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아리엘 도르프만 '연옥'

clint 2018. 6. 19. 18:24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왕국과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찢어 죽인 여자. 그러나 남편이 된 그녀의 남자는 새로운 여자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분노한 여자는 남자의 새 신부와 두 아들마저 죽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맨다. 그들이 도착한 연옥의 책임자는 그들에게 서로를 심문하는 일을 맡긴다. 심문자로 들어온 아내와 남편을 알아보지 못 하는 두 사람. 그들에게 구원은 없다. 잘못을 뉘우치고 상처를 준 서로를 용서하기 전까지는....

 

 

 

 

 

 

작가의 글  

연옥은 내가 쓴 다른 희곡이나 소설 중 많은 작품이 그러했듯이 하나의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내게 사전경고 없이 찾아와서는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그 이미지가 찾아온 곳은 그럴듯하게도 아내와 내가 한 달 동안 은신처로 삼은 까탈루니아의 해변마을 까다께였다. 어느 아침, 우리가 체류하던 마지막 날에, 달리와 갈라(Gala)가 사랑을 찾았고 로르까(G. Lorca)와 엘뤼아르(P. Eluard). 미로(J. Miro)와 부누엘(L. Bunuel)과 마그리뜨(R. Magritte)의 영혼이 여전히 배회하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마지막 아침에, 마치 그 죽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연옥에서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나는 하나의 비전을 얻고 깨어났다거기 그들이 있었다. 장식이라곤 없는 방 안에 한 남자와 여자 - 그곳은 정신병자 수용소일 수도 있고 병원일 수도 있으며, 더 지독한 어떤 곳일 수도 있다 - 가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탈출하기를 원하고 남자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그녀를 눕길 원하지만 남자의 속에는 또한 분노로 가득 찬 무엇이, 그가 숨기고 있는 무엇이 있다. 물론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리고 알아낼 방법은 내 상상력 속에 그들을 풀어놓는 것, 그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고 서로를 찔러대다 마침내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변죽만 울린 뒤에야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생각이 내게 떠올랐다. 그 남자와 여자는 저승의 거주자들이었던 것이다. 죽은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올 것인지는 내가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지녀왔던 집착 중 하나였다. 나는 자동적으로 그 장소를 연옥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내가 저승을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불교적으로, 즉 질서 있는 단테(Dante)적 천계(天界)가 아니라 정상적인 시공간 바깥에 있으며 어떤 일이든지 벌어질 수 있는 폐소공포증 적인 몽상의 공간으로 설정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데 그들, 그 남자, 그 여자는 누구였나? 그들은 서로에게서 무엇을 원했나?

오랫동안 나는 우리 인간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 생각해왔고, 일종의 배상, 미미한 구원이라도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실로 가능하기나 한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물론 이러한 주제들을 다른 희곡 작품들, 죽음과 소녀’ ‘과부들’ ‘독자등에서 탐구해왔지만, 좀 덜 정치적인 영역에서 이 쟁점들을 파고들고 싶었고, 국가의 하수인이 희생자들을 처형하거나 고문하거나 검열하거나 그들의 시체를 숨기는 상황이 아니라, 서로를 돌이킬 수 없게 해친 한 여자와 한 남자를 무대에 올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고 싶었다. 사건은 언제나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과 직면하면서 생겨난다, 항상 거기서 시작된다, 일대일의 상황, 연극이든 인생이든, 항상 거기서 시작되는 법이다.

핵심적인 것은 한 주인공을 선한 사람, 다른 이를 악한 사람으로 하는 일을 삼가는 것, 알기 쉬운 답을 내놓으려는 유혹을 피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인물이 서로 동시에 심문하고 치료하기를, 상대방의 해방을 위한 치료사가 되면서 또한 저주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기를, 둘 다 동시에 천국과 지옥의 수호자이기를 원했다 예술적 도전은 정해진 공연 시간에 어떻게 솜씨를 발휘해서 그 같은 정체성의 전환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두 주인공이 상대방을 다루는 과정에서 그에게서,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에게서 뭔가를 숨기는 방식과 똑같이 내가 관객들을 다룰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맨 처음부터 나는 이들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연극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들이 (아니면 둘 중 하나가) 연극의 가면 너머로까지 가서 상대방의 영혼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느냐, 단지 상대방을 위한 연기가 아닌 것을 찾을 수 있느냐를 알고 싶었다. 이중적인 (다중적인) 심문/재판은 연기를 하는 지들의 인격을 붕괴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가린 베일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우리의 인간됨을 끝까지 기록하는, 어쩌면 끝까지 시험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서의 술래잡기 놀이를 우리 모두가 하는 셈인 것이다.

놀이의 성격은 내가 무대에 올리는 딜레마의 크기에 의해 좀 더 긴박해진다. ‘연옥은 사실 정서적, 지적으로 죽음과 소녀의 후속편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작품에서 빠울리나 쌀라스가 제기한 문제들 중 몇 가지를 더 탐구하고, 그 문제들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다 그 문제들은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흉악한 일을 저질렀다면 용서와 화해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 즉 자기 과거의 기반, 우리를 오늘의 우리로 만들어준 어제의 바로 그 행동들을 파괴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행위들을 뉘우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뉘우침이 충분하지 않다면? 요컨대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정말 죄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는지 아니면 겉으로 위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내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어쩔 것인가?

내가 가장 탐구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물들의 정체성에 대한 열쇠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여행길에 동행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왜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상대방뿐 아니라 나에게도 숨기고 있는가, 그들이 무슨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서로에게 저질렀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더 심한 일이 무엇일까? 그리고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저지를 수 있는 더 심한일은? 그리고 그들이 가진 회한의 비밀을 하나씩 뽑아내면서, 그들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을지, 지금 그들은 어떤 사람인지가 떠올랐다 나는 스스로 말했다, 이아손(Iason)과 메데이아(Medeia), 그들이다 연옥에 갇혀, 서로가 상대방에게 망각의 약속, 구원의 약속, 영원한 고통과 심문의 위협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냥꾼처럼 수십 년 동안 그 주위를 빙빙 돌던 두 신화적 인물만은 아니었다. 우리 시대에 맞게 고전을 혁신적으로, 아마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만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또한 항상 용감하게 정복 여행을 나선 다른 전사들과 먼 나라의 해변에서 그들을 기다렸던 원주민 여성들의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코르테스(H. Cortes)같은 정복자와 그의 연인이자 통역이었던 라 말린체(La Malinche)를 떠올렸다. 나는 복합적인 육체적이고 지적인 만남들을 불러일으키길 원했다. 교활함과 섹스와 이국적인 외국인에게 매혹되는 일로 가득 찬 그 만남들은 역시를 다양한 인물들로 채워왔고, 땅에서 솟아난 용의 이빨들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어린이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주인공들이 서로 찢어발기면서 파고들도록 내버려두었고, 그들이 화해를 시도하고, 그들이 저지른 그 큰 죄를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를 가늠하며, 어쩌면 해결책이 없다는 것, 미로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임을 발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마침내 연옥이 수천 년 전에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다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고, 더 특정하게는 9·11 사태의 후유증으로 물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또 정치가 뒷문을 통해 무대로 기어들어온다!)....

 

 

 

 

이 희곡은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공격으로 황폐화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물으며, 우리가 현실에 대해 가진 전제들을 심문하도록 하며, 희생자에서 고발자로, 희생자에서 침략자로, 공격자에서 희생자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를 드러낸다. 그리고 내가 희망한 바는, 우리의 지구와 우리의 생물종이 범죄와 학살이라는 엄청난 문제에 직면한 때, 어제 우리에게 가해진 경악할 일들이 우리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공포를 불러오는 이때, 내가 희망한 바는 적어도 이 희곡이 비난과 분노의 순환을 감히 어떻게 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구원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나의 희망이나 계획, 심지어 내 재능에도 달려 있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 방의 그 남자와 그 여자에게 달려 있었고, 그들은 개별 극장의 좀 더 큰, 똑같은 방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달려 있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저주받을지 구원받을지를 결정할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증오와 복수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라. 왜냐하면 연옥은 궁극적으로 신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신뢰하는 길을 찾는 것, 절대로 적이 될 것 같지 않은 적,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길을 찾는 것 이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을까. 폭력과 공포와 배신으로 오염된 우리 세계에서 이보다 더 긴급한 것이 있을까? 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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