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게오르그 뷔히너 '당통의 죽음'

clint 2018. 5. 11. 16:27

 

 

 

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시대의 혼란과 격변기를 살며 그릇된 상황을 지적해내고 , 새롭고 보다 나은 질서를 제시 , 그것을 행동으로 요구했던 수많은 혁명적 인간상을 만나곤 한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와 더불어 독일 사실주의 문학의 새로운 장을 마련했던 게오르그 뷔히너(Georg Büchner ,1813~1837)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뷔히너는 24년 이란 짧은 생을 살면서<당통의 죽음 Dantons Tod>,<레옹세와 레나Leonce und Lena>,<보이첵 Woyzeck>등의 세 편의 희곡과<렌츠 Lenz>라는 한편의 소설만을 남긴 작가지만, 그는 많지 않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시대적 경험과 객관적인 시대상황을 그 어떤 작가보다 절실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은 문학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작가사후 60여 년이 지난 1902년에야 비로소 초연(初演)되는 비운을 겪는 곡절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이후의 정치적 과도기였던 1794년 3월 24일부터 4월 5일 까지, 다시 말해 극좌파인 에베르일파(Hebertisten)가 처형되는 날로부터 온건파인 당통 일파(Dantonisten)가 처형되는 날까지의 긴장감 도는 시기를 극화하고 있다. 작가 뷔히너는 전체 작품의 6분의 1을 역사원전(歷史原典)에서 그대로 인용 Ritschcer, Hans, Georg Büchner, Dantons Tod. Grundlagen und Gedanken zum Verständnis, Frankfurt a.M. 1981, S. 27. 류종영, 게오르그 뷔히너의 미학관, In, 뷔히너 문학 연구, 한국 뷔히너 학회편, 문학과 지성사, 1990에서 재인용. , 편집함과 동시에, 부분적으로 창작을 시도함으로써<당통의 죽음>에서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 성과를 이루어 냈다. 또한 역사적인 소재를 택함으로써 작가는 관객 또는 독자로 하여금 거리감을 갖고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좀더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도록 의도하였다. Vgl. 정지창, 뷔히너 문학의 서사성, In, 뷔히너 문학연구, 한국 뷔히너 학회편(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0), S. 25 .이 작품의 생성배경이 되는 시기의 독일 역사에서는 1830년 프랑스 혁명과 1848년 3월 독일 혁명사이의 3월 전기(Vormärz)라고 부르며, 문학에서도 이 시기에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독일은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7월 혁명의 성공으로 절대군주에 대한 저항기운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나폴레옹 전쟁(1805~1815)으로 인한 후유증과 대 불황, 흉년으로 농민의 고통이 극심했다.

 

 

 

 

이 작품은 뷔히너가 농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 전단 [헤센 급전]을 배포한 이래, 당국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망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약 4주간에 걸쳐 집필한 희곡이다. 뷔히너는 프랑스 혁명사에서 이 작품의 소재를 취했다. 그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마지막 국면, 즉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서로 첨예하게 대치하다가 로베스피에르 일파에 의해 당통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처형당하기까지의 약 10일 남짓한 기간을 그리고 있다.
24세의 나이에 요절한 독일의 천재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데뷔작이다. 4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뷔히너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당통이 내세우는 향락주의와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로베스피에르가 내세우는 공화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은유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줄거리
당통, 데물랭 등은 로베스피에르가 내세운 공화정 이념에 휘둘리지 않으려 한다. 민중 사이에는 혁명 뒤에도 지속되는 가난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파를 숙청하려고 한다. 당통 일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쥘리는 자신의 집에서 독약을 마시고, 남편과 떨어질 수 없었던 뤼실르는 마침내 미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치고 공화국 시민에 의해 체포된다.
자신이 열렬하게 추진해 온 혁명에 의해 희생당하는 당통이 이 작품의 중심인물이다. 더불어 당통의 처형을 계획하고 추진해 가는 로베스피에르도 중점적으로 묘사된다. 처음에 당통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카드놀이를 즐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통은 혁명의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혁명은 이제 끝나야 한다. 남을 단두대에 보내기보다는 내가 차라리 처형되겠다." 당통이 계획하고 추진해 온 혁명의 결과, 즉 민중의 삶의 변화는 혁명 전이나 혁명 후나 별반 다르지 않다. 민중이 혁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혁명이 민중을 만든 것이며 역사라는 철사줄에 묶인 채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인 민중의 실태를 이해하면서 당통은 괴로워하고 파탄지경에 빠진다. 당통은 권태와 피곤함에 빠져든다. 이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쾌락의 추구뿐이다. 당통이 추구하는 쾌락은 로베스피에르 측에 의해  부도덕하고 타락한 혁명가, 죽어야 할 인물의 증거로 내세워진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했으며, 권력투쟁에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간 역사의 극적인 인물이다. 24세로 요절한 게오르크 뷔히너(G. Buchner)는 이미 한 세기 반을 먼저 살다간, 한국으로 봐서는 먼 이역 독일의 작가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의 <당통의 죽음>을 보노라면 그가 전혀 낯선 먼 나라, 19세기 작가 같지 않고 아주 우리 가까이에 살고 있는 현대 의식의 인물로 느껴진다. 그만큼 뷔히너는 천재적 작가이며 그 천재성은 의식에 있어서 아주 현대적이며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뷔히너가 문학활동에 관여한 것은 오직 2년(1834-1836)간이었고, 작품으로도<당통의 죽음>외에<보이체크><레옹세와 레나>정도인데도 그의 이름은 문학사 속에서 영원하다.
대학로극장의 개관기념으로 공연되는<당통의 죽음>은 바로 우리 시대가 일종의 과도기 내지는 혁명기를 방불케 한다는 사실과 연결될 수도 있다. 시대적·사회적으로 이른바 민중의 힘에 의한 공화국 건설을 공공연히 내걸고 과격한 구호와 전단이 뿌려지는 현황은 어쩌면 1830년대 독일 헤센 지방의 사회운동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150년을 뒤진 이 과격한 정치·사회운동은 봉건적 전제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적·종교적 사상으로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이며, 그것도 붓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제4계급에 의한 힘의 실현으로 이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혁신을 위해 스스로 ‘헤센 급사(急史)’라는 팸플릿을 뿌리며 압제에 대항하는 민중의 봉기를 준비했던 뷔히너는 기적적으로 탄압에서 벗어나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된다. 시인으로, 의사로, 자연과학자로 살려던 그의 꿈은 조숙한 천재의 꿈으로 남고 망명지이자 수학의 땅이었던 스위스 취리히의 호수를 내려다보는 초원의 프로이센 거리에 나직한 돌기념비만으로 남아 있다.
뷔히너에 의하면 삶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 한다. 삶의 목적이 발전인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발전인 것이다. 삶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는 작가가 지닌 천성에 달려 있다. 천성대로 삶이 발전하는 것이 삶 자체의 목적이다. 삶은 그 외 다른 범주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요절한 천재작가의 철학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독재나 전제주의는 삶의 진정한 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왜곡시킨다. 역사도 하나의 생명체처럼 흐르는 것으로 발전·전개된다.

 

 


프랑스혁명을 보는 뷔히너의 시각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혁명을 완성시키고 나서 당통은 권태롭다. 발전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역사도 멎고 자기의 삶도 멎어 버린 것 같다. 그 권태를 이겨내기 위해서 혁명의 제단에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는 이 엄청난 ‘조숙함’을 알아 주는 동지도 없다. 그래서 더욱 권태로운 당통은 권력투쟁의 형식을 빌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신 처형당하는 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이런 주제가 갓 스무 살의 풋내기 문학청년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믿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미 150년 전에 이러한 주제가 ‘열린 형식의 드라마’로 씌어졌다는 사실에 아연해진다. 지금은 열린 형식, 곧 결말을 맺지 않은 양식의 연극을 개방 희곡의 연극이라 부르고, 고전주의나 자연주의 양식에 의해 3막, 5막 등 완결을 보는 연극은 폐쇄 희곡에 의한 연극이라 하지만 19세기에 이미 열린 형식의 희곡을 남긴 뷔히너는 특이한 존재임이 확실하다. 개방 희곡을 우리는 서사극 양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서사극 형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연극적 흐름을 이해하고 있다.
대학로극장은 소극장이고 프로시니엄 무대일 수 없는 극장 조건 때문에 서사극 형식이 스피디한 진행을 위해 알맞다 할 것이다. 실제로 연출(김철리)은 막힘 없는 빠른 템포로 연극적 흐름을 트여놓는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산만하고 평면적이라서 지루해지기 쉬운 서사극 형식을 우선 볼 만한 ‘거리·마당’의 단편들로 압축시킨다. 서사극이 대체로 모자이크 형식이라거나 콜라주 형식이라는 것은 그러한 부분적인 단편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거리·마당’의 집합을 통해 전체상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그런 점으로 보면 현대극장의<당통의 죽음>은 부분적인 형성과 전체적 통합에서 열린 형식의 드라마를 비교적 잘 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작품이 빛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순전히 연기진의 미숙함과 주제해석 능력의 부족에 있다 할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폐쇄 희곡이라는 닫힌 형식의 드라마에 익숙해진 생리로서는<당통의 죽음>같이 열린 형식의 드라마에 실린 줄거리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대체로 서사극이라는 것은 이름만 서사극이었을 뿐 산만하게 늘어놓기만 하고, 마무리가 없는 희곡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알 수 없을 경우도 허다하다. 실제로 필자 전공이기 때문에 읽어보아도 뷔히너의 작품들이 그렇게 유명해진 내력을 잘 알 수 없다면 내 몰취미 탓이겠지만 독일 라이프치히 극장에서 관람한 ‘독일극단’의<당통의 죽음>은 연극으로서는 아주 선명하였다. 그 작품을 연출한 알렉산더 왕은 철저하게 콜라주 형식의 형성에 치중해서 단편과 부분의 형상화에 성공했으며, 거기에다 열린 형식의 드라마가 갖는 공개된 질의와 답변으로 관객이 생각하게 하는 개방 희곡의 연극은 마침내 연기자의 연극이 된다. 연기자들이 선명하게 연기해내지 않으면 모자이크 형식의 콜라주 형식이고 서사극이고 간에 형상화되어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3막, 5막 등 집약된 형식이 아니라 방만해 보이는 조직 때문에 그 조직을 끌어당기는 연기의 숙달이 없고 보면 열린 형식의 드라마인 개방 희곡은 연극적 집중력을 유지시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3시간 이상 걸릴 원작을 두 시간 정도로 줄이고 40여 명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20명 이내로 줄이는 작업 등으로 해서 연극적 형상화에 무리가 간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리를 무대 위에 드러내지 않은 연출력에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을 유연하게 이어나감으로써 장면들 사이의 공백을 메워나간 솜씨를 평가하면서 랑의 연출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독일극단’의 뛰어난 연기자들 탓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면 서사극·연대기적 편성의 드라마투르기를 지배하는 한 사람의 관점, 곧 연출가의 관점이 변증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점으로 서술되는 방법의 확산이 보다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는 무대가 현대극장의 ‘대학로극장’ 개관 기념공연<당통의 죽음>이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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