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극작가 페터 한트케가 쓴 희곡으로 종래의 전통극을 부정하고 구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적 작품.
막이 오르면, 무대는 비어 있고 관객의 기대감은 무너진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무대엔 특별한 소도구도 없으며, 조명이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배우들은 무대로 나와 관객에게는 관심도 없이 제멋대로 지껄이다가 다함께 같은 말로 욕을 하기 시작한다. "여러분이 늘 보았던 것들을 여기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늘 들었던 것들을 여기서는 듣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화자들은 관객에게 말을 건다. 차츰 '여러분'은 ''너희들'로 바뀌고 화자들은 관객에게 직접 욕을 하게 된다. 욕은 역사, 정치, 문화를 비난하는 단어들로 비약한다. 욕은 관객을 긴장시키며 관객과 배우의 관계를 좁히는 기능을 한다. 관객은 극을 볼 때 감정이입이 일어나지 않고 '낯설음'을 가지고 깊은 인식과 비판의 여유를 갖게 된다.

전통극이 갖고 있는 무대장치, 극적인 행동, 사건전개, 감정이입 등의 요소를 부정하고 음향적인 감각의 언어를 통해 관객을 매료시킴으로써 세계를 인식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로 구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다. 이 극은 표현방법으로 욕, 자기모독, 변명, 외침 등을 사용하며 동어반복의 비논리적 구사를 통해 관객을 말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이 극의 주제는 네 사람의 화자와 관객이며, 관객은 배우와 함께 연극을 하는 자로 격상된다. 관객은 이 극을 통해 인습적인 기대감을 버리고 의식을 새롭게 정립한다.
-<관객모독>

우리가 극장에 가는 것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인생을 우리 것으로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이론은 가르치고 있다. 감정이입을 통해 극장무대에서 벌어지는 주인공들처럼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싸우고 죽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통해 우리는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겪는다. 그것을 순화정화라고 부르거나 배설이라 부르거나, 일단 관객은 허구의 체험을 통해 관념적으로나마 체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관객모독>에서는 감정이입이 허용되지 않고 정서의 순화나 심리적 배설 같은 것을 기대하지도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론의 바탕이 되는 감정이입이나 카타르시스 이론이 무너진 것은 서사극이라거나 부조리 연극이론 등 이른바 비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의한 현대극의 등장으로 촉진되는데,<관객모독>의 작가 피터 한트케(P. Handke)는 ‘언어극’이라는 형태로 정통극에 대드는 반정통극 가운데서도 더 짓궂게 연극의 기성관념을 뒤집어 놓는다. 그러니까 극장에 가도 줄거리를 좇는 재미가 없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걸던 기대도 그런 고정관념을 허물어 버리는 현대극의 아리송한 작태에 의해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충격에 의한 반응으로 겨우 ‘짓거리’에 매달리던 관객의 시선은 이제 짓거리 조차 마다하는 ‘말’의 과학적 구조에 연극의 재미를 반납해야 한다.
말이라고 하니까 원래 연극의 기본이 되는 희곡, 혹은 대본은 말로 씌어진 것이었으므로 제대로 연극이 ‘말’로 되돌아간 듯이 착각하지만, 희곡은 ‘말’이 아니라 문학화라는 뜻에서 ‘글’이라는 표현이 옳다. 따라서 ‘말’의 연극과 ‘글’의 연극은 엄청나게 다르다. 말의 연극은 글의 연극과 짓거리의 연극 다음에 나온, 이른바 급진파에 해당한다. 이 급진파의 이론은 수구파의 의식과 생리로써 담당하기 어렵다. 연극을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거나 조금 더 낫게, 이야기는 왔다 갔다 해도 짓거리로 볼거리를 장만해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던 관객들은 연극이 관객을 괴롭히는 도구가 되어 있다는 한트케의 언어극은 말이 제도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질서의 외피로서의 ‘말’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띨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연극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기존의 관념으로 봐서는 ‘말’의 반란과 같은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할 경우에 대체로 유사한 사항을 사랑이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합의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며, 저마다 다른 뉘앙스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고정관념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상(事象)을 다시 구체적으로 규정시키는 것이 언어라는 매체이다. 따라서 말의 규정, 이른바 문법이라든지 표현이라든지 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폭로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도 사실은 가상이며 허구의 매체라는 뜻에서 말의 음흉한 기능을 상정할 수 있다. 그만큼 ‘말’이라는 인간의 발명품은 기능적으로 야누스의 얼굴을 지녔다.
한트케는 눈에 띄지 않는 ‘말’의 실체를 언어극을 통해 폭로한다. 따라서 그 잡히지 않는 말의 실체는 발성체로서의 육체라는 실물의 움직임, 곧 연기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파악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연출(기국서)은 말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여태까지 ‘말해버리는’ 언어극의 테두리를 벗어났고, 동시에 말의 시각화에 이바지하는 연기자들(기주봉, 정재진, 전영민, 한선혜)의 연기력은 놀랍도록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고정관념이라고 하면 극장무대에서 줄거리를 찾는 것도 연극적 고정관념인데, 그런 관념을 깨면서 ‘말’의 문학성이라는 고정관념마저 깨뜨리는 한트케의 언어극의 ‘말’은 문학언어의 신비한 베일을 벗기기 위하여 그런 구조나 표현을 전혀 다른 각도로 제시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명명 또한 얼마나 기능적으로 만들어져 있는가를 드러낸다. 그 점에 있어서 설명으로써는 불가능한 것이 연극의 연기술을 얻으면 분명한 인식으로 되살아나는 게 언어극의 묘미인 것이다. 그래서 연출은 뛰어난 네 사람의 연기자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평상의 언어표현을 전혀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연기에 옷을 입힌다. 그 다른 언어표현으로 구사된 비일상성-예를 들면 토씨의 엉뚱한 활용, 띄어쓰기의 무질서, 행위와 말의 불일치 등-이 일상적인 언어는 질서로운 우리 의식에 혼란을 준다. 그 혼란의 충격이 연극의 창조력인 것이다.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즐거운 것이 아니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라면 철학 같은 것인데 이것은 철학도 아닌 것이 연극의 이름으로 ‘말’을 통해 생각관념의 미로를 헤매게 하는 것이다.
<관객모독>은 언어극이다. ‘말’로써 우리의 말이 가진 거짓과 구멍을 연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재주는 또한 연극이 아니면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언어극은 가장 연극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이 말은 가장 잘 다듬어진 연출과 연기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연극’이 될 수 없다. 한트케의 언어극이 우리나라에 상륙한 이래로 언어극이 가지고 있는 재미없는 구문은 그런 대전제를 생각하지 못한 채 연극이 될 수 없는 대상을 연극으로 꾸민데 있는 것이다.
말만 뱉어 놓는다고 해서 언어극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말을, 언어를 발성하는 육체라는 매체를 어떻게 유능하게 말언어에 밀착시키느냐를 고려하지 못한 채 허공에 발성의 울림만 날려 보내는 그것은 연극이 아니다. 언어극도 보여주는 말의 연극이 되지 않으면 언어극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76극단의<관객모독>은 이제 비로소 말의 연극이 되면서 우리들 관객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대는 광원이 드러난 채 따가운 촉광이 바로 우리의 시선을 끌게 되어있다. 그것은 잠들지 말라는 신호와 같고 깨어 있는 의식을 요구한다. 연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바로 욕을 얻어먹는다. 글자 그대로<관객모독>은 관객이 욕 얻어먹으러 돈 내고 들어온 사실에 욕 얻어먹고 모독 받으며, 모독 받는 줄도 모르는 고정관념의 의식수준에 욕 얻어먹어 싸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욕하는 것이 이 연극의 주제는 아니다. 연극을 고정관념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욕 먹어 싸다는 것이다. ‘말’이 얼마나 음흉한 도구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에게는 ‘말’이 가지고 있는 독침의 효과를 토로해야 하기 때문에 욕지거리는 독침이 되어 관객의 청각을 울리고, 그들의 내부에서 왜 부글거리는 효모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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