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나영 '소풍'

clint 2018. 9. 22. 09:04

 

 

 

 

 

아직 찬바람이 선선한 봄날, 60대 노부부인 만수와 옥자가 때 이른 소풍 길에 나선다. 추운 날 굳이 소풍을 고집하는 아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남편. 두 사람은 호수공원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부터 계속해서 옥신각신 밉지 않은 말다툼을 벌인다. 그 와중에 22녀를 키운 이야기, 자식들에 대한 기대와 실망, 긴 세월을 함께 한 서로에 대한 원망과 고마움 등이 잔잔하게 드러난다. 옹졸한 듯 보이지만 그 옹졸함을 무기로 험난한 세월을 이겨낸 남편과 거칠어 보이지만 삶에 대한 관조가 느껴지는 아내. 두 사람은 그럭저럭 아름다운 황혼을 맞이한 평범한 노부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내가 추운 날의 소풍을 고집한 진짜 이유에 대해 고백하려하자 분위기는 일순간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두려움을 느끼며 진실을 회피하려는 남편에게 결국 35년 전 한 남자와의 짧고 강렬했던 사랑을 고백하는 아내. 완벽주의자인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남편과, 묻어둘 수도 있었던 지난 일을 굳이 끄집어내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아내. 그들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을 맞이한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 했던, 밝혀야만 했던 아내의 심정과, 삶과 사랑과 결혼에 대한 두 사람의 따뜻하고 진지한 시선은 둘 사이에 오히려 오래 묵은 먼지를 털어 내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결혼이, 오랜 세월 함께 산 부부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노력과 인내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듯이...

 

 

 

 

연극평 - 백로라

소풍> (김나영 작, 김영환 연출)60대의 옥자와 만수 부부가 소풍 길에 올라 그들이 함께 살아온 40년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관계를 확인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고도 잔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모양처 옥자는 과거에 잠시 다른 남자에게 연정을 품었던 사실 때문에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아가다가 소풍을 계기로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을 남편에게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옥자의 고백을 들은 만수는 평생을 가족과 아내에게 헌신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억울함과 배반감에서 비롯된 분노를 표출하지만, 자신을 향한 그녀의 진실한 감정을 확인한 후에, 결국 그녀를 용서하게 된다.

대략의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사랑의 기억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일상적 삶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이다. 옥자의 로맨스는 사랑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일탈에 가깝다.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일상을 보다 활력 있게 살아가게 해주는 소풍과도 같은 가벼운 일탈. 소풍은 사랑의 가치를 과장하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소풍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삶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관한 한,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나 사랑에 관한 기억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했던 이며 누군가와 사랑하면서 발전하게 된 나의 삶이다. 요컨대, <소풍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옥자가 환갑이 넘어서야 깨달은 것도 바로 일상적 삶이 가진 소중한 가치가 아니었을까. <소풍>은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관계에 대한 치밀한 관찰이 엿보이는, 근래에 찾아보기 드문 수작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대 위로 옮겨지는 과정을 상상하면, 연출가와 배우들의 난처한 표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다. 희곡 텍스트가 어떠한 구멍도 만들어내지 않고 대단히 촘촘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작품은 호수공원이라는 야외공간을 극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어떠한 장면 전환도 나타나지 않으며, 두 인물의 일상적 대사에 의해서 극이 전개된다. 집의 내부와는 달리, 공원이라는 공간은 무대를 의미론적 혹은 물리적으로 분할하는 것이 협지 않기 때문에, Blocking 라인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렵다. 또한 가구라든가 소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배우들은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특별히 할 일을 찾아내기 어렵다.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바로 작가가 제시한 디테일, 즉 옥자가 끊임없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만수에게 제공하고, 둘이 그것을 먹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연출자 김영환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먹는 장면, 아니 먹는 행위였던 것 같다. 과연 이것은 공연에서 대단히 큰 힘을 발휘한다. 아마도 이 공연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대사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배우들이 음식을 실제로 집어먹고, 깎아먹고, 따라 마시는 행위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김밥을 아깝다는 듯이 옥자가 입에 구겨 넣는 장면. 보온병에 뜨끈하게 데워 온 단술을 천천히 따라 마시는 장면 냉동실에서 살짝 얼려온 캔 맥주를 탱하고 소리 나게 따서 시원하게 마시는 장면. 집어 먹기 편하게 쭉쭉 찢어놓은 오징어를 질경거리며 씹어 먹는 장면. 이러한 장면들은 두 인물의 관계라든가 각 인물의 성격을 실감나게 보여줄 뿐 아니라, 무대 위에서 다양한 연극적 효과를 창출해낸다. , 그것은 다양한 동작과 디테일한 정서를 표현하고, 동시에 연기의 완급을 조절해줌으로써 전체적으로 각기 다른 시간적 리듬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 공연에서 연출가의 재미난 발상이 엿보였던 장면은 인물의 정지 동작을 보여준 부분이다. 그러나 완만하게 전개된 극의 흐름을 고의적으로 깨뜨리면서 만수의 정신적 충격을 표현하려는 연출가의 의도를 충분히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의 전제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는, 다소 튀는 장면이었다. 이 연극의 미덕이 다소 지루하지만 그것을 오히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제외한다면, <소풍은 관객들에게 단막극의 재미를 쏠쏠하게 맛보게 한 성공적인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객석에서 관객들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를 바라보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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