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1976년 라디오에서 작가인 에드워드 올비와 존 타이드만의 공동 연출로 처음 선을 보였다. 미국 초연은 1977년 1월 28일 하트포드 스테이지에서 역시 작가인 에드워드 올비의 연출로 공연되었다.
‘듣기’ (1975년)는 ‘BBC에 의해 라디오 드라마로서 위촉됐지만 라디오에서뿐만 아니라 그대로 무대에서 상연할 수 있도록 쓰여 졌으며 상당히 밀폐한 작품이었다.‘고는 하나, 제목 그대로 듣는다는 사실에 중점이 있으며, 대사는 밀도 높게 쓰여 져있다. 테마는 「꽃점술」과 같이 「사랑과 성」으로써, 이 두 작품은 동시 상연으로써 위화감 없이 상연할 수 있다. 올비의 「소리」에 의한 20개 장변 분리도, 대립법적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 극은 수를 세는 외부의 소리에 의해서 소개되는 일련의 장면들의 형태를 취한다. 그 방법은 올비의 「상자」에 나오는 장면들의 공연을 닮았다. 작가의 목소리가 이렇게 삽입되는 것은 청자의 경험을 형성하는데 있어 매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장면의 인상이 설정되면서 소리가 끼어들어 극의 항목에 번호를 매긴다. 한 지점에서는 인물들이 그 번호의 정확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것이 극을 구성하는 과정에 관객을 끌어들이는 반면에 편안한 환상은 깨지고 경청 자는 그 극을 공연으로써 인식한다. 실제의 삶은 아니지만 강렬하고 설득력이 있다. 장면 속에서 올비는 세 명의 인물들을 병치시킨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50세 전후로, 그 사람의 「사랑과 성」은 옛날을 회고한다는 휠터가 놓인 시좌(視座)부터 말하게 된다. 회합 장소에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병원의 식사 당번 같다. 여자는 청신과 의사나 간호사로 과거에 그 남자를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가씨는 그 여자에게 맡겨진 환자 같다. 그녀는 정신병 환자에 어울리는 민감한 감각으로,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성의 정도를 계산하는 시약 역할을 한다. 더구나 남자와 여자가 아가씨의 보호자 역할을 부여받은 이상에는 가족처럼 구성하고, 아가씨는 두 아이의 역할도 상징적으로 연기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의 직책이 일반 통념과는 반대인 것도 올비다운 설정이다.
남자는 우선 「손을 잡는다.」는 진료 행위가 남자와 여자의 성애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로 변형하는지, 단어를 바꿔놓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문맥을 교체함에 따라 생기는 의미의 변화를 문제로 한다. 더욱이 아가씨는 듣는 것에 따라 생겨나는 생체의 작용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없는 액션은 아가씨를 정신병 환자라는 직책상의 성질 속에 가두어둔 바에서는 리얼리티가 있지만, 동시에 아가씨의 주장은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 사이의 감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이 대사의 의미론적인 유희일 것이다. 이리하여 여자가 말하는 할머니의 자살 우화도 아가씨가 빈 연못을 물 대신 자신의 피로 채우는 행위에 의해, 세대를 초월하여 재현된다. 올비의 무대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거역도 역시 진실」인 세계를 연기해 보이는 장면이다.
극 내내 올비는 패턴을 세우기 위해 청자의 자연적인 능력을 이용하며, 이것은 서술감을 포함한다. 청자의 상상력으로 상연하기 위해서 올비는 인물들 사이에 기억을 끼우고 있으며 정신분열증의 변화된 조망을 추가한다. 기억은 과거에 인물들의 장소를 허용하거나, 구성이 요구할 때에는 그들을 제거한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의 성 관계는 남자의 성적 묘사에 대한 여자의 즐거운 반응에 의해 더 큰 상호작용의 가능성이 허용된다. “아니오. 이승의 육신이죠! 세상일이란 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잖아요.” “난 이승의 육신이라니, 당신이 누군지 알겠어요. 한 번, 당신이 우는 걸 봤죠. 한 번 뿐이던가요?" 여자는 자신이 그를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렇다면 남자를 울게 한 것은 여자였다. 하지만 남자는 자기가 우는 것을 여자가 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기억들은 가능성들이 끝까지 가도록 하지만, 그것들이 있음직한 연결을 짓는 것처럼 보일 때 믿을 수가 없다. 이와 유사하게, 아가씨의 내향적인 견해는 개인적인 리얼리티를 구성한다.
「상자」처럼 이 극은 초기 문명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그것의 상실감을 환기시킨다. 또한 이 극은 자아 내부에 고립감을 탐색하려고 하는데 있어 어떤 다른 극보다 더 나아간다. 이것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나?’의 조지와 마사가 자신들의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환상적인 삶과 같지만, 그것은 이해와 지지의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공동 경험이다. 여기서 올비는 자신의 첫 작품인 「동물원 이야기」에서 더 단순하게 했었던 것처럼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개인들을 위해 쓰고 있다. 극의 두 여자는 어떤 지점에서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상대방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극은 분명히 존재가 어떤 것인지의 문제, 어떤 지점에서 개인이 삶을 의식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여자는 과거에 어느 시기에 자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며, 희미한 기억을 삶의 암시와 관련시킨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그녀가 우는 시간의 회상인데 그것은 삶의 리얼리티를 강렬하게 인식하는 순간들이다.
「듣기」는 아마도 올비의 가장 밀폐한 작품일 것이며 그것이 복잡하고 지적으로 자극적인 것만큼 그 영향에서 음악적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또한 올비의 극작의 특정을 이루는 자유와 탐색을 증명하는데 중요한 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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