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어울리지 않는 야외복에 반지와 목걸이를 주렁주얼 단 13살의 소녀 윌리가 철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고, 그것을 본 톰이 넘어진 윌리에게 가서 말을 걸면서 이 희곡은 시작된다. 윌리는 압류당한 아무도 없는집에 혼자 사는 13살의 소녀다.
그 전엔 부모님과 언니와 함께 살며 철도원들을 대상으로 방을 내주는 일을 했었는데, 엄마는 철도원과 눈이 맞아 도망가고 아빠는 실종이 되고, 그렇게 언니와 단둘이 살다가 언니는 폐병으로 죽게 된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그녀는 태연하게 톰에게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술술 풀어 나간다.
윌리는 학교를 그만 두고, 빈 집에서 연명하며 혼자 살고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나 개선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윌리는 화려했던 언니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언니처럼 자신도 살고 있다고 톰에게 말한다. 톰은 철길을 걸으며 계속 얘기를 들어준다.

희곡에서 나오는 백짓장 같은 하늘과, 탄광촌의 까만 느낌,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눈에 그려지는긋 하다. 한때는 북적거렸을 그 곳에 혼자 떠난사람의 유산을 몸에 지니며 사는 소녀 윌리. 마치 아무렇지 않은듯, 아무일 아니듯 얘기하는 소녀의 모습에 웬지모를 기분이 생긴다. 뭐라 해야할까? 지독한 외로움이 계속되다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될까? 비일상이 되버린 그녀의 일상에서 어린 소녀는 그저 받아들였다. 그저 말을 듣고 가는길 친구가 되어준 톰, 그들의 대화는 너무 쓸쓸하다.
정말 저주받은 유산 때문일까? 이 희곡은 단편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탄광촌의 느낌이나 흐린 하늘, 그리고 그녀의 과거기억들. 연극이 아닌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듯 하다.

Tennessee Williams의 연극 특성
Tennessee Williams(1911~1983, 본명 Thomas Lanier Williams, Tennessee란 이름은 그의 대학시절의 별명이던 것을 나중에 필명으로 채택하였음)는 Arthur Miller와 더불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미국이 낳은 가장 중요한 극작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와 같이 아름답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연약한 여인이 시간의 냉혹함과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비정한 현실에 치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그 정신이 붕괴하는 것을 그의 주요작품의 본질적인 주제로 삼은 Williams는 Faulkner나 Carson McCullers의 소설 속에 확대된 남부의 Gothic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의 낭만주의 작가답게 연극의 모든 시적 자원들(언어, 조명, 배경 등의 여러 장치들과 같은)을 완전히 이용하여 흔히 하찮은 자연주의적인 소재를 갖고 전통적인 사실적 연극의 테두리를 타파하고 개성 있는 개개의 인물인 동시에 상징적이기도 한 인물을 창조해내는 그런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Williams는 남부작가로서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남부를 배경으로 삼았고 주인공들은 병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서 심리적으로 현실에서 소외당한 예술가이거나, 성격적으로 정신이상자, 또는 육체적으로 불구자, 성적인 도착자 등 뭔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다. 즉 현실에 적응을 못하여 좌절되거나 현실에서 도피하는 ‘outsider'들이나 ’fugitive kind'들로서 모두 비슷한 유형이다. 또한 극의 주제로는 외로움과 상실, 죽음에 대한 공포, 잃어버린 이상에 대한 추구, 정직과 거짓의 갈등, 외롭게 소외된 자들끼리 동정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 등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과 주제로 인해서 Williams는 작품 세계가 좁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정서 속의 깊은 인간 내면의 절망과 좌절의 모습을 그만큼 객관적으로 표현한 극작가도 드물 것이다. 극의 테크닉에 있어서도 Williams는 재래의 사실주의 극이 지니는 한계를 깨고 여러 극작상의 실험도 시도하였다. 슬라이드의 사용 및 조명과 음향효과 등의 무대요소를 활용하여 극의 ‘Mood'를 창조하고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개인이자 동시에 상징이 되는 인물을 그렸다.
Williams는 남부의 낭만적 전통의 맥을 이어 사실주의와 상징주의를 결합시키고 무대효과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절묘한 환상의 세계를 무대 위에 펼쳐내는 것이다. 상징은 그에게 있어 언어 이상의 표현수단이며 따라서 상징의 사용은 변형(transformation)을 통해서 진실이나 진리를 파악하려는 그의 이른바 비관례적(unconventional)인 새로운 신축성 있는 연극(new plastic theatre)의 본질적인 수법의 하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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