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생인 유미리가 쓴 「해바라기의 관」
어둠속에서 조그만 불빛들이 깜박이면서 「사랑하무니다. 사랑해요」 라는 속삭임이 들리면서 막이 오른다. 멍석처럼 깔린 태극무늬 천과 높다란 한국식 장지문, 그리고 그 너머로 커다란 보름달이 태극과 조화를 이루며 암울한 분위기를 펴낸다.
주인공격인 이영귀는 여고생으로서 「다녀오셨어요.」만 되풀이하는 구관조를 키우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녀이다. 가출한 어머니의 화장품을 몰래 꺼내보다가 아버지의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는 글을 모르기에 걸핏하면 바람둥이 아내가 남기고 간 편지를 아들 영민에게 읽히는 자학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센징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 놈보다 강해야 한다」면서 아들에게 몇 년째 동경대학을 강요한다. 남매는 마당에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있는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단란하게 지내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상처받은 나날을 보낸다. 영민은 한국인 클럽에서 일하는 박영옥을 사랑하는데, 어느 날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그녀를 목격한다. 또한 여동생이 자신의 친구에게 겁탈당한 사실을 눈치 챈다. 번민하던 영민은 한순간 동생을 여자로 느끼기도 하다가 환상 속에 여동생의 목을 졸라 땅에 묻는다.

공연이 끝난 후 작가 유미리는 “목 조르는 것 말고는 모두 제 이야기예요.”라고 말하면서 연극으로는 다 못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유미리는 14세 되던 해에 가정의 와해를 체험한다. 유미리와 막내 하루오 그리고 어머니는 가마꾸라로, 장남 하루끼와 여동생 애리는 아버지와 함께 요코하마에 흩어져 살게 된다. 1991년도에 발표한 「해바라기의 관」 은 요코하마에 남은 3명의 가족을 모델로 해서 와해된 가족의 일상을 조명한 자전적 작품이다.
대학 수험을 앞두고 정신적 불안을 겪는 오빠, 유년의 상처를 씻지 못하는 여동생, 밤마다 집나간 어머니의 편지를 읽게 하는 아버지 등 등장인물들은 모두 고독한 존재로 그려져 있다. 유미리는 이들 가족 간의 상호 갈등과 소외를 상징적 장치를 통해 심도 있게 형상화 해내고 있다. 예컨대 ‘어서 돌아오세요(오가에리 나사이)’ 만을 반복하는 구관조, 어머니의 부재를 침묵으로 입증하는 거울 등 소도구를 적절히 활용하여 커뮤니케이션 부재라는 병리적 현상까지를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해바라기의 죽음」에는 재일한국인이 겪는 절망과 비애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어 유미리의 작가적 면모를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다. 그녀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함에 도취되어 더 이상 지나간 상처를 기억하지 않는 현대인의 무디어진 감성에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무기로 날카로문 자극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연출의 글 - 박상현
‘해바라기의 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무척 강렬했다. 거기에는 절망한 청춘의 절규, 정서의 파탄, 사랑과 미움, 원망과 그리움 등 상반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고, 이러한 격정들이 폭발될 듯하면서도 안으로 응축되며 시종 긴장된 구조를 끌어가고 있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행동보다 정적이 더 격한 연극 - 한마디로 매력적인 희곡이었다. 또한 일본어로 쓰여진 희곡임에도 한국인의 정서와 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여느 창작극보다 더한 애착이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었을 때, 몇 가지 간단치 않은 문제점들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작가는 지문을 소설의 묘사처럼 쓰고 있는데, 그것도 매우 주관적이면서 구체적인 표현들이었다. 자신의 심리적인 경험과 이미지들을 그것도 때로는 무대 위에 보여 지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지시’ (directing)하고 있는 것이다. 아하, 이 여자는 작가이면서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자기 안에 꽁꽁 숨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기만의 언어를 세상에 던져놓고 어디 찾아올 테면 찾아오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미묘하고도 난이도 높은 미로찾기인데....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하자면 작가의 자유이자 권한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자면 그것을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유미리의 무대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찾아가 봐야지. 그런데 .... 보다 심각한 고민은 대사의 이중성에서 나온다, 이 희곡에는 등장인물들이 한국어와 일본어를 함께 섞어 쓰는 부분이 있다. 재일교포인 영민은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일본으로 돈 벌러 간 바걸 영옥은 일본어를 잘 모른다. 이들 둘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영민이 알고 있는 한국말은 고작 부모가 싸울 때 주고받았던 “바보, 못난이, 이누무 가시나, 이누무 자슥” 정도이다. 그것도 아주 서툰 발음으로.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음으로써 파생되는 단절감, 안타까움, 수치심, 오해 등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연극적 모티브이다. 더군다나 관객의 상당수가 재일교포였을 일본공연에서는 썩 훌륭한 효과를 보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우리 관객들 앞에서 이 효과를 보여줄 방도가 막막하니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 모티브를 생략해도(말이 생략이지 사실은 포기나 다름없다) 작품의 분위기나 연극성이 크게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머지 재료들만 해도 연극성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눈에 뻔히 보이는 보물을 그냥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세 번째 문제. 이 작품의 결말은 상당히 파탄적이다. ‘근친상간’ ‘근친살해’ 보다 더한 비극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이러한 결말을 사실적 시각으로 볼 때 우리 관객의 정서상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후자는 이것을 ‘일본적’이라고 치부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그 결말의 사실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치를 마련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블랙홀(Black Hole)이라는 것이 있다. 블랙홀은 거대한 질량의 별이 자체의 중력에 의해 무한정 수축하면서 생겨난 시공(時空)의 어떤 영역을 뜻하는 것으로, 일단 그 속에 빠지면 어떠한 물체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 작품에 나오는 영귀의 가족들은 집단자폐증에 빠져 있다. 민족적 정체성(Identity)도 가질 수 없고 정서적 생명줄인 모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들은 정서적 블래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한 가족이 외부로부터 따돌려지고 배척당하면서 안으로, 안으로만 오그라들 때, 그들은 수축되는 별처럼 서로의 몸으로 파고들고, 그리고는 폭발되지 않겠는가. ‘근친상간’과 ‘근친살해’는 고립된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재일한국인 2세 가족의 비극성의 한 상징일 뿐, 사실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문제’라고 했지만 이 문제들은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곧 빛일 수도 있다. 소중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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