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 라신 '페드라'

clint 2018. 5. 13. 11:13

 

 

 

 

 

프랑스 고전비극의 대표작이다. 1677년 부르고뉴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를 전거(典據)로 했다. 전실자식 이폴리트에 대한 불륜의 사랑에 고민하는 아테네의 왕비 페드르는 남편 테세(테세우스)의 죽음의 오보(誤報)를 받고, 유모 외논의 권고로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시를 사랑하는 이폴리트는 이 사랑의 고백을 거절한다. 이때 남편 테세가 돌아온다. 유모 외논은 왕비를 구하기 위하여 이폴리트가 왕비 페드로에게 사련(邪戀)을 품고 있다고 참언(讒言)한다. 테세는 노하여 아들을 저주하여 죽게 한다. 페드르도 죄를 고백하고 자살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사랑 때문에 자신을 파멸시키는 페드르의 운명을 아름다운 시로 노래부른 걸작이다.

라신은 이 작품에서 청년시절에 사이가 결렬되었던 포르 루아얄의 은사(恩師)들과 화해하고 신앙생활에 들어간다.

비용 공작부인 일당의 음모로 초연은 실패하고 라신은 극계에서 은퇴, 국왕의 수사관(修史官)이 된다.

 

 

 

 

매혹적인 그녀.. 페드라..
에우리피데스의 ‘히포리투스와 파이드라의 사랑’을 원제로 하여 프랑스 작가 장라신의 사랑비극의 정수라고 불리는 ‘페드라’을 기본으로 한다. 이 작품은 가얇은 한 여인 페드라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은 테제 왕이 사라진지 반년, 트레젠느 땅에서 시작된다. 페드르 왕비는 테제의 아들 이포리트 왕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점점 깊어지는 사랑에 죽음을 택하려 한다. 한편, 이포리트 왕자는 이뤄질 수 없는 아리시 공주와의 사랑을 피해 트레젠느를 떠나려 한다. 이때, 테제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고, 이포리트는 떠나기 전, 아리시 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간다. 오빠들의 죽음 이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아리시. 여리고 순수한 그녀의 모습에 그만 이포리트는 사랑을 고백한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체, 페드르 왕비. 그녀는 이포리트에게 만나 이성을 잃어버리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해버린다. 그런데... 테제 왕이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큰 반전을 가진다. 

 

 

 

 

 

히폴리투스를 원제로 쓰여진 장라신의 페드라! 그도 완벽하지는 못하였다. 이 극의 주인공인 페드라의 비극성을 부여시키기 위해서 아리시, 에논느란 인물들을 만들었지만 너무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아니라, 불어 운문체를 바꾼 대사들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였다. 결국, 그 시대의 모든 상황과 너무나 변해버린 이 사회는 나를 더욱더 미궁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우선, 이 극의 주제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의 정렬 사이에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초점은 페드라다. 페드라는 사랑하면 안 되는, 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피를 토하고, 울부짓고, 고통스러워한다. 유모 에논느에게 도움을 청해보고 신께 기도를 들여보지만 그녀는 더욱 더 비참해져만 간다. 그리고, 결국 모든 걸 죽음으로서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억제할 수 없는 본능과 정렬, 그리고 그 정열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환경들... 누가 과연 페드라에게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페드라가 바보 같은가? 아니면, 페드라가 솔직해 보이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지닌 동물...
그렇다. 우리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
나는 깊고도 깊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랑에 졌어들고 말았다. “ 사랑만큼 솔직한 것이 있는가?? ”
-나의 마음은 사랑에 불타고, 눈물에 잠겨 메말라 버렸고, 활기를 잃어버렸습니다.

 

 

 

 

 

Jean Racine (1639-1699 프랑스 고전비극 작가)

그의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정념의 노예가 되어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지고 만다. 이러한 그의 비극적 세계관과 함께 여성의 심리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이루어 냄으로써 그는 오늘날까지 비극의 대가로 불리고 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고전 비극의 전형을 이루고 있으며 내면화된 심리적 드라마로 간결하고도 엄밀한 구성 가운데 재현된 극이다. 그는 극의 요소를 외적 사건의 얽힘에 두지 않고 등장 인물의 복잡 미묘하게 얽힌 심리적 움직임이 그 자체의 논리적 필연에 의해 최후의 폭발점을 향해 치닫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는 또한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중요시 하였다. 라 브뤼예르는 "라신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렸다" 라고 평했다. 그는 정념의 광란에 결국 삼켜 버리는 인간의 현실적 모습을 사실 그대로 그렸다. 작품으로는 앙드로마크로(1667), 베레니스(1670) 미트리다트(1673) 페드르(1677) 에스테르(1689) 등이 있다.


페드르’는 라신느가 상업극단을 위해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당시 이 작품은 큰 인기를 얻었고 라신느도 어깨에 힘 좀 줬나보다.

그리고 누군가 그런 것을 배아파했는지 이 작품을 꼬집었다. 그래서 ‘지저분한 불륜 포르노를 예술이라 우기는 꼴’이라는 내용을 시(소네트)로 썼고, 인터넷이 없던 시대인데도, 온 파리에 떠돌며 유행했다. 그러자 라신느는 ‘확!’ 인생을 바꾸었다. 사실 그가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해 일가친척들은 ‘가문의 쪽팔리는 수캄로 여겼고, 라신느는 늘 고민했었다. 그래서 ‘페드르’가 첫 공연된지 8개월 만에 연극을 때려치우고 다시 포르 로얄 수도원의 장세니즘 신도로 복귀했다. 또 별로 지성적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신앙심 깊은 처녀 카테리느 드 로마네(Catherine de Romanet)와 결혼해서 아들 둘에 딸 다섯을 낳았다. (얘네들은 나중에 모두 수녀나 신부가 됐다.)
그러나 라신느는 조용히 시골에서 살 팔자가 못 되었나 보다. 루이 14세는 라신느의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몰리에르를 더 좋아했다) 라신느를 왕실 역사 기록자(Royal Historiographer)로 임명했다. 그래서 라신느는 프랑스판 왕조실록을 쓰기 위해 왕을 따라 여러 전쟁터까지 다니면서 루이 14세의 업적을 기록했다. 1690년에는 승진하여 왕의 침실에서 시중 드는 일도 맡았다. 이 시기에 남긴 두 작품 ‘에스터’(Esther, 1689)와 ‘아탈리’(Athalie, 1691)는 루이 14세의 왕비가 써달라고 하여 만든 작품이다.
왕을 위해 약 10년간 일한 대가로 라신느는 145,000프랑의 거금을 받았다. 그러나 말년에 직위를 사느라 큰 돈이 들었고 또 그 직위에 부과된 세금이 엄청나서 경제사정이 나빠졌다. 그러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1699년 4월 21일 간암으로 죽은 라신느는 포르 로얄 수도원에 묻혔으나 나중에 다시 파리의 생 테티엔 뒤 몽(Saint-Étienne-du-Mont)으로 옮겨져 수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옆에 묻혔다.
라신느의 작품들은 불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꼽힌다. 그래서 뒤져보니까 우리나라 어느 대학교의 불어 전공 대학원에도 ‘라신느 비평’(Criticism of Racine)이라는 3학점 짜리 코스가 있었다. ‘문학 비평의 구체적 양상은 주로 마르크시즘,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언어학적 구조주의 등의 유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다양한 비평의 중심에서 늘 거론되는 라신느의 극작품을 통하여 비평의 유효성을 연구한다’니... 엄청 골치 아픈 강의가 틀림 없다. 하지만 프랑스와 외국에서는 더 골치 아프게 라신느의 작품들을 장세니즘과 연결하고 또 코르네이유와 비교 분석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라신느의 작품은 의외로 자주 공연된다. ‘페드르’는 심심치않게 공연되는 편이고 국립극단에서도 ‘앙드로마케’(1993년)와 ‘브리타니쿠스’(2000년)를 공연했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 관객들에게는 지루할지 모르지만 연기자들은 라신느의 작품들을 아주 좋아한다.

 

 

 

1674년에 명예 귀족의 자리까지 오른 라신느는 1677년에 ‘페드르’(Phedre, 페드라)를 발표했다. 라신느 최고의 작품이자 프랑스 신고전주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투스’를 각색한 작품이다. 뭐가 달라졌는지 에우리피데스의 오리지날부터 보자.
사랑과 여자를 우습게 아는 젊은놈 히폴리투스를 ‘손 좀 보기’ 위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죄없는 페드라를 미끼로 삼는다. 그래서 페드라의 가슴은 양아들 히폴리투스에 대해 욕망으로 가득해져서 괴로워한다. 이것을 보다 못해서 시녀가 히폴리투스에게 페드라의 사랑을 전했지만 히폴리투스는 추잡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페드라는 실연의 아픔에다가 수치심과 분노까지 겹쳐서 복수를 결심하고 가짜 유서를 쓴 뒤에 자살한다. 아들이 페드라를 겁탈했다는 유서를 본 테세우스는 히폴리투스를 불러서 따지지만 결백하다는 아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저주받고 쫓겨난 히폴리투스는 바다괴물에게 공격 당하여 중상을 입는다. 다른 여신 아르테미스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밝힌 뒤에 아들은 아버지 품에서

죽는다. 이렇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자만심 넘치는 젊은놈의 비극이다. 그리고 페드라는 아무 죄도 없이 그저 여신 때문에 무서운 사랑인지 욕정인지를 이기지 못하여 갈등하다가 자살한다. 라신느는 이 작품의 조연이던 여자를 주연으로 바꾸었다.

페드라(페드르)의 가슴은 양아들 히폴리투스에 대해 욕망을 느끼지만 페드라의 머리는 유부녀로써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슴과 머리의 갈등이 만들어내는 이 괴로움을 끝내려고 페드라가 자살하려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그러나 남편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녀는 페드라에게 이제 유부녀가 아니니까 히폴리투스에 대한 사랑이 부정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페드라는 히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알리시아라는 처녀를 사랑하는 히폴리투스는 페드라에게 냉담하여 메스껍다는 반응이다. 페드라는 다시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실연의 아픔에 빠진다. 시녀의 위로로 간신히 다시 희망이 생겨나지만 곧 남편 테세우스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든 게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남편과 히폴리투스가 같이 들어오자 페드라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당황한다. 테세우스가 페드라를 의심하니까 시녀는 히폴리투스가 먼저 접근했다고 거짓말한다. 화가 난 테세우스는 아들을 저주하고 내쫓는다. 페드라가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에 남편은 히폴리투스가 아리시아를 사랑한다고 알려준다. 그러자 페드라는 질투심에서 아무 말도 않는다. 그 결과로 히폴리투스는 바다괴물에게 죽고 시녀는 자살한다. 페드라는 독을 먹고 죽기 직전에 남편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이제 작품은 한 여자의 무서운 욕정이 주위 사람 모두를 망치는 것으로 변했다. 인물의 관계는 복잡하지만 외면 행동은 단순하다. 또 작품은 전체가 강한 콘트라스트로 꾸며져 있어서, 히폴리투스가 아리시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젊은이들의 순수한 장면 바로 뒤에 괴롭고 농염한 페드르의 처절한 사랑 고백 장면이 나와서 대조를 이루는 식이다. 모든 것을 알게된 테세우스와 페드르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도 아주 강렬하다.
당시 당국이 원하던 신고전주의 원칙을 따르기 위해 라신느가 바꾼 부분도 많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는 히폴리투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히폴리투스가 평생을 독신으로 순수하게 살겠다고 잘난 체 하니까 아프로디테 여신이 페드라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라신느는 신을 모조리 없애기 위해 아리시아를 넣었다. (아리시아는 로마 시대의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이다.) 그래서 아리시아를 사랑하는 히폴리투스는 원작의 순수함과 자만심이 사라지고 현실적인 인물이 되었다. 주인공이 여러 사람(코러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세네카의 수법을 따라 코러스 대신에 시녀나 친구 등을 등장시켜 주인공들의 말을 듣도록 했다. 혼자 하는 독백도 특수한 상황이거나 기도뿐이다. 또 페드라는 왕족이라는 고상한 신분이니까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당시는 사람 위에 사람 있던 시대다!) 그래서 페드라가 거짓 유서를 쓰는 대신 천한 신분의 시녀가 거짓말하는 것으로 바꿨다. 히폴리투스가 바다괴물에게 죽는 것은 현실감이 없지만 신화에 나오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무대 밖에서 처리했다. 결국 라신느의 작품은 페드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로 변했다. 좀 외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뜨거워지는 왕비가 양아들에게 욕정을 품는 작품이 됐다. 그러나 라신느는 긴 서문에서 이 작품이 절대로 불륜을 다룬 야한 작품이 아니라 도덕을 강조한 작품이라고 무지하게 강조했다.

 

 

   Jean Racine

 

처음 공연된 이후로 이 작품은 대단한 걸작으로 평가되었고 프랑스의 자부심 (혹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경쟁심?) 까지 더해져서 유명작이 되었다. 이제 여주인공 페드르 역은 웬만한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내는 큰 역으로 변하여 남자배우들이 노리는 리어왕과 비교된다. 물론 잘만 하면 감동을 주겠지만 페드라 역은 외적 행동이 거의 없이 내면 연기로만 정열과 죄책감의 갈등을 표현해야 하기에 인기만 믿고 무대에 올랐다가는 관객을 모두 졸게 만든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이 작품의 출연자를 보면서 나는 혹시 새로운 연출 의도가 아닌가 생각했다. 보통은 나이가 들었어도 멋진 여배우에게 페드라 역을 맡기는데 그 공연에서는 ‘나이 들고 추해보이는’ 유명 여배우를 쓴 것이다. 상상해 보시라! 느끼하고 추한 뚱보 할망구가 사랑의 운명이니 뭐니 떠들면서 새파란 남자에게 덤벼든다면 관객은 히폴리투스의 메스꺼운 기분을 확실하게 느낄 것이다!
193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은 고대 그리스 연극을 현대로 리메이크했다는 공로(?)를 인정 받는 작가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은 뚜렷한 리메이크가 아니지만 ‘페드라’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새엄마와 양아들의 애정을 소재로 했다. 이 연극은 1958년 영화로 나왔고 안토니 퍼킨즈와 소피아 로렌이 출연했다. 당시에는 약간 화제를 끌었지만 어느새 잊혀지고 사라졌다.

 보다는 역시 안토니 퍼킨즈가 출연한 1962년의 영화 ‘페드라’가 훨씬 더 유명하다. 라신느의 작품을 토대로, 프랑스의 줄르 다셍 감독이 현대로 각색한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히트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보기에는 너무 심각한 오버액션이라 웃음이 나오고, 느린 템포에 거친 흐름이라서 좀 지루하다. 그래도 알렉시스(히폴리투스) 역의 안토니 퍼킨즈가 바흐 음악 속에서 절규하며 차를 몰아 죽음으로 달려가는 마지막 장면의 사운드트랙은 그리스 작곡가 테오도라키스가 만든 주제곡과 함께 아직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진짜 이 영화의 매력은 그리스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의 목소리다. 풍만하고 섹시한 이 미녀가 처음 입을 열었을 때 당시의 관객들은 전율했다.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도 사람의 목소리도 아닌 악마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여자지만 그 속에 악마가 들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방법은 없었다. (이 테크닉은 나중에 말론 브란도가 ‘대부’에서 다시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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