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 콕토 '지옥의 기계'

clint 2015. 11. 5. 17:41

 

 

 

 

 

《지옥의 기계》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밑그림으로 한 작품 이다. 전 4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막에는<유령>,<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만남>,<신혼초야>,,<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제 1막은 선 왕 라이오스의 유령이 테베의 성벽 아래에 나타나, 이오카스테와 테이레시아스가 사건의 진위를 확인하러 성벽을 방문 하는 장면이다. 제2막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 서는 이미 극 행동이 전개되기 이전에 완료된 사건인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와 대면하여 수수께끼를 풀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며, 제3막은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가 혼례를 치른 날 밤을 재현하고 있다. 4막은 소포클레스의 작품 전체를 포괄 압축하는 장면들로 진실이 밝혀지고 비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 왕》의 기본 골격은 콕토의 극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근친상간을 범하게 되고,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자신의 눈을 자해한다는 줄거리는 소포클레스의 극과 맥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소포클레스의 극과 비교해 볼 때, 콕토의 고대 비극의 현대화 노력은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된 듯 보인다. 먼저 콕토는 라이오스의 유령과 스핑크스, 네메시스, 중년 부인 등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창조해냈다. 극의 초반 에 등장하는 라이오스의 유령은 《햄릿》의 첫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콕토는 《햄릿》과의 유사성을 - 국왕 시해, 시해자와 미망인의 결혼, 근친상간의 그림자 - 암시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극의 전개 과정을 미리 유추케 한다. 또, 1막의 라이오스 유령과 이오카스테의 실현되지 못한 만남과 2막의 테베를 향해 다가오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만남을 동일한 시간대에 설정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암묵적인 갈등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한편, 스핑크스와 네메시스의 무대 적 현존은 오이디푸스 몰락의 최대 원인인 그의 성격적 결함. 즉 오만과 파렴치함을 강조하는데 적절한 기능을 한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에 입성하여 왕비와 결혼할 수 있었던 영웅적 행위는 사실상 그의 용맹성과 지적 역량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스핑크스가 베푼 사랑의 행위와 그것에 대한 그의 배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이디푸스의 왜소한 인격을 드러내고, 그의 종국적 파멸에 정당성을 제공한다. 한편, 중년 부인과 스핑크스의 대면 장면은 테베의 현실상황과 민심을 읽게 하는 단초가 된다.

 

 

 

 

콕토의 현대화는 새로운 등장인물의 창조에서뿐 아니라, 기존 등장인물의 성격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콕토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처럼 위엄 있고 지적이며 강인한 인물이 아니다. 콕토의 오이디푸스는 명예와 영광 그리고 권력을 꿈꾸는 몽상가이며 야심가이다. 그는 "너는 네 아비를 죽이고 네 어미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천인공노할 신탁을 듣고도 그것에 겁을 먹기보다는 그 신탁을 코린트의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핑계로 이용할 만큼 방약무인하다. 여행길에 끓어오르는 혈기로 살인을 저질러놓고도 곧바로 훌훌 털어버릴 정도로 심상하고 천연덕스럽기도 하고, 신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는 오만함과 살인행위를 자신의 용맹함의 증거로 생각하는 자기 본위적인 이기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오카스테 역시고대극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진 성격적 변화를 보인다. 소포클레스의 이오카스테는 궁중 법도인 위엄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남편과 오빠 크레온, 예언가 테이레시아스의 그늘에서 조역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하지만 콕토의 여주인공은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 다소 경박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주며 극 행동을 주도해 나간다. 이오카스테의 역할 부상에 힘입어 콕토의 극은 소포클레스의 극과는 달리, 친부 살해의 국면은 후면으로 퇴각하고 근친상간의 국면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된 듯 보인다.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의 변화 속에서도 콕토의 쇄신을 엿볼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전적으로 연민과 공포를 겨냥하는 비극 장르에 속히는 것이라면, 콕토의 극은 여러 장르의 혼합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콕토 의 극은 《햄릿》의 모방으로 시작되어 상업극으로 전환한 듯 보이다가, 동화 같은 우화적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2막), 아기자기한 사랑 다툼이 있는 멜로드라마의 특징을 보이기도 하며(3막), 마지막에 가서는 고대극과 마찬가지로 운명의 냉혹함과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주며 비극적 비장미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장르의 혼합으로 극이 진행되는 동안 희극적 상황들이 빈번히 재현된다. 시대를 넘나드는 상황이나 사물들의 등장, 현대적인 속어 사용, 영웅들의 위대함이나 고결함과 대조를 이루는 일상적 상황 설정 등은 희극적 상황들을 촉발시킨다. 예컨대 고대를 재현하는 장면에서 나이트클럽과 같은 현대적 장소를 일컫는 어휘가 등장하는가 하면, 이오카스테는 제관을 '지지'(프랑스어로 지지(Zizi)는 성기를 의미하기도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이사도라 덩컨의 죽음을 상기시키듯 마차 바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이오카스테의 스카프가 언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희극성과 비극성을 뒤섞는 장르의 혼합은 20세기 비장미가 결여된 오이디푸스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무엇보다 콕토의 혁신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해석하는 그의 관점에 있다. 그것은 극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지옥의 기계(la machine infernale)'는 이중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수학적 전멸'을 겨냥하는 운명의 가차 없는 기계와 같은 작동 원리를 내포하고, 다른 하나는 시한폭탄과 같은 폭발적 위험 물질을 일컫는다. 콕토의 오이디푸스는 음험하고 폭력적인 운명의 작동원리에 의해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무너진 비극적 영웅의 측면과 함께, 자신의 내적동기(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인격적, 도덕적, 지적 결핍과 빈곤)로 인해 스스로 파경의 나락으로 뛰어든, 그리고 주변까지도 파탄으로 몰아넣은 시한폭탄의 측면을 겸유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운명과 신이라는 절대 권력에 의해 희생되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소나마 실존적 차원에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이 주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옥의 기계》에 나타난 정신분석적 요소
흔히 《지옥의 기계》는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의 무대화로 일컬어진다. 프로이트가 유아기의 심리, 즉 어머니를 흠모하고 아버지를 증오해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예증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찾고자 했다면, 콕토는 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실제로 증명하는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소포클레스의 텍스트 속에서 잠재적인 양상으로 내재되어 있는 프로이트의 유아기 '근친상간'의 욕망을 비롯한 무의식과 꿈에 관한 이론들이 콕토의 작품에서는 완전히 외연적으로 형상화된다.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욕망을 서슴없이 말하고 행동하며. 등장인물이 말하는 꿈 이야기 혹은 실제로 꾸는 꿈들은 작품의 의미 해독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가 "당신은 젊습니다, 오이디푸스. 너무 젊어요. 이오카스테는 당신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지는 대목에서, "나는 늘 이런 종류의 사랑을, 모성애적인 사랑을 꿈꿔왔습니다." 라고 응수한다. 이오카스테 역시 테이레시아스에게 "사내애들은 말하곤 하죠. '난 커서 엄마랑 결혼할거야."라고. 테이레시아스, 어처구니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테이레시아스, 아들과 젊은 어머니 커플보다 더 자긍심 있으면서도 온유하고 가혹한 부부 생활이 있을 수 있을까요?" 라고 말한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는 서로를 '무거운 아기', '사랑하는 여보 엄마'라는 함의적인 호칭으로 부르면서 근친상간 적 욕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발설한다. 또한 이오카스테가 반복해 꾸는 '밀가루 반죽'에 관한 꿈 역시 그녀의 죄의식으로부터 추동되어 오이디푸스와의 결합 욕망을 은밀히 암시하며 운명을 예고한다.
이렇게 콕토의 작품에서 프로이트 이론이 중추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그의 자전적 삶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콕토의 아버지는 그의 나이 아홉 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른 나이에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자리는 작가의 삶 속에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남겼으며, 이 아버지의 자리는 지성적이며 매혹적이고 독점력 강한 어머니에 의해 서서히 메워졌다. 성인이 된 뒤까지 이어진 어머니와의 남다른 밀착 관계는 그가 유아기에 해소했어야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콕토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속에 자신과 어머니의 모습을 투사하여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면서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해소의 실패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비교해 볼 때, 콕토 최대의 독창성은 음험한 신비 혹은 자학적 침묵의 영역에 갇혀 있던 여성 등장인물들을 현실화하여 그 역할에 중요성을 부여한 데 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부차적 인물로 격하되어 있던 여성 등장인물들이 콕토의 극에서는 중심인물로 부상하여 오이디푸스 못지않게 빈번히 무대에 출현하며 극 행동을 주도해 나간다. 여성들에게 씌워진 굴레와 속박을 과감히 벗어던지는 오늘날의 탈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징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콕토는 이 작품에서 두 명의 대조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한 명은 다소 경박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여인에서 아들에 대한 지극한 모성을 지니는 여인으로 변해가는 여인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지순한 사랑을 간직했다가 복수심에 불타는 여인으로 변해가는 여인상을 그려내 있다. 오이디푸스와의 만남의 시점을 놓고 볼 때, 이 두 성상은 오이디푸스가 갈망하는 여성의 두 축이다. 하나는 못하고 아늑한 모성으로 자신을 감싸 안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매혹적인 미모와 재기로 그를 매료시키는 여성이다. 얼핏 보아 대척점에 위치해 있는 것 같은 이 두 여인은 소극적이거나 내면적인 여성으로 극 속에서 후경 화되어 있기보다는 전면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성의 적극적 현존'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오이디푸스에게 복속되는 여성들이 아니라, 오이디푸스를 지배하는 여성들이다. 피동적인 대상들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들이다. 이오카스테가 모성의 보호와 통제로 오이디푸스를 제압하고 있다면, 스핑크스는 신격이 지니는 매혹과 지성 그리고 잔혹성으로 오이디푸스를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의 운명은 여성들의 주도하에 완성된다. 스핑크스가 던져준 해답은 오이디푸스를 이오카스테에게 데려다 주었고, 이오카스테의 열정적인 애정 공세는 오이디푸스에게 관능과 모성의 자력을 발휘하여 그와 자신을 단단히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여성 역할에 대해 남성 작가 콕토가 쏟는 각별한 관심은 그가 속해 있는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껏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룬 작품들 속에서 잠재상태로 머물러 있던 여성 등장인물들을 수면으로 끌어올려 활성화시켰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이들을 무 의지적이고 자학적인 수동성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주체로 바로 서게 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배려의 원인 역시 그의 자전적인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정상적인 성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이성과 동성을 넘나들며 그가 보여준 성적 파격, 비정상적인 성욕의 표출은 그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혼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풍속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따라서 인습과 편견의 벽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실감하면서 구속당하고 박해받았던 작가가 인습과 편견으로부터 소외된 자리에 있는 여성에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역할을 부여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사회 속 '타자'로 인식하였던 그는 또 다른 사회적 타자인 여성에 대해 정서적 동질성을 느꼈을 것이다.

여성 등장인물들을 종속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 특유의 히스테릭 한 감수성을 부정적 자질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우주의 섭리를 꿰뚫는 긍정적인 자질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여성에게 덧씌워져 있는 질서와 금기에 대해 어느 정도 도전과 대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콕토를 페미니스트 작가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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