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6年 뉴욕에서 미국의 실험적인 극작가 장 끌로드 반 이탤리와 죠셉 제이킨 연출로 오픈 시어터에 의해 초연되었다.
월남전을 위시한 정치 비판과 세대간의 갈등을 텔레비젼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풍자한 작업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은 많겠지만, 그 중 질적 삶을 위한 가치판단의 기준 - 제 스스로 세상을 보고 판단 할 수 있는 잣대가
텔레비젼이라는 매체로 하여금 꼭두가 되진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는 당시 커다란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줄거리
이 작품의 인물은 모니터 실과 영상팀 인물로 구성되었다. 특정한 시대배경도 없다. 바로 지금의 모습들이다.
영상 팀과 모니터 팀을 각각 따로따로 구분되어진다. 모니터 팀은 시청률을 조사하기 위해, 모니터 실에 모여있다.
각각 일상적인 대화들을 나눈다. 그들에겐 tv를 보며 시청률을 체크하는 일들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너무나 습관이 되어버린 기계화적인 모습들이다. 영상팀은 tv drama, news, show-program.... 등등을 모니터 팀들의 Remote control 에 의해 움직여진다. 시간이 조금씩 흐름에 따라 영상 팀은 모니터 실을 구분이 없이, 영역을 넘나들고 영상팀과 모니터팀의 대화마저도 서로 연관 지어진 듯 보인다. 결국, 모니터 실은 영상 팀에 완전히 속해버리게 되고 그들의 대화마저 전혀 구분이 없어지게 되는데.....
진정한 인간적인 삶. 지금 이러한 현상을 가장 방해하고, 저해시키는 이것! 텔레비젼이다. 이 작품을 통해 진정 우리가 얻고자 하는 정보와 인간들의 질적 삶이 텔레비젼이라는 매체를 통해 변하고 얻을 수 있는지를 느껴야 할것이다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사실화된 무대에서 이작품을 통해 항상 숙제가 되었던 인간이 정보매체에 지배되어 가는 인간 본질의 문제를 생각케 한다

조지, 할, 수잔 세사람이 근무하는 텔레비전 방송 모니터실에서 일어난 오후의 일이다.
구조는 일보다는 자신의 몸매나 동료의 생일에 더 관심이 많은 수잔을 놓고 모니터실의 책임자인 조지와 직원이 할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기조로 하며 그 사이에 히스테리 때문에 생긴 수잔의 멈추지 않는 웃음 다른 직장을 은근히 찾는 것이 들통 난 동료들이 마련해준 자신의 소중한 생일 파티에서 갈등하는 할, 그리고 점심을 먹다가 닭뼈가 목에 걸려 죽다 살아난 조지의 이야기가 삽입되면서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식적이며 표면적인가를 보여준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어린이 만화, 뉴스, 광고, 서부영화, 토크쇼, 외국어 강좌, 밴드 연주쇼, 시위 중계, 선교 방송 그리그 시츄에이션 코미디 등의 모니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다섯 명의 배우가 역을 바꾸어 재현되어 결국 마지막에는 서로의 삶이 도시되어 프로그램 속의 등장인물들이 모터실에서 활동하고 모니터실의 인물은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각자의 개성이 사라져 버린 그래서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규격화된 인물로 변화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 희극과 같이 작가의 독립적인 작업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으로 공연에 접근하는 방법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즉 그들이 처음 작품을 구상할 대처럼 상황을 설정하고 그것에 맞게 배우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따라서 배우들의 자발적인 상상력을 최대로 살리고 현실의 상황과 텔레비전의 상황 간의 조화를 위해 시간타기를 정확히 배시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텔레비전은 우리가 우리 밖의 모습과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창구인 것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자리한 텔레비전에 우리의 가치판단을 위임한 우리는 그저 모래알처럼 흩어진 각 개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산은 오직 텔레이전을 통해야만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텔레비전을 켜놓지 않으면 자기 혼자만이 고립된 듯한 불안감마저 느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가치 판단을 하고 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일로 삶을 꾸려간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리라. 그러나 그 개성의 추구마저도 텔레비전 광고에 의해 상품처럼 만들어지고 사고파는 우리의 현 상황이야말로 이 작품이 1966년에 초연이 되어 약 30년의 간격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공연해야 하는 이유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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