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막으로 구성된 발터 하젠클레버의 희곡 '아들 Der Sohn'은 1914년 발표 되었다.
이 작품은 맨 처음 1914년 초 쿠르트 힐러 Kurt Hilla가 주관한 베를린 소재 문학소모임 “Das Gnu 뉴”에서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공개적으로 낭독되었다. 이 작품은 동년 4월-6월 기간 동안 라이프치히 발행 잡지, 「백색지」에 연재형식으로 발표되었고, 동 도시 소재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 의해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 공식 공연이 금지된 관계로 1916년9월 30일 한스데메츠Hans Demetz의 연출로 체코의 프라하에서 비공개 실내극으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이 작품은 독일 땅에서 역시 초대된 관객만을 대상으로 1916년 10월8일 아돌프 에드가 리호 Adolf Edgar Licho의 연출로 드레스덴의 알베르트 Albert 극장에서 최초로 공연되었다. 이때 비평가들은 '아들'을 “최초의 결정적 표현주의 작품”으로 극찬하였다. 그러나 표현주의연극의 새로운 장을 연 최초의 희곡작품으로 크게 호평받은 공연은 1918년 1월 18일 리하르트 봐이헤르트 Richard Weichert의 연출로 만하임의 궁정-국립극단에 의한 공연이다. 연출자는 무대장치를 검은색과 흰색의 조명을 대비시키면서 극중 주인공 아들의 내면세계를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공연을 통해 '아들'은 관객은 물론 연극비평가들로부터 혁명적 젊은이를 표현하는 희곡으로서 "폭군적인 기성세대에 의해 배신당한 젊은이의 투쟁", "지배체제에 대한 항거",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 등으로 해석되었다. 하젠클레버 자신도 '예술과 정의'에세이에서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작품은 1913년 가을에 집필되었으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삶의 탄생을 위한 투쟁의 서술이며, 현실에 대항한 정신의 반란이다."
자서전적 요소가 강하게 표출된 하젠클레버의 대표적 희곡작품 '아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제1막에서는 도입부로서 갈등을 겪고 있는 아들의 내면세계가 남자 가정교사, 친구, 여자 가정교사와의 대화를 통하여 드러난다. 20세 아들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이 나이는 인생의 문턱에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나이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감시와 통제에 매어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미성숙한 자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속박,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구와 순수한 인류애에 대한 무한한 갈망으로 가득 찬 주인공 아들은 대입자격시험에서 떨어진다. 아들은 "현실은 인간을 당혹하게 만들기 때문”에 무의식적 발작을 통한 몽상적 감정이 분출되어 의도적으로 대입자격 시험에서 떨어졌다고 고백한다. 아들은 이러한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자살 하려고 결심한다. 그러나 아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와 전횡에 얽매여 자살하고 싶은 생각과 인간의 현존재적 삶의 강렬한 도취 사이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을 인식하고 자살을 포기하고 다시 살려고 마음을 바꾼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체험하려는 단호한 의지의 발로이다. 이때 친구가 나타나 여자 가정교사를 은근히 암시하면서 아들을 성에 눈뜨도록 자극한다.
제2막에서는 자신의 자율적 삶을 살려고 하는 아들의 의지가 구체화된다. 고양된 삶의 감정에 충만하여 아들은 편지를 받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한편으로 반항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애원하면서 자신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와 부당한 구속에 대하여 젊은이의 권리를 내세우며 아버지 세대와 다른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인정해줄 것을 격렬하게 항의한다. 아버지는 불같이 거센 아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절망한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새삼 되뇌며 그날 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감옥과 같은 부모 집을 도망쳐 나온다. 이때 친구는 절대적 삶을 위한 의무를 아들에게 주지시키면서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게 하기 위해 아들을 부추긴다.
제3막에서 드라마는 정점을 이룬다. 아들은 친구의 인도 하에 구체적 행동을 결단한다. 친구는 현존재적 삶의 추구로서 쾌락과 환희의 갈망에 가득 찬 아들을 1년 전부터 몇몇 젊은이들에 의하여 이끌어져 왔던 ''환희의 유지를 위하여"라는 비밀모임으로 인도한다. 이들에 의하여 계획된 집회에서 친구는 아들에게 연설을 하도록 무대 뒤에서 최면을 걸면서 아들을 조종한다. 최면술에 걸려 아들은 열정적으로 자신들을 괴롭히는 모든 아버지를 법정에 세우자고 외치면서 가정의 폭정에 대하여 적극적 투쟁을 부르짖는다. 아들이 외치는 "지상의 모든 감옥에 대한 투쟁"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라는 유령에 의해 희생당한 젊은이들은 "아버지 살해"라는 구호 하에 뭉친다. 집회는 아들의 호소 "모든 아버지들에 대한 투쟁"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들은 관객에 의하여 혁명의 선구자이자 선언자로 추대되며, 지금까지 사적으로 머물렀던 세대 갈등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공동의 문제로 대두된다.
제4막에서 아들은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환희를 추구하는 현세적 삶을 더욱 더 갈구하게 된다. 친구는 이때 다시 나타나 성적으로 남자가 되게 한 아드리엔에서 벗어나도록 아들을 설득하고, 아들의 감각적 삶에 대한 성적 희열과 격정을 "아버지 살해"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유인한다.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아들의 준비는 친구와의 작별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친구는 아버지에 대한 살해를 아들에게 주지시킨 후 독약을 먹고 자살함으로써 이후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아버지가보낸 경찰에 아들은 체포되어 아버지에게 끌려온다.
극의 대단원인 제5막에서 아들은 또다시 제2막2장에서처럼 아버지와 대립하게 된다. 아버지는 단호하고 엄격하게 아들의 정상을 벗어난 행동을 심하게 꾸짖고 단죄한다. 아들과 아버지의 화해는 결코 일어나지 않고 갈등은 더욱 더 증폭, 첨예화되어 마침내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사전에 준비해 간 총을 겨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살해되지 않는다. 아들이 권총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하젠클레버는 1916년 이 드라마를 "인간으로 됨"의 드라마로 표현했다. 또한 그는 이 작품을 "삶의 탄생을 통한 투쟁의 서술"이라 했으며 ''현실에 대한 정신의 봉기"로 설명하였다. 이 극은 5막이란 전통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각 장마다 사건이 인과적으로 전개되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아들이란 한 인물을 중심으로 극이 집중된다는 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함께 공연하는 인물들도 사건의 진행에 따라 개별적 임무를 수행하는 독립적 인물이 아니라 언제나 주인공과 연관된 기능을 갖는다. 즉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주인공 아들의 변화과정과 연관하여 주어진 기능 때문에 존재가치를 얻는다. 그들은 주인공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주고주인공의 성격과 감정을 관객 및 독자에게 보다 더 분명하게 밝혀주고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전체 사건은 오로지 주인공 아들 중심으로 일어남으로써 사실 이 작품의 외적 사건은 극히 빈약하게 전개된다.
1914년 쿠르트 핀투스의 언급처럼 이 작품에서 문제되는 것은 극적 "사건이 아니고 아들의 감정”으로서 주인공 아들의 생각, 느낌, 기분, 충동, 감정 등의 표출이다. 다시 말하면 외적 억압과 강요에 저항하는 아들의 내적 감정, 느낌의 강도와 더불어 그것과 결부된 고양된 한 존재의 자의식의 형성, 전개과정이 작품의 핵심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고찰할 때 '아들'은 "변화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젊은이가 궁극적으로 현실을 인식하면서 적응해가는 내면적 발전과정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극 종결부의 연출지시인 "그녀는 아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들이 제2막에서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은 결정적 의미를 시사한다. 극의 도입부에서 새로운 삶을 체험하고자 아버지 집을 떠나는 가련한 자신을 위로해주고 성적 환희에 최초로 눈뜨게 해준 여자 가정교사 앞에 아들은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극의 대단원인 제5막에서는 정신적으로 자신을 압도했던 여자 가정교사가 거꾸로 아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은 아들이 그 사이 정신적으로 성숙해 졌으며 그녀를 압도할 만큼 자의식이 발전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외적 사건은 결말을 이루지만 아들은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자율적인 한 인간으로 자의식을 얻었다는 점에서 "변화의 드라마"로 해석할 수 있다.
극을 통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표출되고 있는 아들의 삶에 대한 동경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워 지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환희의 추구"이다. 정원에서 달콤한 공상과 무아경에 빠져 "인간은 단지 도취 속에서만 살 뿐이다”라는 아들의 독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단절감을 느끼고 자신의 내면세계에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아들의 언급, 예컨대 "현존재의 힘”, "파악할 수 없는 세계'',"세상의 환희", “아름다움과 위대함“등의 용어들이 시사하는 것처럼 몽상적이며 추상적인 표상들이 아들의 내면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언젠가 사랑과 고통을 체험”하려고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다. 그는 감옥과 같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다가오고 있는 환희의 세계”를 영접하고자 한다."나는 이 세상의 엄청난 곳, 거대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 아들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항상 또 다시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언급하면서 현존재적 삶에 대한 의지를 강렬하게 불태운다.
아들의 자유와 환희에 대한 동경은 드라마에서 구체적으로 성적희열의 추구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여자를 갖고 싶다"는 성적 동경이 아들과 여자 가정교사의 대화 장면에서 나타난다. 친구에 의해 여자 가정교사의 아름다움과 성에 눈뜨게 된 아들은 여자 가정교사 에게 키스하면서 "나는 인간이 될 거야”라는 소망을 확신한다. 성에 눈뜬 아들은 더욱 더 발전하여 창녀 아드리엔과 동침하면서 그녀를 통하여 "남자가 되고 싶어"한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아버지에게 이러한 테마는 금기영역이다. 아들은 "우리들은 아버지에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를 탁 트인 마음으로 창녀에게 이끌도록”하고 바라지만 아버지는 원칙적으로 아들에게 이러한 육체적 희열을 허용하지 않으며 혼전 관계를 치욕으로 간주한다. 비록 아들의 아버지는 그의 환자에게는 호의를 베풀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모든 면에서 엄격하고 단호하다. 아버지의 생활신조는 업적을 중요하게 여기며 "책임","진지함" "의무” 감에 충만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아들은 아버지에게 "반항", "불복종"하며, 아버지에게 "퇴폐"적 인간으로 간주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미래에 안락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법관으로 만들려는 소망을 가지나, 정작 아들은 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시를 암송하면서 연극배우가 되고자 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뜻에 항거하는 이러한 아들의 고집과 반항을 극도의 엄격함으로 가차 없이 단죄한다. 아버지는 괴테 작품 독서, 연극구경. 여자 친구교제 등을 금하면서 이렇게 통제하는 자신의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아버지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모든 권위와 미풍양속에 거세게 반항”하면서 나날이 타락되어 가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천박하고 저속한 이 시대의 독”으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한다. 타락한 이 시대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버지의 "신성한 의무"라고 믿는다. 아들은 이러한 보수적이며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진 아버지에게 젊은이의 권리를 내세우며 자유를 달라고 간청한다.
극의 초반부에서 개인적 욕구에 대한표현은 극이 진행되면서 점점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개적 논의의 성격을 얻게 된다. 제3막에서 몇몇 젊은이가 조직한 비밀모임 "환희의 유지를 위해서"가 개최한 집회에서 아들은 "인간의 최고선인 자유"를 쟁취하자고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연설을 한다. 그는 젊은 세대들은 "노예상태”에 있다고 판단하고, 이 "세상의 모든 감옥에 대한투쟁”을 부르짖는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대립은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젊은 세대의 항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제목이 암시하듯이 작품 '아들'은 테마, 문체. 형식 등이 표현주의 드라마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특정 개인과 개인적 사건이 핵심주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물들과 일반적 사건에 문제의 초점이 맞춰진다. 즉 어떤 특정한 한 아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들들이 주인공이 되며, 제3막에서 보는 것처럼 종국적으로 "아들들로 이루어진 민중"으로 확대된다. 이 작품에 형상화되어 극단으로 치달은 세대갈등은 표현주의 드라마의 정치적 모델의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제4막에서는 친구가 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투쟁을 부추기면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가정에 대한 폭정을 부셔 버려. 이러한 중세기의 고름을, 이러한 마녀들의 대소동과 같은 혼란을. 유황으로 채워진 고문실을 파괴시켜 버려. 법들을 폐지시키고 인간의 최고선인 자유를 다시 세워.(•••) 왜냐하면 아버지에 대한 투쟁은 백 년 전에 있었던 제후에 대한 복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오늘날 우리는 정당해! 그 당시에 왕족들은 신하들을 착취하고 노예로 삼고, 돈을 강탈하고, 그들의 영혼을 감옥에 감금했었지. 오늘 우리 혁명가를 부르자! 아직도 우리 아버지들은 단죄 받지 않고 자기의 아들을 굶기고, 고된 일을 시킬 수 있으며. 아들이 위대한 일을 이루는 걸 방해할 수 있어. 그것은 부 당함과 잔혹함에 항거하는 옛 노래일 뿐이야. 그들은 국가와 자연이 부여 한 특권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어. 둘 다 없어져야해! 백 년 전에 독재는 사라졌어. 우리 새로운 자연성이 자라도록 도와주자!” 하젠클레버가 이 작품에서 아버지에 대한 투쟁을 가정이라는 제도, 국가권력에 대한 항거로 확장시키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결코 어떤 특정 정치적 이념을 피력하고 있지 않다. 자주 언급되는 "세상의 변화”는 구체적 정치적 이념을 가지지 않으며 또한 "환희의 유지를 위하여” 클럽에서도 표방되지 않는다. 연미복을 입은 케루빔은 "지극히 정치적으로 되고자" "부르주아 정신”으로 관중을 자극하기를 원하나, 실재 정치적 이념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 케루빔이 부르짖는 "이 세상 우리들의 자아를 과격하게 하기 위하여”, “약자와 버림받은 자의 신을 그의 권좌로부터 실각시켜라” 등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폰 투호마이어에게 케루빔은 "우리 이념을 대표하는 이상적 인물"이지만 케루빔에게는 오로지 폰 투흐마이어의 돈이 주된 관심이다. 그들이 선동하고 있는 “삶의 변혁을 위한 동맹”이 어떤 이념적 목표를 추구하는가는 작중에 애매모호하게 나타난다. "새로운 종교의 가능성”과 “쿠테타”가 이들 모임에서 절박하게 말해지고 있으나, 이것들은 각자 서로 다르게 표상하고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통일성 없이 언급되고 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이 드라마는 내용면에서 통일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건은 현실변혁에 대한 하젠클레버의 모호한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설명되어질 수 있다. "나는 정치적 작가라는 단어를 고안해냈을 때 정신을 위해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소. 나는 신념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왔으나, 이것은 나의 실수가 아니라 나의 믿음자체가 허위라는 점에서 비롯되었소.” 이러한 태도는 또한 하젠클레버가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입장 사이에서 우왕좌왕 했다는 것에서도 그대로 증명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점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하젠클레버가 표방한 표현주의 문학은 사회, 정치적 변화 및 쇄신을 요구하는 젊은이들의 소명의식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1910년대는 젊은 세대들에게 정치적 현실을 꿰뚫어볼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격동기였으며, 당시의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체제는 진리추구와 자아실현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정치적 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따라서 불행한 시기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꾸었으나 현실정치에 실망한 젊은 세대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절망적 허무주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권위주의 국가의 철저한통제로 정치적 분출구가 막혀버린 젊은 세대들은 문학의 정신세계로 침잠하여 예술을부정적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즉 보다 높은 것을 지향하는 상승열망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정신에 대한 동경으로 변하여 현실적 삶의 자리에 예술의 표현 세계가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표현주의자 빌헬름 보링어는 환상적이며 격정적인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표현주의 미학의 대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류가 자신의 정신적 인식을 통해 외부세계의 현상과 멀어지고 친밀한 관계를 잃게 됨에 따라, 최고의 추상적 미를 추구할 수 있게 해주는 역동적인 힘은 더욱더 강해진다.” 하젠클레버를 위시한 표현주의자들은 사회, 정치적 문제들과 연계된 삶의 문제를 정신적 영역으로 이전하여 추상화시켰다. 즉 권위주의적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속물적 시민사회에 대한 역겨움 등을 삶의 활력과 자극을 통하여 해결하면서 그것의 문제점을 문학작품에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발터 하젠클레버(Walter Hasenclever, 1890년 7월 8일~1940년 6월 22일) 독일의 극작가.
젊은 세대의 아버지에의 반항을 그린 <아들>, 반전적(反戰的)인 <안티고네>, 종교적인 <인간> 등의 여러 작품은 모두 표현주의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성의 회복을 구하는 열광적인 절규에다 정치적인 자세를 가미했다. 만년에는 <결정> <나폴레옹 나서다> <천국에서 맺어지는 사랑> 등과 같은 경묘한 문명비평 극이나 오락극도 집필했다.
그러나 점차 작풍을 바꾸어 경묘(輕妙)한 희극 《보다 좋은 사나이》 《천국에서 거는 연애》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평화주의자인 그는 1933년 나치스에게 국적을 박탈당하여 프랑스에 망명하였고,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에 침입하자 수용소에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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