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루이지 피란델로 '엔리코 4세'

clint 2018. 9. 23. 11:41

 

 

현대의 부조리 극작가의 모태가 된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품세계는 인생과 환상, 실제와 현실, 자아와 허상의 대립적 구도를 주로 다루고 있다. 피란델로는 이러한 대립적 구도를 꿰뚫고 지나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만남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이 작품에는 인생이란 실재를 비춰주는 다양한 거울과 같은 장치들, 즉 가면, 놀이, 동일한 외모, 거울, 시간과 공간의 고착, 동일한 상황 등이 이용된다. 이것을 통해 행복과 자기만족 그리고 자아의 안정이라는 환상과 실제의 삶이 갈등, 대립, 융합하는 모습이 표현될 것이다.

작가는 <엔리코 4>에서 역사 속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인물을 차용하여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엔리코 4세가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고 미치광이와도 같은 연극을 현실에서도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부조리, 관계가 억누르는 고통은 작가의 삶과도 맞닿아있다.

 

 

 

 

 

 

<엔리코 4>는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아비뇽 유수사건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연극<엔리코 4>에서는 표면상 매우 복잡한 중세 신성 로마 제국 시대 교황권에 맞섰던 하인리히 4세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기구한 인생 역정이 이야기의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극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세 남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방식의 사랑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엔리케 4세>는 <작가를 찾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과 더불어 피란델로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희곡이다 이 희곡은 스스로를 하인리히 4세라고 망상하는 어느 미치광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미치광이의 환상을 위하여 주변 사람들은 연기한다. 그럼에도 피란델로는 애써 이 희곡의 분위기를 거창하거나 무겁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의 의도로 더욱 가벼운 소품처럼 느껴지게 한다. 

피란델로가 보기에 고정된 가치체계에 매몰되어 있던 자가 새로운 변화와 다양한 차이에 접한 경우 당황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놀라게 된다. 고정된 사고의 답답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일정한 논리적 체계 없이 변화가 가능한 미친 자가 차라리 행복하겠다고 한다. 엔리코 4세는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피할 수 없이 적응해야 하는 현실에 그의 고통은 반복된다. 결국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척 다시 미친 자의 놀이를 시작한다.

 

 

 

 

 

줄거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엔리코4(하인리히4)의 의상을 입고 사육제 행렬에 참가했다가 말에서 떨어진 뒤 자신이 진짜 엔리코 4세란 광기에 사로잡힌 한 부유한 귀족이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서서히 광기에서 깨어 나온다. 그는 움브리아에 있는 자기 집을 옛 황제의 궁처럼 개조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모두 옛 황제시대의 의상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에서 떨어지게 된 것은 실제로는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사모하던 마틸다 후작부인을 둘러싼 벨크레디 남작과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음모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광기에서 깨어났어도 그는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지 않는다. 사랑하던 여인도 잃은 지 이미 오래고 현실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가 미쳐있는 동안 보였던 허황된 환상의 세계에 대한 조롱뿐이다. 그렇지만 그의 조카는 자기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그를 치유하는데 모든 것을 다 건다. 그래서 그는 의사와 엔리코 4세의 옛 연인이었던 마틸다, 그녀의 연인이자 엔리코 4세의 원수인 벨크레디 백작 그리고 그들의 딸 프리다와 함께 엔리코 4세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내실에 걸린 마틸다와 엔리코 4세의 옛 그림과 똑같이 그녀의 딸 프리다와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살려내는 연애장면을 보여준다. 잠시 엔리코 4세는 광기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 연극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간파하고 프리다를 마치 자신의 옛 애인인양 포옹하고 애무한다. 이때 그의 속내와 멀쩡함을 간파한 그의 연적이자 추락사건의 주모자인 벨크레디가 그가 연기한다고 다그치자 엔리코 4세는 그를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가짜 엔리코 4세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허상 속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루이지 피란델로 [Luigi Pirandello, 1867.6.281936.12.10]

 

루이지 피란델로는 이탈리아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염세적인 작풍의 시인으로 출발하여 7편의 장편소설과 24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는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 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1921)이라는 희곡에서 극중극을 창안하여 근대 희곡의 중요한 혁신자가 되었으며, 희곡작가로서는 드물게 193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루이지 피란델로는 1910년경부터 극작에 흥미를 가져 <그렇지 않다면>(1915)으로 두각을 나타낸 후 <각자가 그 진실을>(1917) <명예의 기쁨>(1918) <전과 같이, 전보다 낫게>(1920)를 거쳐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1921) <엔리코 4>(1922) <나체에 입히다>(1923)를 절정으로, 연극 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계속 내놓았다. 그는 앙티테아트르의 선구로서 장 아누이와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염세주의에서 외젠 이오네스코와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 희극에 이르는 프랑스 희곡을 모두 피란델로 주의로 물들였다. 그의 영향은 영국의 T. S. 엘리엇의 종교적 운문 희곡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피란델로는 인간관계를 환상으로서 파악하고 자타의 모순이 가져오는 비극성을 사회적, 심리적으로 추구한 극작가로서 20세기 전반의 유럽연극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