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조지 오웰 '동물농장'

clint 2018. 5. 12. 09:49

 

 

연극 “동물농장”이 끝났을 때 눈물을 조금 흘렸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박수를 칠 수도 없었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딸기코 존즈의 집을 통해 바라보았던 광경 속에 내가 있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더 말할 수 없을만큼의 부끄러움을 남겼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대로라면 나는 그들을 냉철히 바라보고 현실을 비판해야만 했는데, 나는 그들과 내 자신을 동화시켰다. 그리고 나는 부끄러워했고 슬퍼했다. 하지만 가슴을 쓸어내리고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나는 적어도 반성하지 않았던가.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미련한 삶의 자세는 없다.

 

 

 

 

밥도 주지않고 혹사시키는 주인 딸기코가 운영하는 동물농장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수령인 늙은 돼지는 “이 땅의 동물들아”를 부르며, 모든 동물들이 평등해질 수 있는 세상을 동물농장 일원들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더 말할 것 없는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반란은 성공했고 딸기코는 농장에서 쫓겨났다. 문제는 그 후부터이다. 돼지들은 우유와 설탕을 다른 동물들에게 주지 않고 자신들의 몫으로 여겨 탐한다. 게다가 돼지들 내부에서조차 나폴레옹을 따르는 파와 스노우볼을 따르는 파가 갈등하고 결국 세가 약한 스노우볼은 농장밖으로 쫓겨난다. 나폴레옹은 스노우볼을 쫓아낸 이후에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차례대로 숙청한다.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하여 네발달린 짐승이면 모두가 평등했던 세계에 새로운 계층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신성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위대한 나폴레옹 동지는 동물농장의 일원들에게 작업을 할당하고 채찍으로 감독한다. 그들은 더 이상 평등하지 않았다. 튼튼했던 말 복서는 그러한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좀더 지혜로운 늙은 암말 클로버는 그에 대응할만한 조직을 세우고 세력화할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백치 같은 흰 암말 몰리는 그저 힘든 일이 싫을 뿐이다. 늙은 당나귀 벤자민 역시 현재 세태에 한숨 쉬지만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다. 결국 그들은 나폴레옹과 그의 심복인 달변가 스퀴얼러의 강압적인 조취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결국 복서는 장시간 지속된 힘겨운 노동으로 인해 폐기처분되고 그런 그를 동물농장의 일원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나마 힘이 되었던 풍차(그들 스스로가 힘들게 건설했던)도 동물농장 밖의 인간들에 의해 스러져간다. 스러져간 풍차 앞에서 “이땅의 동물들아”를 불러보지만, 이제 그 노래는 혁명의 찌꺼기처럼 여겨지고 결국 나폴레옹과 돼지 무리들에 의해 금지되어진다. 그런 그들 앞에 만취한 돼지들이 보인다. 어느 순간부터 딸기코의 집에 살기 시작한 돼지들은 적이라 규정했던 두발 달린 인간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푼다. 이제는 더 이상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분간해 낼 수 없었다.

 

 

 

 

 

조금 거창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해본 이유는 내 스스로가 동물농장에 대해 정리해 보고싶은 욕심이기도 했다. 딸기코 존즈=러시아 황제, 나폴레옹=스탈린, 스노우볼=트로츠키, 돼지들=볼셰비키, 복서=프롤레타리아, 동물반란=붉은 혁명, 동물학살=스탈린의 트로츠키 숙청, 풍차=소비에트연방의 5개년 계획, 이땅의 동물들아=인터내셔널가, 딸기코의 집=크렘린궁…이미 수없이 많은 평론가들과 원작자 자신이 스스로 표명했듯이 동물농장에서 등장하고 벌어지는 많은 것들은 20세기 초, 중반의 러시아 상황들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이 역사 이래 최고로 훌륭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훌륭하게 표현된 우화적인 장치들도 크게 역할했겠지만 그보다도 권력과 권력을 중심으로 한 불평등한 세력관계의 형성, 그러한 것들을 타파해나갈 구심점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을 최대한으로 연장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소외당하고 착취당한다. 그런 권력이 신성화되고 제멋대로 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선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부분이기도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힘의 결집은 그 누구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것이다. 힘을 모으지 못하고 체념하고 눈물 흘리는 동물농장 일원들을 함께 풍자한 오웰의 의도는 바로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으지 못한 부분에 대한 비난처럼 느껴진다. 일신의 안정을 위해 힘은 두 갈래, 세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지고 결국 그들이 피땀으로 일궈낸 자유는 박탈당하게 되고 만다. 어떤 분의 글을 하나 읽었다. 변화하는 현실에 부합하지 못한채 사회적인 모순만 탓하고 있는 것은 너무 비열한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 나는 분명히 사회적인 모순을 탓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모순이 우리가 아닌 당신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인정하고 넘어갈 것은 사회에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하는 모든 모순에 어떤 누구조차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제대로 살 궁리를 해내야하는 것이 인간 아니었던가? 그냥 손 놓고 있는 것을 인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연극 “동물농장”의 기본적인 주제와 구조는 조지 오웰의 원작을 바탕으로 더욱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일단 그 점이 마음에 든다. 고등학교때 읽고 대학때 다시 한번 읽었던 오웰의 “동물농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값어치가 있고 문학적 깊이 또한 그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미학과 현실의 정치가 완벽하게 재현된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동물농장 project의 차기 작품들에서는 또 다른 관점으로 표현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배우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이 정말로 노력가라는 점이었다. 너무나 훌륭한 안무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하나하나들은 작품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한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는 구성을 바라볼 때 저렇게까지 만들려면 얼마나 노력했을지 안봐도 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성실하게 작품을 만들어낸 그들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객석의 1/3도 채워지지 않았다. ㅜ.ㅜ) 인공적인 음향은 전혀 첨가되지 않았다. 모든 배경음악과 효과음들은 배우들의 입과 몸에서 시작되어 입과 몸으로 끝났다. 정말 마음에 드는 점이다. 요새 연극들은 기존 음악을 너무 많이 쓰고 게다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음악들을 집어넣어 오히려 소음처럼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의상과 분장 역시 동물들의 특징을 분명하게 나타내주고 각각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고 아주 세밀한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에 있어서까지 작품 전체적인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함, 그 자체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여러 번의 전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너는 비현실적이야.’, ‘세상을 좀 바라보렴.’ 이라고 누군가 나를 비웃으며 말해도 나는 맑스처럼, 레닌이 형님이라 불렀다던 고리끼처럼 살고 싶다. 차기 동물농장을 보게 될때쯤, 아니 그것이 너무 이르다면 동물농장의 마지막 project 블루를 보게 될때쯤이면 딸기코 존즈의 집 창문에 나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노력해야 한다.
<동물농장>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들어 있다. 그래서 반공주의 소설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재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실제로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서 생긴 사건에 기반한다.
조지 오웰은 한동안 영국 독립 노동당(ILP)의 당원이기도 했던 좌파였지만, 스탈린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에스파냐 내전에 참가한 이후로는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오웰이 우크라이나어판 서문에 쓴 '지난 10년 동안 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해서는 소비에트 신화를 파괴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실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에서 그의 집필의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소련의 성립부터 소련이 가진 모순을 간파하였고 결국 소련의 붕괴에 의해 그의 시선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조지 오웰은 이 작품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메이저 영감에, 스탈린은 독재자 돼지 나폴레옹(Napoleon)에, 그의 반대자 트로츠키를 경쟁자 돼지인 스노우볼(Snowball)에 비유했다. 스탈린의 비밀 경찰은 개, 옛 소련공산당의 당원은 돼지로 비꼬았다. 또한, 쫓겨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농장주 존스(Jones)로, 스탈린을 광신적으로 따르는 우매한 민중은 양, 종교는 까마귀에 비유했다. 그러나 굳이 '동물농장'의 상징을 러시아 혁명과 소련으로만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나폴레옹을 히틀러, 스퀼러를 괴벨스로 비유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느 시대 어느 정치에서도 그러한 인물들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은 근원적인 비극이면서 동시에 '동물농장'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이다.

 

 

 

오웰은 2차 대전 직후 영국의 친소적 분위기 때문에 이 소설의 출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서문에 쓴 바 있다(이 서문은 후에 발견된 것으로 원 작품집에는 없다). 오웰의 책들을 출간해주던 골란츠 출판사는 소련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였으므로 당연히 거절하였고 조나단 케이프사는 영국 관리의 전화를 받고 출판을 철회했다. 페이버 앤드 페이버 출판사와 미국 출판사 한 곳 역시 명료하지 않은 이유로 거절하여 결국 섹커 앤드 와버그 출판사에 의해 간신히 출간되었다.  동물농장은 오웰의 작품 중 유일하게 유머가 가득한 작품으로 봐도 좋은데 이것은 그의 부인 아일린 오쇼네시의 영향이라고 한다. 오웰은 그녀와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면서 동물농장을 썼고 그 결과 드물게 대중친화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아일린의 죽음 이후에 쓴 1984는 동물농장에 비해 훨씬 묵시록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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