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마리보 '이중의 변심'

clint 2018. 6. 21. 13:56

 

 

 

마리보의 네 번째 희극인 <이중의 변심> 1723년 초연되었을 당시 파리 상설 극장은 코메디 프랑세즈를 비롯해 오페라와 이탈리아 극단이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상한 장르로 여겨지던 비극이나 5막 희극을 주로 공연하던 코메디 프랑세즈와 달리, 이탈리아 극단은 젊은 극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3막 극이나 단막 희극에도 문호를 개방한 까닭에 마리보 같은 신예 작가 등용문으로서는 매우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마리보의 창작 방향을 다시 확인시켜 주며 흥행에도 성공한 <이중의 변심>은 습작으로 간주할 수 있는 초기작들과 달리 대표작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이 거둔 성공으로 인해 이탈리아 극단 배우들은 코메디 프랑세즈 경우처럼 왕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배우라는 칭호를 받는데 당시 극단 대표와 그의 가족들이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는 영예를 누렸다는 일화가 함께 전해진다.

 

 

 

 

 

1762년 오페라 코미크와 통합하기 전까지 <이중의 변심>은 이탈리아 극단에서 40년 가까이 꾸준히 공연되었지만 1764년의 세 차례 공연 이후 1921년까지 무려 한 세기 반이 넘도록 전문 극단 공연이 전무했다. 한편 <사랑과 우연의 유희>를 비롯해 <시험>, <거짓된 고백> 등의 작품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마리보의 존재를 일반에 알렸다.

이 시기에 마리보 연극에 대한 이탈리아 극단의 연고는 차츰 코메디 프랑세즈로 옮겨 가는 추세를 보이는데 이는 프랑스의 국립극장이 이탈리아 극단 같은 과거 경쟁 관계에 있던 극단에서 공연한 작품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는 의미다.

이탈리아 극단에서 극작가로 데뷔한 마리보 연극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를르캥이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코메디아 델 라르테에 단골로 등장했던 하인의 대명사가 프랑스 무대에서도 성기를 드높인 셈이다.

 

 

 

 

<이중의 변심>에 등장하는 아를르캥 역시 이탈리아 연극의 특정을 계승하면서도 왕자와 궁정으로 대표되는 특권층의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반항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타고난 식탐과 폭음 기질로 인해 궁정에서 제공하는 향락에 빠져드는 그의 모습은 첫사랑인 실비아마저 실망시키고 만다.

17세기 초반에 유행한 전원시나 전원극의 사건처럼 시골에서 연인 사이였던 아를르캥과 실비아의 사랑에 위기를 초래한 인물은 왕자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실비아가 살던 마을을 방문하고 그녀의 순진무구한 매력에 매료되어 급기야 그녀를 궁정으로 납치하는 무모한 행동을 저지른다. 두 젊은 남녀와 비교할 수 없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왕자이지만 납치 외에 더 이상 강압적인 수단은 동원하지 않고 실비아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기를 기다린다. 궁정을 출입하는 여성 플라미니아와 궁정시종 트리블랭이 왕자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조력자로 등장한다. 한때 왕자를 보필했던 시종의 딸로 등장하는 플라미니아는 자칫 시녀로 오해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왕자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실력자다. 그녀는 친동생인 리제트를 비롯해 또 다른 귀족을 동원해 실비아와 아를르캥의 관계를 치밀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공략한다. 아를르캥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플라미니아 자신도 그의 소탈한 면모에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되어 끝내 그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시골출신 실비아는 플라미니아의 전 방위적인 전략에 그대로 노출된다. 플라미니아의 여동생 리제트의 의도적인 도발에 걸려든 실비아는 궁정여인들이 왕자로부터 관심 받으려고 저마다 경쟁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자신의 무관심에 혼란을 느낀다.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의상을 입어본 뒤 비로소 궁정의 사치와 허영에 눈뜬다. 게다가 촌가에서 만났던 궁정 시종과 재회한 뒤로는 자신과 아를르캥의 인연에 본격적으로 불만을 갖게 된다. 아를르캥이라는 연인의 존재에 대한 불편함과 궁정시종으로 정체를 위장한 왕자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관심은 그녀에게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꿈꾸는 계기를 제공한다. 자신이 좋아했던 궁정 시종이 바로 왕자였다는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변심은 더욱 정당성을 확보하며 그녀는 아를르캥과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중의 변심> 주제는 제목에 잘 요약되어 있다. 마리보의 극작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불충실함(inconstance) "이라는 태마가 프랑스 문학에서 활발하게 다루어진 시점은 17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20세기 평론가들은 이 시기의 미학적 특정을 바로크 미학으로 정리한 바 있다. 코르네유의 <루아얄 광장>을 비롯해 몰리에르의 <동 쥐앙> 같은 희극은 물론, 전원을 배경으로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다룬 프레시오지태경향의 소설과 시에서 정절보다는 새로운 유혹에 이끌리는 인간의 본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마리보 연극의 주제는 면면히 내려오는 프랑스 문학의 태마를 계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연인이 첫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변심하는 것에 대해 마리보의 희극은 도덕적인 잣대로 비판하기는커녕 그것을 자기애에 바탕을 둔 인간 심리의 어쩔 수 없는 결과로 받이들인다. 몰리에르의 동 쥐앙이 끊임없는 여성 편력과 신앙적인 불경이라는 원죄로 하늘의 심판을 받는 것과 달리, 마리보 연극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쉽 없이 바뀌는 자신들의 욕망에 무의식적으로 끌려간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마리보는 18세기 라신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사랑의 불충실함에 대한 면죄부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할 테마는 궁정에 대한 풍자다. 17세기 대표적인 성격희극이자 풍속희극인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에서 주인공 알세스트는 거짓된 예절과 위선이 넘치는 궁정에 대한 고발을 서슴지 않았는데, 마리보의 <이중의 변심>에서는 특정 인물이 그 역할을 독점하지 않는다.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 실비아 관점에서 볼 때, 궁정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존심으로 충만한 동시에 지인들을 속이고 약속을 배반하고 사기와 거짓을 일삼는 파렴치한들이다. 궁정 세태를 스스로 파악한 실비아와 달리 아를르캥에게 궁정 풍경을 일깨운 인물은 익명으로 등장하는 어느 귀족이다. 그에 따르면 궁정 인사들은 왕자에게 잘 보이려고 경쟁하고 자기들끼리 친교를 유지하면서도 시기하는 지들은 철저히 견제해야 하는 복합적 상황에 놓여 있다 아를르캥에게 실비아를 양보받기 위해 왕자는 서민 출신 연적을 귀족으로 봉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가 이를 거절하자 당황한 귀족은 궁정에서의 출세지향주의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 준다. 아를르캥과 귀족의 이견은 명예 문제에서도 드러나는 바, 아를르캥은 궁정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덕목이 실제로는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결과적으로 실비아는 궁정 여성의 자만심과 위선, 허영심을, 아를르캥은 궁정 귀족의 맹목적인 충성과 복종, 허울뿐인 명예의식을 목도하면서도 거기서 요구하는 기대에 굴복하고 만다.

 

 

   

마리보(Marivaux, 1688~1763)

보마르셰와 함께 18세기 프랑스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다. 본명은 피에르 카를레 드 샹블랭, 168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오라토리오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문학에 입문했다. 1710년 파리로 상경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관심을 문학으로 돌린다. 프레시오지테 경향을 반영한 장편 연애소설 호감이 주는 놀라운 효과를 발표한 데 이어 진창에 빠진 마차, 변장한 일리아드등의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며 문필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1716년부터 집 근처에 있는 길 이름에 착안해 마리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1730년대 그를 후원했던 탕생 부인의 도움으로 경쟁자 볼테르를 물리치고 174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피선된다. 이후 몇 차례 연설문을 집필한 것을 제외하고 무대에서 공연될 만한 성공작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하고 위축된 노년을 보내다 1763년 파리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