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모리스 마테를링크 '알라딘과 팔로미드'

clint 2018. 9. 19. 09:16

 

 

 

1894년 마테를링크는 인형극이라는 부제를 붙여 세 편의 짧은 희곡을 발표했다. 상징주의 연극론을 표방한 극작 형식이다. 실제로 인형을 등장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들이 마리오네트처럼 형상화되고, 배우에게도 그러한 연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인형극이라 부른다. 서양 연극 사에서도 매우 새롭고 독특한 시도로 평가된다. 함축적이면서도 시청각을 자극하는 언어로 메이예르홀트, 크레이그, 뤼네포 등 당대 전위주의 연출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의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인형극에서 등장인물은 하나의 상징이다. 공포, 무력함, 사랑, 사악함, 저항 등 기본적 성향을 담아내는 원형인데, 마테를링크의 인형극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 죽음, 운명처럼 사랑도 3의 존재. 젊은 알라딘을 사랑하는 아블라모르 왕, 노예처럼 끌려온 알라딘이 사랑할 수 없는 아블라모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죽음에 이르는 알라딘과 팔로미드, 팔로미드를 이해하고 기꺼이 보내주는 팔로미드의 약혼녀 아스톨렌 공주, 마지막 남은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질투의 희생자 아블라모르 왕<알라딘과 팔로미드>는 운명 같은 사랑을 갈구하고 떠나보내는 다양한 양상을 단순화된 등장인물로 보여준다. 엑기스를 추출하듯 복잡한 심리묘사를 걸러낸 등장인물 접근 방식에서 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 진실을 다루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등장인물이 하나의 개념 또는 성향으로 단순화되었듯,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부동성과 침묵은 인형의 메타포로,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알라딘과 팔로미드> 4막에서도 두 연인이 움직일 수 없다. 눈이 가려지고 손이 꽁꽁 묶인 채, 어두운 지하 동굴에 갇힌 알라딘과 팔로미드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다. 팔로미드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풀면서 다시 앞이 보이게 되자 알라딘을 풀어준다. 그러나 행복한 재회도 잠시, 이들을 찾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지하수에 빠지고 만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두 연인은 꼭 껴안은 채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토록 자유롭길 원했건만 이제는 움직임을 거부하는 알라딘과 팔로미드는 운명 같은 사랑에 이끌려, 아니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삶을 거부한다.

이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가 있다. 바로 문이다.

물이 깊지 않았건만,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알라딘과 팔로미드는 각자 다른 방에 누워 있다. 굳건히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이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문을 박차고 상대방에게 다가가기에는 너무 지치고 아픈 연인들. 서로 볼 수 없지만 문을 넘어, 공간을 넘어 영혼으로 소통하는 마지막 장면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안과 밖의 경계선이자 벽이면서 소통의 창구인 문. 문에 이중적 가치가 있듯, 삶과 죽음에 대한 마테를링크의 관점도 이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알라딘과 팔로미드>의 마지막 장면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간병인의 신호로 팔로미드 방으로 모두 들어가자 침묵이 흐르고 반대편 방문이 열린다. 알라딘을 간호하던 간병인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문을 열어 둔 채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한쪽 문은 닫혀 있고 다른 한쪽은 열려있다. 닫힘과 열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 사람 다 세상을 떠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일까? 운명을 같이할 수 없는 두 사람, 혹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이중적 해석이 가능한 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삶과 죽음의 대립과 공존이라는 우주적 질서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징이 함께 던짐이라는 뜻에서 파생되었듯,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원래 하나였는지 모른다. 마테를링크가 생각하는 인형 또한 양면성이 있다. 인형은 자율성의 부재, 수동성과 같은 개념이기도 하지만, 신성한 오브제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다. 따라서 인형이라는 메타포는 운명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우리 내부에 잠재된 무한한 힘,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과 끝없이 교류하는 영혼의 힘을 암시하기도 한다.

마테를링크에게 영혼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무의식이 표출되는 감춰진 영역, 알 수 없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신비로운 영역이다. 말하는 순간 신성한 문이 닫힌다고 생각한 마테를링크에게 침묵은 영혼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이러한 관점은 새로운 배우의 탄생, 새로운 연출법을 요구한다. 이미 만들어진, 소화하기 쉬운 이미지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익숙한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부동극의 의미를, 영혼의 척도인 침묵을, 암시의 극작법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나 상징적 투사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이 배우를 대체할 거라고 예언한 마테를링크, 그가 진정으로 희망한 것은 배우의 사라짐이 아니라, 몸이 함축하는 개별성과 우발성을 넘어, 가면을 벗고 장벽을 부수며 본질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정신적 작업이다.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는 상징주의 대표 작가다. 벨기에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의 경계 지역인 서플랑드르 겐트(Gand)에서 태어난 그는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학도였다. 부모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하지만, 1883등심초 속에서 (Dans les Joncs)라는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1886년 파리 체류 기간에 스테판 말라르메 (Stephane Mallarme)와 빌리에 드릴라당(Villiers de L’Isle-Adam)과 교류하며 상징주의 정신에 심취한 마테를링크, 그의 작품에는 무의식, 신비로운 잠의 세계, 비합리적인 동기나 영혼 등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감춰진 영역이 그려져 있다. 마테를링크는 행위의 단순화, 말줄임표, 침묵, 부동성 등 암시의 극작술로 새로운 연극 흐름을 제시했다. 그의 극작술은 비사실적인 연출을 모색한 러시아 전위 연출가 메이예르홀트, 영국의 크레이그, 프랑스의 뤼네포 등에게 영향을 끼친다. 입센, 체호프, 스트린드베리와 더불어 19세기 말 격변하는 문학예술의 흐름에서 선도적 역할을 한 마테를링크는 1911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