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월드컵 기간 중 서울 근교 도시의 허름한 술집. 폐암선고를 받은 노인, 조카뻘 되는 국회의원 비서의 눈치를 보는 군수의 측근, 근처 미군부대의 카투사들, 지역 문예회관에서 공연 중인 연출가와 공연을 보러 온 서울 주요 신문의 문화부 기자, 스파르타 학원 강사 등 술집 손님들이 술 마시며 떠드는 소리와 축구중계 소리로 술집은 어수선하다. 술집 밖에서는 여배우가 <갈매기> 중 니나의 대사를 읊조리고, 한 소녀가 나타나 여배우에게 말을 건다. 큰소리로 소란을 피운다고 술집에서 쫓겨났던 군인이 갑자기 천장에 총격을 가하며 술집은 아수라장이 되는데...

술집을 배경으로 전쟁, 군대, 정치 등을 비롯하여 남성들이 이끌어 온 예술, 교육 등 현대 한국사의 전반적인 모습을 반추하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현대사의 흔적들이 현대의 일상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돌아본다.
제목 그대로 재료를 아무렇게나 막 섞어 먹는 도구인 냄비를 한국 사회에 대한 은유로 썼다. 작품 배경이 미군 부대 근방이니 메뉴가 부대찌개라 해도 되겠다. 극 자체도 다양한 직종의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잡탕이다. 이 잡탕 같은 세계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총 정리인 셈이다. 그래서 극 중 대사가 아려온다. “소신이 어디 있어. 어떻게 하면 살아남나 하는 피난민 근성밖에 없지.” 피난민들의 자기 연민으로 자글자글 끓던 냄비가 끓어 넘쳤을 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다루고 있는 소재 역시 부대찌개의 재료만큼 다양했다. 교육문제, 정치문제, 사회문제, 현실과 이상의 괴리 등등. 물론 이마마한 많은 이야기를 정해진 공연시간 안에 담아낸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상당하다. "군부 끝나면 좌파, 좌파 끝나면 뉴라이트" 단 한마디로 정리해버린 한국의 현대사는 특정 정치색을 드러낸다기보다 그 어떤 해답도 얻지 못한 이의 냉소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술 취한 군인의 말대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모든 문제는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각계각층의 인물들은 모두 특정 집단에 대한 분노와 함께 아등바등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토로한다. 하지만 끝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에 대한 무의미함이 아니었을까? 물론 결말이 연민이나 회의를 넘어선 새로운 길에 대한 방법론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연민할 대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 시대 속 개개인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냄비>는 분명 의미 있고 유효한 시도였다.

작가의 글
<냄비>는 2010년에 남산드라마센터 제작 공연으로 올려진 작품이다. <냄비>는 처음엔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삼부작을 구상하는 프로젝트였다. 작가로 나 외에 장성희, 김민정 세 명의 여성 작가가 이 작업에 참여했고 세 편의 작품을 최용훈 씨가 일괄적으로 연출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삼부작을 잇는 고리가 현대사라는 소재 외에는 제시되지 않았기에 결국에는 같은 시즌에 현대사를 소재로 세 편의 작품을 공연하는 것으로 엉거주춤하게 정리가 된 프로젝트였다. 세 명의 작가 중 장성희 작가가 동백림 사건, 김민정 작가가 중동에서의 선교사 피랍사건을 제안했고, 나는 한국 현대사의 여러 문제를 <냄비> 요리처럼 뒤섞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된 시기 순으로 공연 순서가 결정되었고 내 작품이 마지막 순서로 결정되었다. 당시 공연 프로그램에 내가 쓴 글을 인용해본다.
"<냄비>요리에는 이질적인 재료들이 들어간다.
각종 양념과 육수에 콩나물과 버섯을 비롯한 야채도 들어가고 두부, 고기, 소시지와 햄, 김치, 때론 라면도 들어간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양은냄비 안에서 부글거리며 끓다 하나의 요리로 완성되는 풍경을 생각하며 작품을 썼다. ( ... )
올해는 6. 25 60주년인 경인년.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맹렬히 의심하고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내 편이 아닌 모든 타자를 죽이고 싶었던 경인년의 저주, 우리 안에 단단히 옹이 진 채 틈만 나면 표면으로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바이러스처럼 경인년의 유령이 아직도 우리 몸 안에 스멀거리는 듯하다. 연극이라는 항생제가 없었다면 나는 이 지독한 바이러스를 어떻게 감당했을까. "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현철 '프린세스 봉’ (1) | 2018.10.01 |
|---|---|
| 박현철 '장미빌라 살인사건' (1) | 2018.09.29 |
| 김경민 '너와 피아노' (1) | 2018.09.24 |
| 염지영 '냄새 풍기기' (1) | 2018.09.23 |
| 김나영 '소풍' (1) | 2018.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