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첸치 일가>는 아르또가 스탕달의 단편과 셀리(Shelley)의 희곡을 토대로 쓴 작품으로 기독교 문명에 대한 거부와 원초적 세계로 회귀하고픈 어두운 욕망을 그리고 있다.
<첸치 일가>의 구성은 4막 10장으로 되어 있으며, 극이 야기의 배경은 16세기 이탈리아이다. 막강한 재산을 가진 성주(城主) 첸치백작은 교황청의 지나친 간섭과 독선, 가족들 사이의 불신 및 성안의 음모에 증오심을 키우다가 마침내 스스로 악의 화신이 되어 폭정을 시작한다. 그는 한 아들을 추방하고, 다른 두 아들은 ‘쓸모없는 가지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살해한다. 이 범죄에 대해 교황청은 영토의 3분의 1을 교회에 바치면 사면하겠다는 거래를 해오지만, 첸치는 이에 불복하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교황 권에 정면 도전한다. 교황청에서는 첸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가족들과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첸치의 잔혹성과 패륜적 행동들 때문에 공포에 빠진다. 간교한 추기경 까밀로는 추방당한 아들 지아꼬모를 충동질하여 반란군을 결성하고 로마교회도 이를 은밀하게 지원한다. 첸치는 점점 악의 어두운 힘에 휘말려 광기에 빠지며 마침내 딸 베아트리체를 강간하기에 이른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사제 오르시노는 첸치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마침내 베아트리체가 나서서 자객을 시켜 첸치를 살해하고 친부살해 죄로 처형된다. 그렇게 파괴된 첸치 일가는 어린 아들 베르나르도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의해 ‘하나’가 되고 비존재가 됨으로써 더 이상 남녀의 성의 대립도, 선과 악, 혹은 어떠한 관념적 대립도 존재할 수 없는 원형의 세계로 환원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첸치는 야생의 짐승과도 같은 인물이고, 무서운 악의 화신이며, 하강하는 어떤 힘이다. 그의 살인과 학정, 그리고 패륜행위 등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야만적 행위 속에는 뿌리칠 수 없는 어떤 무서운 힘,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둡고 검은 힘의 마력이 담겨 있다 이 검은 힘은 야성의 자연 혹은 무의식에 잠재한 파괴 욕망을 환기한다. 또한 첸치는 딸을 범하기 위해서 폭행보다는 심리적 전술과 육체적 압박을 가한다. 그렇게 육체적 쾌락을 통해서 베아트리체의 영혼을 고문하면서도 첸치는 줄곧 딸 베아트리체에게 자신의 갈증을 호소하는데, 이것은 첸치가 마치 걷잡을 수 없는 화염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 그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하고, 고삐 풀린 광기에 야수처럼 몸과 마음을 내맡긴 첸치가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목마름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첸치와 대립되는 인물이 까밀로 추기경이다 교활하고 전략가인 그는 교황청과 민간인들 사이의 암거래를 도맡아 하고. 교황의 선거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교회에서의 권력도 거머쥐고 있다. 또한 지아꼬모에게 친부인 첸치를 살해하도록 사주하는 모사꾼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까밀로 추기경은 중세 타락한 교회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베아트리체는 아버지 첸치를 증오하면서 동시에 첸치의 밀교 제의 같은 유혹에 끌려간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꿈속에서 성적 욕망에 시달렸고, 그 악몽에서 도망가려고 버둥거렸던 인물이다. 따라서 베아트리체에게는 선과 악, 도덕과 쾌락주의,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어린 아틀 베르나르도는 첸치와 베아트리체가 융합된 인물이다. 첸치를 살해한 베아트리체를 체포하기 위해 군인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히자 어린 베르나르도는 군인들에게 마구 폭행을 가하며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외친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의붓어머니 뤼크레치아는 문득 베르나르도에게서 첸치의 현존을 느끼며 소리친다. “맙소사! 바로 첸치잖아!"
그러므로 이 드라마는 비록 첸치는 죽었지만, 이제 또 다른 첸치가 또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것임을 암시하며 끝난다.


《첸치 일가》는 일체의 윤리적 규범, 문화의 속박, 사회제도를 거부하는 연극이다. 아르또는 일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가족도, 족보도. 종족도, 사회계급도 부정했다. 그는 문화가 인위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떼어놓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는 야성의 자연에 대한 향수와 잃어버린 원시세계에 대한 동경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심연에서 들끓고 있는 어둡고 잔혹한 힘의 하수인이 된 첸치는 우선 친자 살해로 자신의 지체를 절단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이어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나와 나의 분신’이라는 이중성을 단일체로 환원시키며, 마침내 딸의 친부살해를 통하여 불결한 육체를 파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리 이전의 ‘하나’ 상태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첸치 일가>에는 신앙이 사라지고 사회적 제도로만 남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교회가 신의 이름을 빌려 재산을 축적하고, 종교적 권력을 행사하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실했을 때, 교회는 가장 추악하고 위선적인 조직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아르또는 이 연극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것이다. 아르또는 태초의 세계에는 선과 악이 혼돈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지나치게 세련되고 경직된 문화가 인간의 자연성을 억압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원초적 세계, 카오스로 회귀하고픈 퇴행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첸치의 광기와 잔혹은 바로 원시적인 통합의 열광적 측면이다. 첸치는 마치 불의 몽상에 사로잡힌 인물처럼 가족을 태우고, 사회적 법과 윤리를 태우고.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태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끊임없이 ‘불’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이것은 아르또가 ‘불’의 양가성을 드러내려는 것인데, 불은 존재하는 모든 기존 질서를 가차 없이 파괴하고 과거의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을 소생시키는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청난 세척 작업을 거쳐 소생할 새 생명을 상정하는 인물이 바로 베르나르도이다. 그는 베아트리체와의 뜨거운 입맞춤을 통해 첸치 가문의 생명의 불씨를 이어 받게 된다. 이제 그 무서운 카오스에서 하나의 코스모스가 형성된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죽음에 의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힘, 그 불길한 운명에서 풀려나고자 했다. 그런데 막이 내리기 직전 죽어가는 베아트리체는 무서운 예감에 전율한다.
결국 그렇다. 첸치 일가가 하나로 모아진 지점, 그것은 검은 힘의 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검은 힘은 어둠의 세계(혹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베르나르도를 통해서 분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생명의 윤회를 믿는다면, 마찬가지로 어둠과 죽음의 힘도 끊임없이 윤회할 터이니까. 원초적 세계, 그것은 우리 내면의 갚은 곳에 누워 있는 어둠의 세계와 다름없을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움직이고 있는 생명의 또 다른 뿌리일 것이다. 아르또의 《첸치 일가》는 그런 점에서 원시신화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첸치 일가》의 세계는 선과 악, 죄와 벌이 융합된 하나의 덩어리이며, 생명과 죽음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원형이다. 따라서 무대는 잔혹과 열광이 한데 녹아내리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 되고, 관객은 더 이상 평온한 관람자가 될 수 없으며, 그 고통과 잔혹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열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치 원시 제의에서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당시의 관객들은 원시인이 아니고 현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힘겨운 관극을 견뎌내지 못했고, <첸치 일가>는 공연에 참패했다.
《첸치 일가》는 아르또의 잔혹극 이론이 전적으로 실현된 극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다 여전히 대사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서사구조에서도 논리성이 배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제의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는 ‘잔혹’의 의미를 연출가의 상상력에 의해 형상화하고 무대적 표현으로 표출한다면, 잔혹극의 무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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