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최초의 작품 <군도(Die Rauber)>의 착상은 1777년이었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 18세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공작이 경영하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었으므로, 원고를 극비리에 집필하면서 한편으로는 우수한 학생으로서 논문 <인간의 동물적 성질과 정신적 성질에 관해서>를 작성하여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 1780년 가을, 드디어 학교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겨우 17그루텐을 받으면서 슈트트가르트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직장에 없었으며, 부지런히 <군도>의 원고를 완성시켜 1781년 5월에 자비로 출판하였다. 아무도 무명작가의 작품을 출판해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품의 평판은 불과 몇 주일 동안에 실러의 이름을 전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떨치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 그것이 만하임에서 상연되었을 때는 공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뒤이어 그 성공에 따라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차례차례 상연되었다. 특히 실러 자신의 의외로 생각한 것은 그 희곡이 바로 오이겐 공작의 근거지인 슈트트가르트 시에서 공공연하게 몇 번이고 상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끈 사실이었다. 실러는 그 희곡을 쓸 때에 대단한 결심을 하였던 것이고, 자기 친구에게 서신으로 심중을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경우에 따라 그 작품 때문에 영영 고향과 가족을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도 했다. 물론 그 작품의 내용이 공작에 대한 반항을 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도(群盜)>의 주제는 사회악에 대한 도전, 압제 인습에 대한 반항, 자유와 이상에 불타는 정의감 등에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열혈청년 실러 자신의 기백이 그대로 숨 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공국(公國)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탄압정치를 정면으로 공박하고, 그와 같은 탄압정치에 대하여 무력하게 아부, 굴복하는 동시대인에 대해서까지 신랄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대체로 실러의 희곡은 그 후기의 작품에서 내적(內的)자유의 추구가 많은데 비하여 그의 초기의 작품에서는 외적(外的)자유를 좇는 경향이 강하였다. 특히 여기 <군도>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쉬투룸 운트 드랑 정신에 가장 투철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순진하고 용감한 주인공 카알은 자기의 친동생 프란츠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집을 쫓겨나고, 순정을 짓밟히게 되자, 마침내 속세에 반기를 들고 도적단의 두목이 되어, 주먹과 실력으로써 썩은 사회를 개혁하려 든다. 그의 넘쳐흐르는 격정은 비열과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하고, 상대자가 왕후(王候)이건 승려(僧侶)이건, 또는 자기 자신의 부하이건 그 자리에서 처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한편 그와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대표인 동생 프란츠는, 모략과 중상에 능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도 희생시키기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부친을 속여서 형 카알을 모함하고 나중에는 부친마저 쫓아버리고 자신이 영주가 되어, 무서운 탄압정치를 시행한다. 저자가 여기서 모델로 오이겐 공작을 암시한 것을 두말할 여지가 없다. 결국 악은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것이어서 프란츠는 갖가지의 악행 속에 그 무서운 보복을 받는 날을 맞이하게 되며, 카알도 그 동기는 동정할 여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희생자 아말리아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의 값을 받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에 대한 벌을 달게 받고, 파괴된 사회의 질서를 보상하려는 카알의 태도는 또한 실러 자신의 독특한 도덕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카알은 마지막 장면의 독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폭격으로써 아름답게 할 수 있고, 국법(國法)을 유린함으로써 국법을 바로 잡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럽혀진 국법을 다시 보상하고, 어지럽혀진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 질서가 침범될 수 없는 존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인간 앞에 전개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 희생이 될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다. 난 그 질서를 위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진해서 국법의 제재를 받으러 가는 것이다.

<群盜>가 독일 전국에서 상연되어, 공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은 먼저도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이 오이겐 공국(公國)의 영토 내에서까지 상연이 허가된 것은 공작이 그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비방하는 것인 줄은 모르고, 다만 자기의 영토 내에서 그와 같이 명성이 높은 인물이 나왔다는 것을 기뻐하는 단순한 허영심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언제까지나 알려지지 않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고, 더구나 실러는 그 후 계속해서 공작을 비방하는 시를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경을 자극한데다가, 드디어 그가 군의관으로서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공국 외의 만하임 시로 <군도>의 상연을 구경 갔던 사건으로 공작의 분노를 사서 처벌까지 받게 되었다. 2주일 동안의 영창과, 공국 밖과의 교류 단절 및 일체의 문예활동을 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러로서는 문필생활을 단절한다는 것이 곧 자기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인 음악가 쉬트라이히와 공모하여 만하임 시로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때로부터 실러의 고난인 방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믿고 찾아간 국민극장의 달베르크마저 오이겐 공작을 꺼려서 실러를 받아주지 않았으므로, 공작의 체포를 면하게 위하여 부득이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마이닌겐으로 여비도 없이 방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기의 처녀작 <군도>가 독일의 전토에서 상연될 뿐 아니라, 멀리 프랑스의 파리에서까지 번역되어 상연되는 처지의 천재작가 실러가, 끼니조차도 없어 못 먹는 비참한 궁핍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것은 (그는 그 후에도 계속적인 경제적 고통을 받았음)기이한 일이라고 할 것이며, 사회적으로나 문필생활에 있어서나 항상 좋은 조건에만 있었던 그 당시의 괴테와 비교할 때에 너무나 심한 대조인 것이다.

<군도>에 대해서는 이상 이야기한 것같이 절대적인 인기가 있었던 반면에, 또 여러 가지 결점과 비난을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 작품에 대한 무수한 비난 가운데 꼭 한 가지 들어맞는 것이 있다면 감히 내가 20에 인간을 묘사하려고 주제넘게 덤볐다는 사실이다.'고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나이 20미만의 청년으로서 인생에 대한 별 체험도 없이 그와 같은 작품을 썼었다는 것 자체에 큰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카알의 애인 아말리아의 묘사에 있어서도, 자기 어머니 밖에 잘 아는 여성이 없었던 당시의 실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상에 의거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점이 또한 괴테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괴테의 작품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괴테는 그보다도 퍽 나이 어려서부터 수많은 여성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군도>의 결점으로 전후 연결의 부자연성이라든지, 비극의 동기의 미흡, 대사의 딱딱함, 시간과 장소의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운위되지만, 실제 상연에 있어서 이 작품은 그 같은 비판의 여유를 주지 않고 처음부터 긴장된 가운데 관객을 박력 있게 끌고 나가는 것이다. 극적 구성 면에 있어서도 두 개의 대립되는 힘이 직접 맞부딪치지 않게 하여, 파라렐로 사건을 진전시킴으로써 점차 무르익어 가는 대폭발을 관객에게 예지(豫知)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그 효과를 크게 하는 수법이 사용되어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몇 편을 읽었을 뿐, 연극이라곤 도무지 본적도 없는 청년 실러로서, 그와 같은 재주를, 더욱이 처녀작에서 발휘한다는 것은 그가 천성의 희곡작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 후 실러는 만하임 극장에서 전속 각본가로 채용되어 당장 호구지책은 생겼으나, 거기서 받는 근소한 수입으로 경제적인 고통은 별로 완화되지 못하였다. 한편 창작에 있어서는 활발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이미 탈출 전에 착수하였던 <피에스코의 반란>이 발표되고 동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1883년, 실러 24세 때이다. 곧 이어 다음 해는 명작희곡 <간계와 사랑(Kbale und Liebe)> (1784)이 발표되었는데 그 곡(曲)의 무대효과는 처녀작 <군도>를 오히려 능가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지위가 높은 어느 귀족의 아들 페르난트와 시민 계급의 딸 루이제 사이의 계급을 초월하는 청순한 사랑이 테마로 되어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정략결혼을 시켜서 자신의 출세를 꾀하려고 하여, 루이제를 노리는 간악한 그의 비서와 짜고 모략에 아들 페르디난트는 속아서 자기 애인을 독살한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자신도 자살하며, 그 모략을 꾸민 사람들도 모두 멸망해버리는 줄거리이다. 이 작품에서도 실러는 <군도>에서 처럼 제재를 당시의 독일에서 취해 귀족정치의 부패와 무기력한 인습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고 있으며, 신구 두 세대의 대립과 계급의 차별로 희생되는 인간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작가 자신의 체험이 농후하게 깔려 있을 뿐더러 시대상과 향토색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그의 초기의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리얼리스틱한 특색을 보여준다.

실러(Friedrich Schiller)는 1755년 11월 10일, 우연하게도 마르틴 루터와 동월 동일에, 비텐베르크의 소도시 말바흐에서 태어났다. 본래 실러의 집안은 전통이 있는 구가(舊家) 였지만 부친이 박봉을 받는 군의관이어서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함을 면치 못하였다. 실러의 형제는 모두 여자들뿐이므로 그에 대한 부친의 촉망은 대단히 컸으며, 더구나 자기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한 두뇌의 명석이 아들 실러에게서는 꼭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귀한 아들이 교육도 환경상 애로 때문에 제대로 못 시키는 형편이었으며,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순전히 모친의 손에서만 자라났던 것이다. 괴테처럼 아주 어려서 부터 교양 있는 부친의 이상적인 훈도 밑에서 성장했다는 것과 같은, 좋은 환경과는 아주 대조적인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러의 모친은 선량하고 경건한 부인이었으나, 여관집 딸로서 별로 교육이 없었고, 고지식하고 건실한 부친은 부대를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고 가정에는 머물러있는 날이 얼마 안 되었다. 실러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이사한 소도시 톨히는 유서 깊은 곳이어서 그가 어려서부터 역사적인 분위기에 잠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듣게 된 목사 모저의 설교는 그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2년 후에 다시 그 가족이 루트비히스부르크로 이사함에 따라 그도 거기서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엄격하고 기계적인 학교교육에서도 근실한 소년 실러는 우수한 성적으로 많은 상장과 영예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가 다니던 라틴어학교의 졸업이 가까웠을 무렵, 양친은 그에게 속하여 고등교육을 시키려 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간섭이 생겨서, 그는 자신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때 비텐베르크의 영주(領主)였으며, 실러 부친의 군주(君主)이었던 카알 오이겐(Kar Eugen) 공작은 그 당시 종종 볼 수 있는 폭군형의 군주이어서 영토는 적었으나, 자기 영내에서는 절대적인 지배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주관적인 무리한 정치를 하여,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수가 비일비재하였으므로, 아무리 참을성이 많은 비텐베르크의 사람들도 나중에는 좀 더 합리적인 정치를 할 것을 황제에게 상소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이 어쩌다가 마음이 내켜서 국민들을 위한 시정을 하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주민에게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수가 있다. 그 하나의 예로서 오이겐 공작의 교육사업이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슈트트가르트의 교외에 있는 별궁에다가 하급장교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원을 세웠는데, 나중에는 그것을 카알 고등학교라고 개칭하고 영토내의 관리와 사관의 자제 중에서 유능한 청소년을 선발하여 입학시켰다. 거기서는 극단적인 엄격한 군대식 훈련과 과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주입식 교육이 시행되었으며, 물론 장래의 충성스러운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공작 자신이 매일같이 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에게 직접 상벌을 주고 밀고제도로써 성격과 동정을 살피는 형편이었다. 실러도 공작의 눈에 띄어 강제로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전공과목도 공작의 의도로 법학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실러는 끝내 그 과목에 흥미를 가질 수가 없어서 성적도 올리지 못하고 나중에 간신히 의학으로 전과하는 허가를 얻었다. 그와 같이 조그만 자유도 주지 않는 환경이 그에게 오히려 강력한 자유에의 투지를 발생시켰으며, 문예서적은 전혀 못 읽게 하는 엄중한 감시가 오히려 그의 문학에 대한 정열을 부채질하여, 당국의 눈을 피해가며, 셰익스피어, 레싱, 크롭시토크, 루소, 괴테의 여러 작품을 탐독하고, 그 당시의 주요한 문예운동인 쉬트름 운트 드랑 운동에 공명하게 했다. 특히 사상 면으로는 루소의 영향이 컸으며, 자기 자신이 부자연한 탄압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와 자연이라는 두 개의 모트는 그대로 그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 중심 사상은 그의 초기 작품, 특히 군도(群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실러는 그 후 만하임 극장과의 계약에 따르는 제3의 신작으로 희곡 <돈 카를로스(Don Carlos)>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는 도중에 발병하여 또 다시 극도의 역경에 빠진다. 그때 그는 극장과의 계약마저 해약당하고, 부채에 쪼들리고, 더군다나 그 당시 사모하게 되었던 여성 로테까지 단념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비장한 결심으로 문필을 던지지 않고, 잡지 <타리아 (Die Rheinlsche Thalia)> (1785)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떠한 군주도 섬기지 않겠다. 지금은 오직 민중이 내가 섬기는 전부이다.' 그때 실러는 나이 26세의 청년이었다. 잡지 <타리아>에 게재된 <도덕적 시설로서의 연극무대>(1785)는 레싱 등의 계몽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실러의 목적론적, 연극론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하여간 그의 만하임 시절은 그의 생활의 위기이었던 동시에 하나의 중대한 내적 전환기이기도 하였다. 그가 고대 조각이 진열된 만하임 미술관 '고대조각 진열실'에서의 감격은 그의 그리스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점, 그 당시 알게 된 미모의 칼프 대령부인 샤를로테(Charlette von Kalb)에 대한 정열을 의지의 힘으로 극복하였다는 점 등은 그가 그때까지 한 줄기로 뻗어 온 쉬투룸 운트 드랑의 분방한 정열을 지향하고 세련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주는 것이었다. 정열과 의욕으로 시작한 잡지 <타리아>도 경제적인 난관으로 내지 못하고, 안팎으로 궁지에 빠진 실러에게 뜻하지 않은 방면에서 구원의 손이 뻗어 왔다. 그것은 아직 만난 적이 없는 키르너(Gottfried Korner)를 위시한 몇몇 실러의 팬들이었다. 그는 키르터의 권유로 만하임을 떠나, 드레스덴에 있는 키르너의 집에 가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지낸 우정과 이해의 즐거운 2년 간은 실러에게 청년기의 반항과 격정을 초월하게 하는 반성과 사색의 의의 있는 기간이 되었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에 전환을 일으킨 시기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에서 다시 복간한 잡지 타리아에 그가 실은 <철학적 서한>(1786)에는 자기 자신의 사상의 편력을 회고하고 앞길을 개척해나가는 노력이 완연히 나타나 있다. 세계를 긍정하고 인류애를 찬미하는 <환희의 노래 (An die Freude)>도 그때 키르너와의 단란한 생활에서 생겨난 노래였다. 그것은 유명한 베토벤의 <재9번 심니>의 합창곡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러의 드레스덴 시대에서의 커다란 수확은 <돈 카를로스>의 완성이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왕실을 무대로 한 역사극으로서, 그 이전의 다른 작품들과는 약간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는 자기의 약혼자를 부왕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 옛 애인에 대한 연정을 참지 못하고 고민의 날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친구 포자의 따뜻한 우정과 거룩한 희생 정신으로 드높은 인류애에 잠깨는 내적인 발전을 하여, 진실로 국민을 위한 시정가가 되려는 비정한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실러의 작품 경향을 보면 대체로 개인의 자유를 테마로 하여, 압박에 대한 반항이라든지 악에 대한 파괴적인 돌진 같은 것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는 하나의 형성된 보다 높은 이상향을 바라보는 건설적인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실러가 초기의 경향을 극복하고 휴머니티를 지향하는 새로운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도 발표되자 즉시 함부르크에서 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순차적으로 각지에서 상연되었다. 그리하여 실러의 명성은 바야흐로 괴테와 나란히 독일 문단의 쌍벽으로 빛나게 된 것이다. 그 후 (1787년, 실러 28세 때) 그는 당시의 문예의 중심지인 바이말로 옮겨 갔는데 괴테는 이미 12년 전에 그 곳에 와 있어서 비로소 양대 문호의 교류가 시작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상으로써 실러의 초기에 대한 소개를 마치는 바이지만, 실러에 대해서는 그 후 그가 바이말에 체류하면서, 남긴 많은 공적 - 그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연구, 미학과 문예의 비평, 괴테와의 교류 관계, 그리고 나중에 고전주의 문학으로 이르는 승화과정과 그 완성 등-이 더욱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가 그 후에도 피나는 정진과 노력 등에 신병으로 46세의 단명한 일생을 마칠 때까지, 후세에 남긴 주요한 작품을 골라 보면 대락 다음과 같다.
희곡 <군도 (Die Rauber)>. 희곡 <피에스코의 叛亂(Die Verschworung des Fiescos zu Genua)>. 1983). 희곡 <간계와 사랑(Kabale un Liebe)> (1784).단편 <범죄자(犯罪者) (Verbrecher)>(1786). 희곡 <돈 카를로스(Don Carlos, Infant von Spaanien)>(1787). 시(詩) <희랍의 제신(諸神)(Die Gotter Griechenland)>(1788). 시 <예술가(Die Kunstler)> (1789). 역사연구 <30년(年) 전쟁사(戰爭史)(Geschichte des Dreissigjahrigen Kriegs)> (1791). 논문 (미적(美的) 교육(敎育)에 관한 백서(Briefeuber asthethische Erixiehung es Menschen)> (1794). 논문 <소박문학과 감상문학(Uburnaive und sentimentarische Dichtung)>(1795). 희곡 <발렌시타인(Wallnsteinn)> (1799).희곡 <마리아 쉬트아트(Maria Stuart)>(1800).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 frau von Orleans)>(1801).희곡 <메시나의 신부(新婦)(Die Braut von Messina)>.(1803) 희곡 <빌헬름 텔(Wilhelm Tell)>(1804) 그의 최후의 희곡이 되었을 <데메트리우스>는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게오르그 뷔히너 '당통의 죽음' (1) | 2018.05.11 |
|---|---|
| 다리오 포 '도덕적 도둑' (0) | 2018.05.11 |
| 안톤 체홉 '곰' (1) | 2018.05.08 |
| 다리오 포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1) | 2018.05.08 |
| 하이너 뮐러 '헐값 노동자' (1) | 2018.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