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제/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
1백 50석 정도의 소극장에서 한 배우가 1인극을 하여 한 달 동안에 1만 명 이상의 유료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확실히 놀랍고 이상스러운 일이다. 그것도 연극 관객이 폭넓은 나라에서라면 몰라도 불과 2만명도 안 되는 우리 실정에 추송웅의 이번 공연은 기적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추송웅 ‘모노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분석될 수 있으리라. 첫째는 그의 무대배우로서의 개인적인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용모, 즉 희극적인 면과 비극적인 면, 허약함과 공포스러움의 양면성, 그리고 어딘가 한구석이 부족한 듯한 몸짓으로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연기가 ‘팬’을 만든다. 비록 그가 독특한 마스크에다 독특한 발성을 갖고 가장된 표현을 하지만 그래도 그는 무슨 작품의 무슨 역을 맡아도 독자적으로 해석·소화해 내는 문학적 감각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평범하지 않는 추송웅의 매력이 평소부터 많은 팬을 갖게 한 것이다…

카프카 원작 <빨간 피이터의 고백>은 추송웅이 혼신의 힘으로 만든 작품이다. 빽빽이 둘러싼 관객들의 열기와 추송웅의 온몸에서 풍기는 땀냄새가 짜릿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작품이 주는 감동이기에 앞서 연극예술을 만드는 예술가의 인간적인 열의가 주는 감동이다. 실제로 이 연극은 관객수나 추송웅의 열연에 비하면 작품 자체의 예술성은 그다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사람으로 바뀐 원숭이를 통해 변신이라는 주제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지만 우선 그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무대에 형상화시키기 위한 구조적인 설명조차 빈약한 편이다. 연기자 한 사람의 주관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제삼의 눈이 필요하다. 그것을 연출이라고 부른다면 추송웅의 경우에는 연출마저 스스로 맡고 나섬으로써 작품을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통로를 막았다. 그런 점에서 대국적으로 작품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추송웅은 오직 자신의 연기를 창고극장에 제물처럼 바친다. 그러니까 예술로서는 미진한 작품을 정성스럽게 공연함으로서 관객들을 전율하게 한 셈이다…

원숭이 ‘빨간 피터’가 학술원의 요구에 원숭이로서의 전생과 자신이 인간으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학술원 회원들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사냥꾼들에게 포획되어 배에 실린 시점부터 그의 보고는 시작된다. 포획된 ‘빨간피터’는 생애 처음으로 ‘출구’ 없는 상황에 놓여 졌고, 그는 ‘출구’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원숭이로 남기를 포기한다. ‘빨간 피터’는 자신이 인간으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침 뱉기, 악수, 술 마시기 등의 인간 관습을 흉내 내는 경험을 통해 설명한다. 또한 공중곡예사의 예를 들며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인습적인 아카데미의 정중한 어법을 노련하게 구사하며 대단한 능변으로 이 과제를 완수하는데...
‘빨간 피터’의 몸짓이나 격앙된 목소리는 그가 여전히 원숭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라는 증거들이다.
즉, ‘빨간 피터’는 ‘스스로 인간이 된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에게 잡혀 길들여진 ‘자유분방한 본성(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원숭이’일 뿐인 것이다. 카프카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빨간 피터’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억압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참된 자아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이다. 작품을 통해 우리 스스로에게 자아를 찾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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