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극과 더불어 초기극의 큰 몫은 희극이 차지한다. 이 〈실수연발〉은 로마극을 번안한 '사람 잘못 알기 희극'으로서, 따로 떨어져 자라나 서로를 모르는 쌍둥이 형제를 둘러싼 희극적 혼란을 다룬 작품이다. 원작에 없는 쌍둥이 하인을 배치함으로써 의외성은 더해지고 사건이 복잡해지지만 구성 자체는 단순하고 성격의 내면화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시라크사의 상인 이지 온은, 폭풍우로 이산 한 가족을 찾는 여행의 도중 , 겨우 도착한 적지 에페소스의 항구에서 체포되어 에페소스의 공작 소라이나스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지 온은 공작에게, 아내에밀리아, 쌍아의 아들(안티포라스), 또 하인으로서 기른 이제(벌써) 1조의 쌍아(드로미오)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허가를 청한다.우연히, 형(오빠) 찾기가 여행을 떠나 있던 안티포라스남동생과 드로미오남동생도 같은 마을에 도착하고 있었다.에페소스에는 그들의 형(오빠)가 살고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일등 알 수가 없다.안티포라스남동생은 하인에 용무를 명령해 혼자서 마을을 걷고 있으면, 하인(자신의 하인이 아니고, 쌍둥이의 드로미오형(오빠))이 돌아오고, 식사로 돌아오도록, 아내 에이드리아나가 기다리고 있는, 등과 괴기인 일 말해진다.안티포라스 형제의 앞에, 하인의 드로미오 형제가 각각 바뀌어 나타나 사태는 혼란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쌍둥이의 아버지였던 셰익스피어였기에 자기 인생과 관련 있다는 작품이 바로 이 쌍둥이 코미디다. 역시 웃기기 위한 말장난과 슬랩스틱이 가득한 소극이지만 목숨이 걸린 위험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약간 서스펜스가 생기고 또 가끔씩 커다란 긴장감이 조성된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의외로 자주 공연된다.
시라큐스와 에피서스 두 도시는 (우리의 남과 북처럼) 서로 원수지간이라서 상대 도시에서 잡히는 사람은 거액의 몸값을 내던가 모가지를 바쳐야 했다. 에게온이란 친구는 시라큐스의 상인인데 에피서스에서 붙잡혔고 돈 한푼 없는 꼴이었다. 이 친구가 간첩이었느냐고? 천만에, 그는 이산가족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는 에피서스의 왕(공작)에게 말한다. 25년 전에 마누라와 두 쌍둥이 아들 그리고 아들들과 나이가 같은 두 쌍둥이 하인들과 항해하다가 조난 당하여 아내와 한 아들 그리고 한 하인을 잃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으러 다니다가 결국 이곳에서 잡힌 것이었다. 공작은 약간 불쌍하게 생각하여 돈을 마련할 시간을 주겠다며 처형을 하루 연기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은 아들과 하인은 이미 이곳 에피서스의 시민이 되어 결혼까지 해서 근처에 살고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데려온 쌍둥이 아들과 하인 때문에 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서로 헷갈려서 일이 아주 복잡하게 꼬인다. 물론 코미디니까 끝은 해피엔딩이고 우리의 이산가족은 다시 재회한다.
셰익스피어가 초기에 쓴 작품이지만 이 작품도 무대 위에 올려놓고 보면 그냥 읽을 때와 전혀 다르다. 두 쌍의 쌍둥이들이 벌이는 상황이 정신없이 복잡할 거 같지만 셰익스피어의 철저한 계산을 잘 따르다보면 관객은 전혀 헷갈리지 않고 아주 즐겁게 양쪽을 구분하고 따라 갈 수 있다. 실제로 두 쌍의 쌍둥이 배우를 구할 수 있다면 이 작품처럼 재미있는 작품은 없다. 그러나 외모도 똑같이 생기고 목소리도 같은 두 쌍의 배우를 구하기란 불가능이다. 물론 분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생긴 배우도 무대 위에 세워놓고 같다고 주장하면 관객은 곧 그렇게 믿어준다. 그리고 억지 쌍둥이의 혼란이라도 아주 재미있어 한다.
우리 연극사상 처음으로 번안연극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연극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 이근삼이 번역한 것을 김상열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상황으로 번안했다. 이승규가 연출해 국립극장 무대에서 선보였다. 당시 언론은 이 작품의 성공비결을 다섯 가지 점에서 찾고 있다.
(……) 셰익스피어의 초기 러맨코미디가 이 땅에서 박수갈채 속에 히트한 몇 가지 이유는 번역극의 한국화로 ① 장소와 때를 3국시대로 잡은 것, ② 언어, 의상의 토착성, ③ 탈춤의 개입과 민요조의 노래와 창(唱)의 시도, ④ 동화나 만화적인 장치와 동작, ⑤ 대사의 리듬을 판소리에 비긴 것 등 (……) -<한국연극>, 이승규, 1976년 1월호

(……) 외국극의 번안문제는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최근에는 거의 시도되지 아니한 것인데 김상열의 번안도 좋았고 이승규의 연출이 이들의 첫 실험으로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장치(김해랑)는 대담한 색과 선을 사용해서 주목을 끌었다.
이 공연은 조목조목 따지면 결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즐거이 이를 보았다. 예컨대 여기엔 (……) 해설자라든가 사이사이 북을 친다든가, 옛가락하고는 동떨어지나마, 노래를 삽입했다든가(작곡 장일남) 또는 음악효과를 우리 것으로 했다든가, 이 모든 것은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그러나 연출자는 이 새롭지 않은 것들을 썩 잘 조화시켰고, 연기자들은 두드러지게 잘하지도, 또 못하지도 않았으나 우리의 호감을 샀다. 그것은 이들의 진실한 ‘앙상블’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의상(유인선)은 연출자의 책임일지는 모르나 여기서 문제가 된다. 즉 안전달(安前達), 안후달(安後達), 또는 전달(前達)의 처 아라녀(阿羅女) 등의 옷은 그들이 상인배라는 이상보다는 어느 귀인들을 연상시켰고, 그들의 몸가짐은 귀인들답지 않게 상인적이고 해서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앞으로 가교에 바라고 싶은 것은 세련미이다. (……) -<중앙일보>, 1976년 5월 14일

'실수연발'의 소재는 로마의 희극작가 타이터스 마키어스 폴라우터스의 '메내크미 형제'에서 얻어왔으리라는 추정과 이 극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로 꼽히는 3막2장은 역시 같은 작가의 '암피트리온'과도 너무나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원전의 줄거리를 대충 살펴보면 셰익스피어가 개작한 점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친부모까지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목구비가 같은 쌍동이 메내크미 형제는 불행하게도 어렸을 때 생이별을 하여 잔뼈가 굵어진다. 동생은 형을 찾아 여러 나라를 헤매다가 끝내는 에피담넘에 자리 잡고 살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 자기가 찾는 형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동생은 매춘부와 건달 등 마을 사람들에게 형으로 오인되어 가진 해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심지어 형수한테는 실성한 사람으로 취급 받게 되어 결국 강제로 의사한테 끌려가게 된 순간 이들 형제들이 마침내 해후하게 되면서 모든 일이 해결되고 만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줄거리를 토대로 흥미진진하게 개작을 시도했다. 다시 말해서 쌍둥이 형제에다가 그들의 하인까지 쌍둥이로 등장시켜 착오와 분규를 더욱 복잡하게 하여 희극적 효과의 깊이를 꾀했으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점은 쌍둥이 형세들의 부모, 즉 아버지 이지언과 어머니이며 수녀원장인 이밀리어를 등장시켜 극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구성의 골격으로 삼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라우터스의 작품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볼만한 문젯거리 중의 하나로서 뭐니 뭐니 해도 이야 기의 줄거리를 어떻게 구성하였느냐 하는 희곡구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천재성 또한 그의 희곡구조에서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수연발'의 작품 전체를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삼일치의 법칙을 따랐다. 좀 더 부연한다면 이 작품은 사건의 단일성, 장소의 동일성, 시간의 단일성을 주축으로 삼았던 희랍 고전극의 전통적인 극형식에 순응했다.
또 이 소극적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추에이션을 웃음의 핵으로 삼은 희극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성격희극이 아니다. 언어의 희극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조에서의 웃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이 작품의 희극적 효과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말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추에이션 그 자체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쌍둥이를 착각해서 형성되는 상황, 쉽게 말해서 쌍둥이들의 용모와 행동, 그리고 어투가 친부모 까지도 구별하기 어렵도록 흡사하다는 상황 자체가 웃음을 빚어내는 바탕이 되며 씨앗이 되는 것이다. 소극에서도 거의 그러하듯이 이 '실수연발'에서도 주요 극중인 물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셰익스피어의 후기작품에서 볼 수 있는 주옥같은 개성미가 없고 단순히 유형적인 인물로 조형되어 있다. 그것은 초기습작 시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능력상의 문제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쌍둥이들을 서로 혼동케 하여 희극 적 오해를 생겨나게 하기 위한 의식적인 수법에서 온 것이라고 풀이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개성은 시추에이션에 의해서 희생되었다고 하겠다. 그밖에도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중에 서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셰익스피어는 초기 희극에서 부터도 그의 예술을 집요하게 밀고 나가는 두 바퀴, 즉 형식적 실험과 인간성의 탐구 (인간적 이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후기 희극과도 그것은 연결되고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간혹 '실수연발'이 화제에 오르게 되면 우리나라 무대에서 이 작품을 구경했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1971년 5월 국립극장이 명동의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던 무렵이다. '실수연발'은 셰익스피어의 고국인 영국에서도 그리 자주 공연을 하지 않는 작품에 속하는데 그러한 작품을 직업극단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대화를 시도한 극단 「가교」의 대담한 기획성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실은 「가교」가 공연한 '실수연발'은 번안 물이었다. 셰익스피어 작 이근삼 역 김상렬 각색 이승규 연출의 이' 실수연발'은 무대를 삼국시대의 백제로 가져가 희극의 번안극으로서 시도해본 일종의 모험적인 공연이었다. 극단「가교」에 앞서 대학 극으로서 중앙대가 1965년에 '실수연발'을 무대에 올린 바 있었다. 흔히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기법상의 미숙으로 말미암아 '실수연발'도 서정성이 조금 부족할 뿐만 아니라 주요 극중 인물들의 개성미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아 향기 높은 문학적 격조와 가치가 뒤떨어진다. 더욱이 한 쌍도 아니고 두 쌍의 쌍둥이를 등장시켜 희극적 리듬을 유발시킬 수 있는 착오의 논리를 전개시켜 나간다는 것은 연출가에게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불안과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번안극 '실수연발'은 1막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마지막 막이 내릴 때까지 관객을 줄곧 재미와 홍분과 감동 속에 파묻히게 했다.
먼저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1777행 밖에 안 되는 이 작품은 20대 후반의 신진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극으로서는 최초의 것이지만 대사가 지극히 간결할 뿐 아니라 활력까지 넘친다. 여기저기서 재치 있는 풍자가 불꽃처럼 튄다. 말의 흐름이 유연해서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이나 이 글을 보는 사람에게 끝없는 재미를 안겨준다. 일종의 소극답게 줄거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많은 사건이 실타래처럼 풀릴 줄 모르게 얽히고설켰다가도 극적인 절정으로 치달아 폭발하는 상봉 장면처럼 뜻밖에 재빠른 반전을 이룸으로써 행복한 결말을 짓게 해준다. 필자가 이 극을 읽고 언젠가는 이 작품을 번역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아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매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창작 년대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보다 설득력 있는 논거로 뒷받침되어 있는 것은 1591년에서 1592년 사이에 쓰여 졌으리라는 것이다. 이 작품이 같은 소극 계열에 속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및 '베로나의 두 신사'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극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 가지 최초의 공연기록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좁혀지고 있다. '실수연발'은 1954년 12월 28일 런던에 있는 그레이즈 법학원에서 성탄절의 축제 행사의 하나로서 플라우터스의 '메내크미 형제'와 매우 비슷한 희극이 배우들에 의해서 공연되었다고 그 법학원의 연극공연 기록에 실려 있다. 물론 그 연극의 작가명은 명기되어 있진 않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이 틀림없다고 여러 학자들은 보고 있다. 첫째로 그 작품이 고전극의 전통적인 극형식을 고스란히 모방했고, 둘째로 장면 변화가 비교적 단순하여 웬만한 공간이면 능히 공연할 수 있으며, 셋째로는 축제 때 여흥으로 공연하기 알맞은 극성(劇性)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유추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수연발'은 1594년 초연된 지 10년 후인 1604년에도 초연 때와 같은 12월 28일 화이트 홀의 왕궁에서 상연되었지만 그 이후의 상연기록은 없으며,18세기에 들어가 이 작품이 많이 무대에 올려 졌지만 그 가운데는 개작된 작품들이 많았다. 또 '실수연발'의 오페라 시도가 1820년 2월에 프레데릭 레이놀즈 연출로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무대, 즐거운 음악, 인기가수의 출연 등으로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이런 가운데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사위엘 펠프스에 의해 부활 상연된 것은 19세기의 후반인 1855년 11월 8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탄생 3백주년에 해당하는 1864년 봄에 많은 지방에서 공연되었다. 그러한 공연 중 특히 쌍둥이 하인형제 드로미오 역을 찰스 웨브와 해리 웨브라는 두 아일랜드인 형제가 출연하여 너무도 닮은 것으로 해서 크나큰 평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무대가 아름답다는 칭찬을 받은 바 있었다. 20세기가 되면서 '실수연발'의 상연은 증가되어갔고 여러 가지의 새로운 시도도 없지 않았다. 특히 1938년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라트포드 온 에이븐에서 공연된 데오도르 꼬미사르제쁘스끼의 뮤지컬 코미디 '시러큐스의 형제'는 환상적인 소도구, 여러 가지 색깔의 의상, 분홍색 녹색 회색 황색 집 등의 로맨틱한 배경을 사용하여 즐거움에 포인트를 둔 무대였다. 1962년 클리포드 윌리암스의 새로운 연출로 만든 무대는 "소극이긴 하지만 최고로 양식화된 소극이어서 더욱 재미있었다.”는 J. R. 테일러의 관극 평이 있었다. 이 작품은 이렇듯 성공을 거두어 탄생 4백주년 기념제의 세계 순회공연 레퍼토리로 '리어왕'과 함께 올려지기까지 했었다. 이때의 공연을 본 G. 윌리암스는 ''이 극의 비평사가 소극으로부터 시어리어스 드라마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이것은 훌륭한 코미디”라는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 트레버난 연출로 공연을 가진 바 있고, 2 년 후에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으며, 1983년에도 에이드리안 노블 연출로 동 극단이 이 작품을 상연했었다. 이 작품은 또한 제임스 케란 존스 연출로 B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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