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에서 티르소는 평생 동안 고민했던 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신부인 티르소 개인의 주제일 뿐 아니라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였다. 지금도 이 주제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 주제이기도 하다. 구원과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에 의해 예정된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선한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가?

파울로는 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신부인 그는 오래전에 도시를 떠나 시종 페드리스코와 이곳에 왔고, 구원을 받기 위해 모든 현세적 삶에 등을 돌린 채 오로지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 나폴리의 엔리코는 평생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살았다. 셀리아라는 연인이 있지만 사랑도 그에게는 자신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파울로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구원 여부를 늘 궁금해 한다. 어느 날 천사로 위장한 사탄이 나타나 미래를 알고 싶으면 나폴리로 가서 엔리코를 찾으라고 유혹한다. 그리고 너와 엔리코는 같은 운명이며 그가 구원받으면 너도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사탄은 예언한다. 파울로는 천사/사탄의 말을 믿고 페드리스코와 함께 나폴리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엔리코를 만난다. 파울로는 정말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천사/사탄의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지는가?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엔리코의 최후는?

16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에서는 구원의 문제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이 주제가 이처럼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신학적 정의를 떠나, 당시 가톨릭 신도들에게 구원의 문제가 삶의 중심에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 논쟁은 주로 도미니코회와 예수회 소속 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졌고, 17세기에는 티르소가 소속된 메르세드 종단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받아들여졌다. 도미니코회의 주장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의 정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확장한 것이다. 스콜라 신학에 의하면,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이지만 피조물은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며, 피조물의 존재성은 신성(神性)괴는 다르다 다시 말해, 모든 개개의 존재는 신성에 의해 창조된 것이지만 피조물인 그것은 무한한 존재로서의 신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성에서 창조된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하느님이 무한한 존재이며 따라서 우주의 전체(全體)라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의지는 그 전체 속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신학자들은 인간은 하느님의 그림자이며, 하느님을 반영한 하나의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하느님의 그림자인 인간은 신성에는 초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 의 주제가 ‘행위’ 의 주제로 전이되면 더 어려워진다. 스콜라 신학을 근거로 하는 도미니코회 신학자들은 행위 문제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적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위에는 타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걸어가는 것은 걸어가게 만드는 어떤 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을 적용하면 인간의 행위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타자,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에는 신의 의지가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때문에 구원은 예정된 하느님의 의지(예정 조화)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반면, 예수회의 신학자들은 구원 문제에 있어 하느님은 동시적(simultaneous) 존재라고 주장한다. 영원성(eternity)은 현재, 과거, 미래를 아우르는 비시간성이며, 하느님의 시점에서는 하느님의 구원 선택과 인간의 행위가 동시적으로 읽힌다. 예정 조화설이 문제가 된 것은 만 년 전에 하느님이 개인의 구원을 결정한다고 했을 때, 예정되고 결정된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 인간의 선한 의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다. 예수회는 그런 논리의 충돌은 하느님의 시간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예정 조화설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흐름 속의 시간이지만, 하느님에게는 그 세 가지 시간이 영원성 안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신만의 영역인 영원성 안에서 구원을 결정할 수 있고, 인간은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영원성에 논리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 예정 조화설과 인간의 행위에 대한 이같은 논의 중에 티르소는 어느 이론을 지지하고 그것을 작품 속에 반영할 것일까? ‘불신자로 징계 받은 자’에서는 작가의 신학적 주장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파울로는 구원을 위해 거의 평생을 살았지만,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 물든 나폴리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구원의 운명을 가진 엔리코를 보고 스스로 죄에 빠지기로 결정한다. 엔리코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질렀지만,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랑, 즉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의 불씨를 지피고 나ο}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회개를 통해 구원받는다. 전체적으로 작품을 조망할 때 티르소는 예정 조화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울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적 한계에서 보면 엔리코의 구원은 예정된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파울로가 엔리코를 보았을 때, 그가 왜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믿어, 자기를 나폴리로 보낸 사탄의 정체를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여지는 남는다. 「불신자로 징계 받은 자」에서 파울로는 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된다. 그때 악마가 엔리케를 유혹하는 방법은 그를 죄에 물든 나폴리로 가게 하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전원과 죄에 물든 도시리는 설정은 티르소 연극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간 구성이다. ‘돈 후안’,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에서도 이 설정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는데, 공가 구분은 나폴리- 타라고나 해변- 도스에르마나스- 세비야로 세분화되고, 여기에 귀족과 평민의 배치가 덧붙는다. 즉 도시는 귀족들의 공간으로, 전원은 평민들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도시와 전원 그리고 귀족과 평민의 대비를 통해 티르소는 자신의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El Burlador de Sevilla y convidado de piedra)≫는 스페인 바로크 문학을 화려하게 수놓는 데 일조했던 극작가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 1581∼1648)의 작품이다. 그는 문학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보아 17세기 극의 포문을 연, 국민극의 아버지인 로페 데 베가와 바로크 문학의 끝을 장식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중간 대에 위치한다. 티르소 데 몰리나는 예명이며 본명은 가브리엘 테예스(Gabriel Té́llez)인데 그가 사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에는 예명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1625년 이후로는 교단의 징계로 더 이상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1581년 1월 마드리드에서 태어나서 20세에 메르세드 교단의 사제가 되었으며 1648년 2월 소리야에 있는 알마산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생애 67년 중 47년을 그 종단에 속해 있었다.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전, 1580년부터 당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로페의 극을 노천극장에서 보면서 저항할 수 없는 극작가로서의 욕구를 느꼈고, 그 꿈의 자양분을 스승인 로페의 극에서 취해 갔다고 한다. 종교적인 열의와 함께 그의 내부에 문학에 대한 열정이 일찍부터 공존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극작가로서의 길은 로페의 문학 흔적을 좇는 것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종교의 최상의 과업을 조화롭게 가꾸어 가고자 했던 그는 1610년에서 1615년 사이 약 100여 편의 작품을 썼다. 그의 ≪톨레도의 유흥지≫(1624)에 기록해 놓은 내용을 보면 자신의 문학 여정에 대한 야심에 찬 대목들이 보인다.
“≪톨레도의 유흥지≫ 1부에 12편의 극작품이 인쇄되고 있다. 이 작품에 이어 14년 동안 내가 즐겼던 고독이나 정직한 여유로움 덕분에 탄생된 300여 편 중 많은 작품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 그리고 12편의 소설들도. … ≪톨레도의 유흥지≫ 2부도 써 낼 것이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의 문학 행보는 1625년 3월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종교개혁 위원회에서 그의 작품이 불경스럽고 나쁜 본보기를 보여 준다는 이유로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유배를 명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인들의 시기심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민족 특성으로까지 고찰될 만큼 특출한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시기심의 희생자 중 티르소에게 쏟아진 교단 안팎의 시기심은 결국 그가 더 이상 창작을 위한 펜을 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적으로나 창조적인 능력으로 볼 때 가장 왕성한 시기인 45세에 창작 활동을 그만두어야 했으니 스페인 문학사에서 보면 가슴 아픈 큰 손실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그만둔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교단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종교 작가로서의 길을 시작해 그 이야기를 3부로 엮고 ≪유용하게 즐기는 것≫이라는 수필집도 출판했다. 물론 죽는 순간까지 속세의 이야기를 다시는 쓰지 못했지만 이미 써 놓은 작품들을 손질해 자신의 조카를 통해 출판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그의 극작품집은 여섯 개에 이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우롱당한 세 명의 남편들≫, ≪우정과 사랑의 시험≫, ≪여성의 신중함≫, ≪유명한 이삭줍기 여자≫, ≪티마르의 복수≫, ≪불신으로 인한 단죄≫, 그리고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등이 있다.
그의 극은 스페인 바로크 극의 기본 분위기에다 로페의 색깔과 칼데론의 경향을 함께 갖고 있지만, 여성 인물의 성격 창출이 다양하고 예리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능력이 돋보인다. 자유분방한 여성에서부터 무모하고, 용감하며, 귀족적이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여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여성에 대한 성격 창조가 놀랍다.
티르소는 자신이 쓰는 극작품은 도덕과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정당하면서도 즐거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극을 “친절한 설교자”라고 불렀다. 나약한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을 치료해 주는 명의처럼 웃음 속에 감춰진 약 처방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질투심이 솟구칠 때 거짓에 현혹되지 않게끔 하고, 부인의 부정 앞에 남편들은 신중해야 하며, 국민 앞에 선 권력가들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여성들은 경솔하지 말아야 하며, 부모들은 자신의 딸들의 명예를 지켜야 된다는 메시지 등을 자신의 극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내용들을 즐겁고도 기발한 은유로 포장해 내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사람들은 정면에 대고 진실을 이야기하면 받아들이고 그 말을 소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호라티우스처럼 관객을 즐겁게 하면서 가르치는 종교인이자 문인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자 했다. 즐거움을 주기 위해 티르소가 작품에 끌어넣은 대표적인 요소가 익살꾼의 등장이다. 가끔 그 익살꾼의 언어가 무모할 정도로 추잡한 경우도 있어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좀 더 깊이 보면 익살꾼의 행동이나 말 속에는 새겨들어야 할 의미 있는 내용들이 상당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극은 비극과 희극이 완벽하고도 절묘하게 어우러져 재미와 교훈을 함께 주고 있는 희비극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안톤 체홉 단막 '주머니 속 송곳' (1) | 2018.07.01 |
|---|---|
| 안톤 체홉 단막 '방앗간에서' (1) | 2018.07.01 |
| 베르톨트 브레히트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1) | 2018.06.27 |
| 윌리엄 셰익스피어 '심벨린' (1) | 2018.06.25 |
| 마리보 '이중의 변심' (1) | 2018.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