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삼식 '1945'

clint 2018. 9. 21. 15:22

 

 

 

 

1945.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보는 순간 해방과 광복, 독립 따위의 단어를 떠올릴 법하지만 이야기를 채우는 것은 두 아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만주라는 공간, 그 안에서 고향 땅을 밟는 것 외에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함께 지옥을 경험한 미즈코가 한 일본인 사병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곤 뿌리치지 못한 채 만주까지 함께 오게 된 명숙. 해방의 공간이 된 만주에서 일본인과 일제 부역자들은 보복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결국 명숙은 미즈코를 자신의 벙어리 동생이라고 속이고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로 들어간다.

 

명숙과 미즈코는 아이들을 팔아 만주까지 갈 종잣돈을 마련했고 선녀는 이들을 일본군에 팔아 생명을 부지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지옥을 맛본 이들인데도 구제소에서 맞딱뜨리게 된 이들은 진창에서 허우적댔던 과거를 숨겨야만 한다. 이들이 등진 인간성은 함께 북엇국을 끓이고 떡을 만들어 파는 사이 회복될 듯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점, 이른바 영점지대에 놓인 인간들에게 여전히 도리나 윤리, 고통의 연대는 사치스럽다.

 

 

 

 

 

배 작가는 아마도 반전을 노렸을 것이다. 역사의 쳇바퀴가 굴러가는 중에도 자기만의 이야기로 자전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1945’라는 차가운 제목 뒤에 감추면서 말이다. 희망을 보기 어려운 시공간을 그리면서도 극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유쾌했던 탓에 구제소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신분이 탄로 난 미즈코와 명숙을 버리는 장면, 아편쟁이 선녀와 돌림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 장수봉을 버리는 장면은 더욱 극적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더럽다고 손가락질했던 위안소 출신 명숙과 일본인 미즈코, 아편쟁이 선녀가 모두가 버리고 떠나가는 장수봉을 거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시대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남는다. 결국 이 작품은 그 어떤 지옥에서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명숙과 미즈코, 박선녀와 장수봉 같은 이름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다3시간 가까운 상연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나 탄탄한 서사와 배우들의 연기력에 시간을 체감하기 쉽지 않다. 모든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있고 입체적이다.

 

 

 

 

 

인간은 시대의 질곡 앞에서 모두가 희생양임을 분명히 인지하지만 현실에서 오명과 고통, 더럽다고 규정된 왜곡에 처한 이를 배척하고 도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명숙과 미즈코 같은 여인을 마주했을 때 더욱 그렇다. 머리로만 명확히 인지했던 시대의 고통 앞에서 인간은 경계를 만들고 이를 넘어서는 관계에 쉽사리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한다. 고통 앞에서 지옥을 함께한 명숙이 미즈코가 동행하며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모습, 위안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녀들과 함께하겠노라 말하는 영호의 태도를 통해서 말이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사회와 시대가 처한 현실을 마주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기심에서 기인한 구분을 초월한 인간애를 표방해야 할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억압의 시간을 딛고 귀향이라는 어렵고 간절한 목적이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분명 서로가 비슷한 정도의 시련을 겪어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위안부 출신 명숙과 적국에서 온 미즈코, 위안부 포주 출신 선녀를 도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편견 속에 그녀들을 밀어냈던 사람들보다 적극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인 것은 명숙과 미즈코, 그리고 선녀이다. 피난소에서 생활비와 노자 돈을 벌기 위한 떡 장사 밑천을 마련할 때도 돈을 선뜻 낸 사람은 소위 배운 사람이라 존경받던 구 선생이나 어른으로 대우받던 김 노인이 아닌 명숙과 미즈코였다. 북어를 사 피난소 사람들이 포식을 하게 되는 상황이 조성된 것도 아편 장수를 해서라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녀다.

 

그러므로 연극 ‘1945’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는 인물들이 실제 삶에서는 제일 커다란 용기를 발휘하며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아이러니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누구도 누가 어떻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의미 없다는 것을 과거의 현실을 통해 언급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작품을 놓고 장대한 역사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해석을 하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화두로 삼고 작품을 만난다면 보다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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