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테의 대표작은 역시 ‘파우스트’다. 파우스트 전설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그레고리우스 파우스투스(Gregorius Faustus, 혹은 Gregorius Sabellicus, 1480?-1510?)는 신비한 인물로 갖가지 마법과 연금술을 썼으며 금지된 지식을 추구했다고 한다. 1587년에는 이 사람에 대한 책이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파우스트를 소재로 한 첫 유명작품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 1564-1593)의 ‘파우스투스 박사’(Doctor Faustus)다. 여러 작품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심리적으로 다룬 말로우는 이 작품에서도 인생에 실망한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와 내기를 하는 이야기로 꾸몄다. 이 연극은 독일에서도 자주 공연되었다. 괴테는 말로우의 작품을 토대로 했지만 주인공을 종교에서 벗어나려는 반항아이자 독일식 영웅으로 바꾸고 순수한 인간성이 구제의 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말로우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천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괴테의 작품에는 신사와 궁정관료의 세련된 태도를 지닌 새로운 인물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줄여서 ‘메피스토’)가 나온다. 이제는 악마를 상징하는 유명한 이름이 됐다. 제목이나 인물들 이름은 유명해도 우리나라에서 요즘 이 작품을 공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또 엄청 유명한 대가의 작품이니까 내가 아무리 ‘너무 느리고 무거워서 지루하고 골치 아프다’고 해봐야 나만 무식한 꼴이 된다. 볼 기회도 거의 없고 또 (나는) 볼 마음도 거의 없는 작품이지만 워낙 유명하니까 스토리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괴테는 이 작품의 앞에 ‘헌정’(Dedication), ‘무대 서문’(Prelude on the Stage), ‘천국의 프롤로그’(Prologue in Heaven)를 썼다. ‘헌정’과 ‘무대 서문’은 요즘 연극 팜플렛에 들어있는 작가의 말, 극장장 인사말, 비평가의 글 같은 것이고 본편은 ‘천국의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이 프롤로그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유혹할 자신이 있다’며 신과 내기한다. 신은 인간이 옳은 길을 가리라 자신하기 때문에 내기를 허락하고, 메피스토는 향락과 욕망충족으로 인간을 유혹하겠다며 큰소리친다.

제1부에서 늙은 교수 파우스트는 거대한 우주만물의 진리에 비해 인간은 너무도 미약하다며 절망한다. 그래서 ‘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인간의 몸을 버리겠다’고 자살하려 한다. 그러나 밖에서 들리는 부활절 노래 소리에 젊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독배를 떨어트린다. 파우스트는 거리로 나가서 축제에 끼어들어 평범한 인간으로 새로운 진리를 얻으려 한다. 다시 서재로 돌아온 파우스트 앞에 개의 모습으로 따라온 메피스토가 학생으로 변하여 접근하더니 서서히 악마의 본성을 드러낸다. 결국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와 유명한 계약을 한다.
내가 어느 순간을 보고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하고 외치면 그때는 자네가 나를 결박해도 좋네! 나는 기꺼이 멸망의 길을 가지! 그때에는 죽음의 종을 울려도 좋아! 그러니까 향락이나 유혹에 만족한다면 어떤 벌이고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파우스트를 타락시켜 그 영혼을 뺏으려는 메피스토! 그리고 그 악마를 하인처럼 부리며 넓은 세계를 마음껏 체험하고 자기가 학문으로 얻지 못한 진리를 찾아보려는 파우스트! 둘은 함께 길을 떠난다.

메피스토의 힘으로 ‘청춘을 돌려받은’ 청년 파우스트는 순진한 소녀 그레트헨(Gretchen, 혹은 그레첸)을 만난다. 둘의 순수한 사랑을 메피스토가 육체적으로 바꾸고 그러는 통에 그레트헨의 어머니와 오빠가 죽는다. 소녀를 건드린 뒤 메피스토와 함께 발푸르기스(Walpurgis) 산 속에서 악마숭배자들과 환락의 밤을 즐기던 파우스트는 다시 그레트헨을 생각하고 후회하며 돌아온다. 그 동안 소녀는 파우스트의 아기를 낳아 죽였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는 중이다. 파우스트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소녀를 구출하려는데 소녀는 이미 세상을 단념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영혼의 구원을 애원한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함께 도망치자고 해도 오히려 거절한다. 이 모습을 보며 메피스토가 ‘그녀는 심판 받았다’고 하니까 그 순간 하늘에서 ‘그녀는 구원 받았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대하여 해설가들은 ‘인간의 어떠한 죄도 진실한 인간성과 양심이 있으면 정화될 수 있다는 괴테 특유의 기독교 정신’이라고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그레트헨이 사랑하는 파우스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며 제 1부는 끝난다. 해설가들은 ’명계 육체 도덕 모든 것이 갈라지고 달라져도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은 서로 연결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제 1부가 평범한 남녀의 개인문제를 다룬 ‘작은 세계’였다면 제 2부는 현대와 과거, 민족과 국가, 신화와 과학이 모두 동원되는 ‘큰 세계' 이야기다. (당연히 규모도 더 크고 등장인물도 무지하게 많이 나오기 때문에 공연은커녕 한번 다 읽기도 어렵다.)
절망하여 혼수상태에 있던 파우스트를 메피스토가 깨워서 새로운 의욕을 준다. 둘이는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으로 갔는데 마침 재정난으로 나라가 위기에 몰려있다. 파우스트는 지폐를 마구 찍어내는 방법으로 (당시 독일 여러 주에서 쓰던 수법을 풍자한 것이라 한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 황제는 파우스트를 ‘도사’로 믿고 사상최고의 미남미녀인 트로이의 파리스와 헬렌(헬레네)을 불러오라고 한다. 그런데 파우스트가 믿고 있던 메피스토는 기독교와 독일의 악마이기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파워가 없어 그들을 불러오지 못한다. 결국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열쇠를 빌려 ‘어머니들의 세계’로 가서 향로를 가져왔고 거기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파리스와 헬렌의 모습이 나타난다.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헬렌의 모습에 반해서 만지려다가 향로가 폭발하여 기절한다.

제2막의 무대는 예전(제 1부)의 파우스트 연구실이다. 조수였던 바그너(Wagner)는 그 동안 유명교수가 되어 과학기술로 인조인간까지 만들었다. 놀라운 기능과 지능을 소유한 인조인간 호문쿨루스(Homunculus)는 식물인간처럼 잠든 파우스트의 꿈을 알아낸다. 파우스트는 미녀 헬렌의 꿈을 꾸고 있으며 그를 소생시키려면 고대 그리스로 데려가 잠을 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조인간은 파우스트와 일행을 데리고 과거의 그리스로 날아간다. 테살리아에 도착한 일행 앞에 헬렌 대신 고대 그리스의 신과 요정의 세계가 펼쳐진다. 제 1부에서 보여준 ‘발푸르기스의 밤’은 낭만적 스펙터클이고 이 부분은 그와 대비되는 고전적 스펙터클이다. 이 제 2막은 ‘파우스트’ 작품의 스토리 진행과 별로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에 대한 괴테의 풍부한 지식을 표현할 뿐이다. 여기서 인조인간은 영혼을 찾다가 부서진다.

제 3막은 헬렌의 남편인 스파르타의 미넬라우스 왕 궁전이다. 트로이를 함락한 미넬라우스는 헬렌을 되찾아 돌아온다. 그런데 변장한 메피스토가 헬렌을 꾀어 게르만 군대의 왕초 파우스트에게 넘긴다. 결국 중세 게르만의 영웅과 고대 그리스 미녀가 결합되어 그 사이에서 (시인 바이런을 묘사했다는) 오이포리온(Euphorion)이 태어난다. 조숙한 천재 오이포리온은 쾌활하고 개성이 강하며 싸움을 좋아하여 그리스 독립전쟁에 뛰어들더니 육체가 증발하여 사라졌다. 헬렌도 뒤를 따라 저승으로 가버렸고 파우스트는 그녀의 껍질(겉옷)만 쥐고 있다.
고대 그리스 여행을 통하여 풍부한 이상을 갖게 된 파우스트는 제 4막에서 향락이 아닌 봉사활동으로 기쁨을 얻으려 한다.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여러 사람의 농지로 만들려는 프로젝트를 세우고, 황제를 도와 라이벌을 물리친 뒤에 그 보상으로서 토지를 입수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중과 자유로운 토지에서 사는 인생’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정신적 만족을 얻는다.
제 5막의 파우스트는 100세가 됐고 메피스토 때문에 눈까지 멀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그때에야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다. 그 순간을 느낀 파우스트는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외친다. 이때를 기다리던 메피스토는 약속대로 그의 영혼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파우스트가 향락이나 물질적 욕심으로 얻은 만족이 아니고 파우스트는 최후까지 시련을 이겨낸 셈이라서 악마의 승리가 아니라는 판결이 나온다. 메피스토는 불만을 토로하지만 천사들이 나타나 악마를 쫓고 꽃을 뿌리더니 옛날의 그레트헨이 나타나 성모에게 그의 영혼 구제를 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
이 대작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여자의 순수한 사랑이 죄 많은 남자를 구한다는 느낌이다. 괴테와 함께 이 주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은 60여 년 뒤에 나타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다. 그러니까 아마 게르만 민족인지 독일 남자들인지가 옛날부터 좋아했던 전통적 믿음이거나 아니면 여자를 몹시 밝히던 괴테가 자신의 ‘바람둥이 행각’을 변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신화의 뮤즈 등을 참고하여 만든 주제인데 나중에 역시 여자를 밝힌 바그너가 배워서 썼는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 자료와 작품들이 넘치듯이 괴테와 ‘파우스트’에 관련된 자료도 너무 많아서 모두 알기 힘들다. 특히 금년(2004년)은 괴테 탄생 250주년 되는 해라서 독일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여러 분야에서 갖가지 괴테 이벤트와 상품을 내놓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3-4월에 괴테 연극제, 괴테 콘서트, 괴테 심야 영화제를 묶어 괴테 페스티발을 열었다. 이 중에서 괴테 연극제는 ‘파우스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스텔라’를 ‘입체 낭송극’ 형식으로 했다. 이건 배우들이 무대에서 대본을 보며 읽는 것이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극이 아니다. 하긴 배우들은 그 긴 대사를 외울 필요가 없고 제작자는 세트니 엑스트라니 안 쓰니까 돈 안 들어서 좋다. 오페라도 공연하기 힘들 때는 ‘콘서트 형식’이란 방법으로 세트 조명 의상 없이 주요 가수들만 나와서 주요 부분만 악보를 보며 노래한다.
‘파우스트’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물론 제대로 한 공연은 없다. 1995년 이윤택이 제 1부의 요점만 간추린 소극장 연극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에 윤주상, 윤소정, 장두이가 출연했다. 1996년에도 역시 제 1부 줄거리만 살린 ‘파우스트’에 유인촌과 송채환이 출연했으며 1997년 국립극단에서 다시 간추린 제 1부 공연에 장민호와 신구가 출연했다. 요즘도 별별 퓨전(?) 연극이나 뮤지컬이 파우스트 아니면 메피스토의 이름을 달고 자주 공연되는데 모두 제 1부를 요약한 버전들이다. 외국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파우스트’를 소재로 했다. 하이네(Heine)의 시와 토마스 만(Mann)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도 있고 유명한 희곡으로만 골라도 약 30편정도 된다. 괴테와 말로우 외에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영국 여성작가로 (아가사 크리스티 비슷하게) 추리소설과 희곡을 (또 유태인을 비난하는 글을) 많이 쓴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 1893-1957)의 희곡 ‘극심한 벌’(The Devil to Pay, 1939년)이며 내용은 역시 추려낸 ‘파우스트’ 제 1부다.

뮤지컬 연극과 컬트영화(1986년)로 유명한 ‘공포의 꽃가게’(Little Shop of Horrors)는 1960년의 공포영화(The Little Shop of Horrors)를 다시 만든 작품들이며 모두 로저 코먼(Roger Corman)이 제작했다. (1960년 영화에는 무명의 잭 니콜슨이 단역으로 나온다.) 오리지널 공포영화는 뮤지컬 코미디로 변하면서 훨씬 더 재미있어졌다. 꽃가게의 젊은 주인이 우주에서 온 신기한 꽃을 이용해 사업도 이루고 사랑도 얻으려 하지만 이 꽃은 사람의 피를 먹고사는 괴물이다. 이 줄거리를 잘 살펴보면 바로 현대판 ‘파우스트’가 보인다.
‘파우스트’라는 이름이 들어가거나 관계있는 영화는 무려 60편인데 그 중에는 괴테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판타지 영화나 공포영화가 더 많고 권할 만한 작품은 몇 안 된다. 1926년 독일의 무르나우(Murnau) 감독이 만든 ‘파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지만 특이한 화면의 멋을 자랑하는 유명작품이다. 1960년 독일 피터 고르스키(Peter Gorski) 감독의 ‘파우스트’는 연극 공연을 그대로 찍은 듯한 영화로 정통파 독일 연극배우들이 오리지널 스토리를 잘 살린 작품이란 의미가 있다. 1994년 체코의 얀 스방크마제르(Jan Svankmajer) 감독이 체크어로 만든 ‘파우스트’는 지나치게 인형을 많이 사용하는 느낌인데 그래도 괴상한 거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게 볼 것이다. 2000년에 베를린의 아레나 극장에서 파우스트 앙상블의 ‘파우스트’ 공연이 있었고 이것을 TV에서 녹화하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라는 제목으로 방영했으니 어쩌면 독일에 비디오로 나왔는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영화는 없느냐고? 유명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빈센트 미넬리(Minnelli) 감독이 영화로 만든 ‘밴드 웨건’(The Band Wagon, 1953년)은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흔한 뮤지컬 코미디지만 그 속에 현대판 ‘파우스트’ 쇼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브라이언 드 팔마(De Palma) 감독의 뮤지컬 영화 ‘천국의 악마’(Phantom of the Paradise, 1974년)도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스토리다. 우리나라에 ‘파우스트’라는 제목으로 나온 리즈와 버튼의 DVD는 1967년 영국에서 만든 영화다. 리차드 버튼이 주연과 감독을 맡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여러 여자 역을 맡았는데 괴테가 아니라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희곡 ‘파우스투스 박사’(Doctor Faustus)를 각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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