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clint 2018. 5. 13. 10:44

 

 

 

테베 창립자인 카드모스의 후예 라브다코스의 아들 라이오스 왕은, 아폴론 신으로부터 왕비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손에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는 계시를 받고 갓난아기를 양치기에게 맡겨 키타이론 산 속에 버리게 했는데, 양치기는 가엾이 여기어 그 아이를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주었다. 아이는 그곳 왕 폴뤼보스와 왕비 메로페를 친부모로 알고 자라났다. 이리하여 오이디푸스는 전혀 모르고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이게 되었으며, 테바이시에 수수께끼를 걸어 그것을 풀지 못한 동안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를 요구하던 사람 머리에 사자 몸을 한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그 공으로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이오타스테와 결혼하여 2남 3여를 두었다. 이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천인공노할 자신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신이 보낸 염병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밝혀 내려다가 마침내 자기 자신이 살해자임을 발견한다.<오이디푸스 왕>은 이 탐색을 훌륭한 구성 아래 숨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진전시켜 나간다.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지혜와 정의에 가슴속 가득 신뢰를 두고 있는 사나이다. 이 자신 때문에 그의 언동에는 때로 너무나 성급하고 너무나 교만한 점이 보인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사람으로서 왕으로서 항상 옳은 것이다.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믿을 때는 무슨 일이든, 겁내지 않고 돌진한다. 그 때문에 분노했고 분노에 내맡겨 라이오스를 죽였으며, 분노에 못 이겨 스스로의 눈을 찌른다. 그러나 이 극에서 무서운 것은 소포클레스의 다른 극에서도 그렇듯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들의 길이다. 이오카스테의 온갖 선의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의 신은 냉혹 무정하게 자기의 길을 성취하고 달성한다. 특히 무서운 것은 신의 의지가 분명하게 미리 표시되고, 그것을 피하려는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일이다. 신들 세계의 거대한 톱니바퀴는 소리없이 돌아가, 보잘 것 없이 작은 인간은 모두 그 속에 휘말려 들어가 버린다. 소포클레스는 마치 인간의 모든 덕의 무가치함을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특히 그 마지막 장면에서 자세히 바라보면, 그는 결코 완전한 패배자는 아니다. 그는 분노한 나머지 고통에 못 이겨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지만 닥쳐올 운명에 감연히 맞설 용기를 지니고 있다. 어떤 운명이든지 올 테면 오너라, 나는 그것에 견뎌내 보이겠다는 마음의 태세가 그의 불공평한 재앙에 짓눌린 참혹한 모습 뒤에 깃들여 있다. 오이디푸스는 숙명론자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용한 체념 같은 경지에는 결코 편안히 들어앉지 못한다. 신들의 길은 신들의 길이고 사람인 나는 나대로 꿋꿋이 걸어가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소포클레스의 무서울 정도의, 사람으로서의 비애와 용기가 이 불운한 왕을 통해 우리들에게 육박해 온다.<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테베의 시민들이 테베 왕궁으로 찾아와 오이디푸스에게 전염병을 해결해달라는 탄원한다. 그때 전염병의 원인을 물으러 간 크레온(이오카스테의 오빠)이 테베 왕궁으로 돌아온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 왕에게 역병을 없애려면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추방하라는 신탁의 내용을 전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이제껏 찾지 못했는가하고 의아해하고, 크레온은 당시 스핑크스의 혼란 때문에 제대로 살해자를 찾지 못했노라고 답변한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던 자신이 이 문제도 풀겠다고 장담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찾기 위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오이디푸스는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라이오스의 살인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늙은 예언자는 좀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다. 오이디푸스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예언자는 라이오스를 죽인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크레온과 테이레시아스가 공모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 의심하고 분노한다. 바로 그때 이오카스테가 등장해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살해자가 아니라고 안심시킨다. 그녀는 먼 옛날 라이오스가 자신이 아들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그녀가 낳은 아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라이오스의 버려진 그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가 아이를 버리라고 시킨 양치기를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때 오이디푸스에게 코린스에서 전령이 찾아옵니다. 그 전령은 코린스의 폴리보스 왕(오이디푸스를 길러준 아버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 전령이 바로 테베의 양치기에게서 버려진 오이디푸스를 받아 폴리보스 왕에게 바친 사람이다. 전령은 오이디푸스가 폴리보스의 왕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때 오이디푸스의 부하들이 라이오스의 명령을 받았던 양치기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양치기가 라이오스 왕의 부탁을 받고 어린 오이디푸스를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다른 양치기(다시 말해, 코린스에서 온 전령)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오이디푸스는 크레온에게 라이오스의 살해자인 자신을 추방시켜 달라 부탁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 궁전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한 나절 동안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짧은 한나절 동안에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2대에 걸친 사연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다.
드라마투르기(희곡 작법)는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주제에 따라 재구성하는 기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드라마투르기는 플롯을 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대단한 드라마트루기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 작가라도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에서 이만큼의 플롯을 짜내기는 힘들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시학’ 제7장에서 어떻게 비극의 플롯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는 플롯이야 말로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는 비극의 플롯은 발단과 전개와 결말의 구조를 가져야하며 이 과정이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재현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박진감을 높일 수 있다고 말이다. 훗날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고전주의 비평가들과 극작가에게 영향을 주어 삼일치 법칙(tree unites)으로 정립된다. 삼일치 법칙에 따르면 희곡은 하루 동안, 한 가지 장소에서 한 가지 플롯만을 다루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사실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고전주의가 유행했던 17세기 프랑스나 이탈리아 연극에서나 지켜졌을 뿐이다. 18세기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만 해도 이러한 삼일치 법칙은 가볍게 무시한다. 삼일치 법칙에 대해서는 17세기 고전주의를 다룰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제 다시 오이디푸스 왕으로 돌아가 보자.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비극이 다루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승과 몰락의 주기이다. 봄에 싹이 텄다가 겨울에 이우는 한해살이 식물처럼 인간들도 그 상승과 몰락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피할 수없는 주기를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 요즘 말로 하면 인간의 자아는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몰락과 소멸에 저항한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심리학과 연금술’이라는 책에서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악마적인 의지를 말한다. 꼭 운명이 내(ego) 의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이 자아와 맞설 때면 사람들은 운명 속에 담긴 신성하거나 혹은 악의에 찬 힘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운명에 굴복할 때 운명은 신의 뜻이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운명과 희망 없는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인다. 그럴 때 우리는 운명 안에서 악마를 본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신의 뜻 다시 말해 운명을 거스르는 오만함(Habris)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 동안 공연되었던 수많은 비극들 중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운명과의 싸움을 벌이는 인간의 의지와 미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미덕(arete)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자질을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한 장점을 이용해 운명에 굴종하지 않고 삶을 개척하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용서할 수 없는 죄지만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미덕(arete)이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의 탁월한 장점으로 삶을 개척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운명의 각본 속에 빠져들고 만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탁월함 자체가 그의 운명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와 맞서서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의 탁월한 자질이 그를 파멸로 몰아간다. 만일 오이디푸스가 의문의 핵심까지 파고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도 풀지 못했을 것이고 동시에 그렇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출생의 비밀을 캐려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바로 당신의 미덕(arete)이 당신에게 재앙을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사람들은 비극을 보면서 인간의 미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저 커다란 운명의 힘에 순종할 것을 배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BC494~BC406)와 거의 동시대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크라테스(BC469~BC 399)는 이러한 운명주의적인 시각을 거부한다. 그에게는 운명보다 미덕이 더 중요하고 신보다는 인간의 영혼(psyche)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포클레스에 비해서 세속적인 복이 없었던 사람이다.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와 맞서 승리했던 페리클레스 시대에 전성기를 보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 다투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에 전성기를 살았다. 소포클레스의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다면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였다.
소포클레스가 빼어난 미남으로 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당대에 가장 못생긴 추남 중에 하나로 손꼽혔다.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가장 극명하게 차이 나는 점은 소포클레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밑에서 공직을 맡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불경죄로 기소되어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소크라테스는 책을 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들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주변인물들의 기록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기록들 가운데 누구의 것을 얼마만큼 믿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생전에 30편에 이르는 책을 썼는데, 그 책들은 단 한편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람들이 묻고 답을 하는 희곡 형식으로 쓰여졌다. 그래서 그의 희곡 형식의 글들은 대화편(對話篇, dialogues)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은 바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였다. 그래서 그의 저서의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플라톤 자신의 이야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사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구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철학을 요약하는 키워드는 아레테(arete), 프시케(psyche) 그리고 이데아(idea)이다. 아레테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한 사람이 가진 탁월한 자질, 미덕을 말한다. 프시케는 흔히 영혼으로 번역되는데 요즘말로 하면 자아(ego)라는 말에 더 가깝다. 이데아는 만물의 원형이 되는 관념적 실재이다. 플라톤은 육체(소마)와 영혼(프시케)을 나누고 육체보다 영혼에 더 강조점을 찍는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을 더 확장해, 육체적인 감각에 의해 지각(知覺)되는 현상세계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를 분리시킨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를 통해 감각되어지는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세계는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탁월함이 바로 인간의 이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간의 미덕은 곧 인간의 이성을 뜻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인간의 미덕은 이성을 발휘해서 감각이 주는 착오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이성을 신적인 원리(Logos)와 동일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신적인 원리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미덕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인간(arete)의 미덕과 신성(Logos)을 대치시키지 않는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말년을 그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에 순종하며 대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소포클레스는 인간과 신의 화해는 인간이 자신의 미덕을 버리고 신의 의지를 쫓을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미덕과 신의 의지를 대치시킨다. 어쩌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플라톤이 레반트에서 전래되어온 도취와 망아를 강조하는 디오니소스교를 싫어하고 디오니소스 축제 기간에 상영되는 비극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비극을 쓰는 시인들을 국가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친다. 아테네에서 추방이라는 오늘날에 정치적 망명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비극을 쓰는 시인을 추방하라고 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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