 작가로서 루제비츠의 데뷔작이었고, 데뷔작은 바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리고 루제비츠는 이 작품을 비롯하여 이후 일련의 드라마 작품들에서 현대문명과 문화 그리고 드라마 형식에 관한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나를 연극과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루제비츠는 이렇게 묻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연극과 나를 묶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실 극과 동시에 시극을 쓰고 싶은 나의 열망이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시극이 사실극과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르고 있기 때문 이다. 시극이 사실의 힘을 능가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극적인 것이 '시'의 힘을 능가해야만 하는 것인가"
루제비츠의 드라마는 구제적인 관념을 은유와 상징, 암시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그의 시에서부터 출발하고 발전한다. 가장 최신의, 현재 유행하는 극작법에 생생한 관심을 표하는 루제비츠는 종종 자신의 작품들에 체홉과 베케트를 인용한다. 그리고 흐비스텍, 비트카치가 만들어낸 예술적 개념을 이용하여 새로운 극작법의 모델. 즉 작가 스스로가 “열린 연극” 이라고 이름 붙인.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광범위한 개념의 "실내극”을 창조해냈다. 루제비츠의 드라마에서는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전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우연적, 즉흥적, 파편적인 행동으로 엮어진 구조로 변하게 되는데, 이에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루제비츠가 말했듯이 이러한 구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몸을 맡기고 빠져 들게 된다.
루제비츠는 기존의 드라마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전통적인 “사건”을 제거하는 반면, 극중 인물들의 행위에 개연성을 더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고전 연극과 아방가르드 연극, 그리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과 관습과 맞서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들에 대한 작가 자신이 보여주는 투쟁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루제비츠는 그 자신이 "불가능한 연극"라고 정의내리는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의 연극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나갔다. 이전 작품들에 대해 모순을 제기하거나 또는 무언가 빠진 듯 보이는 구성을 지닌 루제비츠의 작품들은 때때로 연출가들이나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극장을 장악하는 것, 이슈가 될 만한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것, 무대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 등 작가의 실험자적인 초기 작업은 이후 연이은 출판물들과 시연 그리고 우리 모두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루제비츠는 공공연한 태도로 지금까지의 형식을 파괴하고, 그와 동시에 위대한 도덕주의 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니힐리즘을 공격한다. 그는 분명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대성을 바라보고 생동감 있게 그리고 뜨겁게 현대성에 반응 하는 작가이다. 39세 시인의 드라마 데뷔작인 〈카드인덱스〉는 작가의 개인적 그리고 그 세대의 경험에서부터 탄생한 것이었고 곧이어 그 세대의 양심으로 그리고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전쟁 전에 태어나 청년기를 나치와 소련의 점령시기에서 보내고, 성인이 되어서는 스탈린 시대에 살아야했던 루제비츠는 이 작품에 자신의, 그리고 그 시대를 공유한 세대의 경험을 직품 속에
포함시켰다. 카드인덱스의 주인공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주인공'이다.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경계를 보이고 있고 루제비츠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콜라주 기법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 파편적으로 이루어진 드라마의 구조와 에피소드는 '주인공'이 지닌 기억의 기록이며 정신적 내상의 반향이다.
루제비츠의 드라마는 무대 상연이 힘들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극적 요소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으며, 어떤 작품들은 비연극적이고 공연을 위한 각색이 불가능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는 비전통적인 주인공과 행동과 사건, 대화 그리고 작가 특유의 안정성이 가져온 결과이다. “불가능한 연극”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루제비츠는 부조리극의 형식과 그로테스크, 무질서를 이용하거나 복잡한 거리 또는 쓰레기 더미 위에 올라앉은 이상한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와 관객, 연출자의 상상에 의해 비로소 채워질 수 있는 극의 배경에 대한 근원이다. 루제비츠 자신의 다양한 경험들에 의해 비롯된 작품의 의도에 연출자들의 각기 다른 해석과 평론가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더해져 루제비츠의 드라마에 의미를 더한다.
루제비츠는 자신의 드라마를 “사실주의적- 시적” 드라마를 규정지으며, “열린 드라마”라는 새로운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의 파격성은 드라마의 자유로운 구조를 통해 모든 문학적 전통과의 단절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며, 무대 위에 올려지는 텍스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무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이다. 작가는 예술가와 예술의 위상을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폴란드 민족이 지닌 신화성과 불필요한 영웅주의를 꼬집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루제비츠가 작품에서 풀어내는 20세기 후반에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주요 갈등과 문제들 - 사회적,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인 - 이다. 전통과의 게임, 청산 문학적 경향 및 도덕적인 문제들은 자연미학적 반성과 맞물려 있으며, 범인류적인 관점은 다시 개인의 관점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와 현실에 고민은 작가의 개인적 관심을 넘어 다시 수많은 독자들, 그리고 관객들과 함께 소통하고 있다. 폴란드적인 역사 문화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대사회의 문제를 대중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루제비츠의 작품이 세대와 국경을 넘어 여전히 주목받고 사랑받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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