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에드워드 올비 '꽃점술'

clint 2018. 8. 13. 12:21

 

 

 

 

 

이 작품은 1976126일 영국 런던의 National Theatre에 의해 빌 브라이든의 연출로 처음 공연되었다. 미국 초연은 1977128일 하트포드 스테이지에서 작가인 에드워드 올비의 연출로 공연되었다.

 

꽃점술’ (1976)사랑과 성을 둘러싼 남녀의 대화극으로, 21장의 스킷을 모은 콜라주 풍의 작품이다. ‘보드빌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클라이브 반즈는 1977년 뉴욕 타임즈에 이 작품을 언급하면서 올비가 발전해 감에 따라 그는 점점 더 기교, 즉 극의 특별한 작업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극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도록 의도된 본질적인 극적 처리의 허구를 거역한다."라고 말한바 있다. 정말로, 꽃점술에 대한 일반적인 비평적 평가는 이 극을 구성하는 임의의 스킷들이 중심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과, 이 극이 중심이어야 하는 것이 표변에 있는 뒤집힌 극이라는 점이다. 확실히 임종에 있어서처럼 분명하게 중심 액션이 없거나, 꼬마 앨리스에서처럼 메타포가 없는데, 그것에서 그 밖의 모든 것이 방사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체의 표현 형태를 가리키는 중심 사상을 지녔다기보다는 그 반대가 이 작품의 경우인 것처럼 보인다. 비평가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이 극이 본질상, 원심적(遠心的)이라기보다는 구심적(求心的)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인데, 외관상 연결되지 않은 일련의 스킷과 암전이 미지의 방법으로 함께 묶여져 있다. 그래서 더글러스 핫트는 형식이 점점 더 내용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작가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인, 사랑과 그 무한한 변형은 여기에서 일종의 흐린 젤리 속에 갇혀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남과 여는 애정의 위기에 직면한다. 사랑의 척도는 성(sex)인가 남자는 확인하고 싶다. 꽃점술은 그것을 위한 서정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남자가 이 장면에서 선택한 꽃은 장미이며 민들레가 아니다. 남자에게 있어서 역시 사랑은 성에 의해 상징되는 것일 게다. 여자가 생각해 낸 꽃은, 지난 17살 때 그 사람의 소년에게 받았던 치자나무 코사지였다. 이와 같이 단편적인 스킷을 진행시키는 것은 감정의 이론이고, 구체적으로는 언어의 연상과 바꿔놓는 유희이다.

 

 

 

올비가 그들의 삶에서 의미의 상실을 계산하는 방법은 극의 부제인 보드빌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대화가 던져지는 특수한 형식에 주의를 끈다. 한 때 인기 있었던 이 대중연예 형식을 선택한 것은 올비가 그 커플의 삶에서 무의미를 재생하기 위해 필요했던 분위기와 구조적인 특질을 암시한다. 보드빌은 여와 남이 내려온 밑바닥을 나타낸다. 보드빌의 사랑은 왁자지껄한 광대놀이 식의 사랑이다. 더군다나, 보드빌은 패러디에서 잘 자라며 빈번히 그 자체의 패러디를 제공한다. 정말로, 구식의 희화(벌레스크)가 나이든 한 쌍의 의미 밝힌다. 사실상, 이 작품은 로맨틱 코미디, 보드빌 스타일을 패러디한다. 로맨틱 코미디의 탐구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1957년의 로맨틱 섹스 코미디 오후의 사랑의 주제인 바로 그 사랑의 타입이다. 이 제목은 남과 여가 그 구절의 완곡어법의 가능성을 탐색할 때 그들의 성적 희롱의 순간적인 초점이 되는 노래의 제목과 같다. 보드빌 형식을 사용하면서 올비는 의도적으로 그런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과 내용을 희화한다. 그의 연인들은 젊지도 않고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들이 하는 게임은 그들에게는 부조리하거나 의미가 없는 전통적인 사랑 테스트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게임들은 어리석게 수행되며 더욱 색다르게 해석되기조차 한다. 결국, 소년이나 소녀는 서로를 소유하지 못하며, 뻣뻣하게 서서 촌스럽게 보드빌의 과장된 형태로 그들의 희극적인 잡담을 하는 것이다.

꽃점술의 우연에 이어지는 애정 표현의 객관적 상관물은 셔츠의 정비이다. 오딘의 시를 인용한 상징 개념의 물질화도 변형문법의 절차를 흉내 내어 단어를 바꿔놓으면 의미도 달라진 다. 패러디는 의미의 왜소화이기도 하다.

 

 

 

꽃은 시든다. 사랑도 시들면 상대적으로 침대가 둘로 갈라지며 성의 죽음을 상정한다. 막간을 거듭하며, 배우의 자기소개라고 하는 즉흥이 극중극에서의 패러디의 요령으로 삽입된다.

후반은 너무 이른 슬픔에 대한 토론 극이 된다. 질서가 의례로 상징되고 혼돈과 대비되며, 질서를 법제화하는 것에 대해 여자가 독연한다. 두 사람의 죽어가고 있는사람의 패러디에서의 순서에 대해 의논은 문명은 붕괴하는 경우가 있다는 논증이기도 하다. 남자는 씨가 말랐음에 죽음을 예감하는 이야기를 대립시킨다.

마지막은 만드는 사람먹는 사람의 괴리에 남녀의 사랑과 성을 상정시켜서 결합하려 한다. 인용되고 있는 어떻게 사랑해? 꽃점을 칩시다.라는 엘리자베스 · 바렛 · 브라운의 소네트는 이미 테네시 윌리엄스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사용했다. 무언의 연기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