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헵벨 '귀게스와 그의 반지'

clint 2015. 11. 2. 18:17

 

 

 

 

 

 

 

 

 

반지원정대의 골룸, 반지의 원 소재인 작품이 바로 헵벨의 이 작품이다.
하도 오래전에 번역된 작품이라 좀 손을 봐야 할 듯...한데 잘 꾸민다면 좋은 작품이 될 듯 함.
아마 이 작품은 진짜 희귀본이다.


작품해설
이 작품은 헵벨의 원숙기의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로는 고대의 기록과 전설에서 시사를 받고, 한편 그리스의 史家 헤로도토스의 사화와 플라톤의 國家論이 뒷받침이 된 것이다.
이 극은 사람의 자태를 보이지 않게 하는 반지의 마력에 의해서 인도되는 비극이다.
헤라클레스의 영향은 5백여 년 간 리디아를 지배하였다. 기원전 7세기에 칸다올레스 왕은 그의 귀빈 귀게스한테 자기의 왕비 로도페의 절세의 美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왕국풍습 때문에 왕비를 다른 사람한테 보이지 못하는 것이 항상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왕비한테는 알리지 않고 밤중에 왕비의 자태를 귀게스한테 보여 준다. 결국 왕비가 그 비밀을 알아채고 그것을 자기 모욕으로 알게 된다. 그러나 총명한 왕비는 王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王의 처사를 비난하고 王에 대하여 복수를 기획하였다.
이름날 왕비는 귀게스를 宮中에 불러 들여 王을 죽이고 자기와 결혼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살을 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하기 때문에 귀게스는 왕을 죽이고 왕비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런 非인정인 것에 대하여 心理的인 解釋을 한 것이 이 희곡의 내용이다.
헵벨은 부인을 육안으로 보는 칸다올레스 왕과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왕비나, 王의 진보적인 행위와 왕비의 보수적인 행위는 서로 모순되는 갈등 속에서 항상 거듭되는 인간 問題의 상징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왕비로 하여금 원죄적인 자살을 하게끔 하고 悲劇的 效果를 철저히 한 데에 그의 엄숙한 인생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이 戲曲을 만드는 대 있어 아무런 관념인 주관을 자각함이 없이 순전히 詩的 感興에 쏠려 가면서 명상적인 정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니고, 그의 인격에서 발로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이 칸다올레스인지, 로도페 인지, 귀게스인지 뚜렷하지 않다. 귀게스와 王과의 결투나 결말의 형식적인 결혼 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비난이 있기는 하지만, 참다운 悲劇의 心理的 묘사에 있어서 性格묘사의 원숙함에 있어서 양식의 古典的인 순화에 있어서 세련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헵벨 作品 中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여 준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1889년 빈의 궁중 劇場에서 처음으로 상연되었다.

 

 

 

 

 

줄거리
로도페의 비극은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 고대 리디아 왕국의 칸다올레스 왕은 왕비 로도페를 세계 최고의 보배로 여기고, 그런 미인에게 남편으로서 입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귀빈으로 맞이한 그리스의 용장 귀게스가 무술 시합에서 승승장구하고, 그에게 열광하는 리디아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왕비의 여종 레스비아에게 은근히 한눈을 파는 것을 눈치 챈 왕은 왕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내가 그대를 다른 사람에게 데리고 간다면, 그대는, 이 처녀가 아무리 사랑스러운들/ 거울을 흐리는 얼룩처럼/ 눈에서 씻어내고 말걸세. [...] 기다리게! 보여줄 수 없는 보배라면 아예 자랑을 말아야지.”
드디어 왕은 귀게스가 바친 마법의 반지를 그에게 돌려주며, 그 반지의 힘으로 투명인간이 되어 꼭 한번 침실에서 옷 벗는 왕비의 모습을 본 다음 자기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해 달라고 권유한다. 왕의 신임이 아무리 두텁다고는 해도 그런 불경을 감히 저지를 수는 없다고 거절하는 귀게스를 왕은 거의 강권하다시피 왕비의 침실로 이끌고 간다. 귀게스 또한 로도페의 미모에 숨이 막힐 지경으로 반하고 만다. 왕이 마법의 반지를 자랑할 때부터 자신이 그 반지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던 로도페는 결국 두 남자에게 던진 기지에 찬 질문을 통하여 그런 염려가 사실로 나타났음을 밝혀낸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치욕을 당했다고 느낀 로도페는 오직 피로써 그 치욕을 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죽을죄를 자백한 귀게스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로도페를 말리고 자신의 죽음으로써 죄 값을 치르겠다고 말하지만, 로도페는 칸다올레스 왕을 죽이고, 그 대신 자기의 남편이 될 것을 귀게스에게 요구한다. 왕의 우정을 배반할 수도 없고, 사형선고 대신 받은 왕비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곤경에 빠진 귀게스는 고민 끝에 왕에게 정정당당한 결투를 신청하고 만다. 결투는 귀게스의 승리로 끝나고, 강력한 왕을 원했던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떠받드는 가운데 로도페는 약속대로 헤스티아 제단 앞에서 새로운 혼인식을 올려 새 왕의 등극을 공식화하고, 다음 순간, “나의 죄를 벗었다. 이제 자격 있는 자 이외에 나를 본 사람은 더 이상 없기에”라고 말하면서 자결하고 만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목숨처럼 여겼던 순결을 허영심 때문에 짓밟은 칸다올레스 왕에게 복수를 했고, 자결을 함으로써 귀게스에게 어떤 희망도 남기지 않았다. 새 왕과의 혼인은 자신의 몸을 훔쳐본 자의 죄를 추후에 정당화함으로써 오직 자기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킬 명분을 찾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복수극에 남녀 사이의 진정한 화해는 처음부터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 헵벨
헵벨은 괴테, 실러의 다음으로 손꼽히는 독일의 저명한 시인이다. 그는 일생을 통해서 시도 쓰고 소설도 만들었지만, 극작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가 '베셀브렌'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빈에서 행복스러운 만연을 보내게 된 50년의 생애를 통해서 그를 빛나게 한 것은 굽힐 줄 모르는 불요불굴의 정신이고 열렬한 힘이다.
그는 자기의 경우에 지배되지 않고 극도의 빈곤에도 굴복하지 않고 항상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개발을 위하여 노력하고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극작가로서 특히 클라이스트에게 사사 받고 그의 뒤를 계승하여 근대극을 창시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헵벨의 확고한 자신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에 있어서도 가장 명백하게 나라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예술가로서 자각과 결심을 한때는 그의 뮌헨 時代인 1938년 23세 때이었다. 그 후 그의 모든 노력을 예술에 총집중시키고 창작에 힘을 기울었다. 그는 청년시대 초기에 희곡에서는 실러, 소설에서는 호프만, 시에 있어서는 우란트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 영향은 그리 영속적인 것이 못 된다. 그가 궁핍한 생활을 하고 또 오랫동안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번도 대중에게 아부하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헵벨은 또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자아를 중히 여기는 사람인가를 볼 수가 있다. 그는 아무리 그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 하더라도 만약에 그 사람이 그의 自我를 무시하고 압박을 가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그 친분에서 이탈해 버리곤 했다. 헵벨은 14 세 때 아버지를 여윈 다음 생활은 이전보다 더 궁핍해졌기 때문에 교회 관리인 '모어'한테서 서기 노릇을 하고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다. 모어는 성실한 사람으로 헵벨의 재능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매우 냉정했다. 그러나 이 모어의 집에는 장서가 많이 있어 헵벨은 도서 열람실의 사용을 허락 맡고 많은 도서를 탐독하고 위안을 삼았다.
그는 그 후 지방 잡지를 경영하던 '아마리에 쇼테'에게 그의 재능이 발견되어 원조를 받게 되고 함부르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헵벨은 年上의 여인 엘리제 렌징과의 연애 관계가 성립되어 두 아이를 갖게 된다. 그 후 뮌헨, 하이델베르크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특히 뮌헨에는 家具상의 집에 하숙하고 그 집 딸 '요셉 슈팔츠'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집에서의 생활은 희곡 '마리아 막달레나'의 素材가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가 29세 때 코펜하겐으로 가서 덴마크 왕 크리스천 8世와 회견하고 補助金을 받아 프랑스, 이태리를 旅行한 다음 32세 때 빈으로 갔다. 이곳에서 크리스티네와 열럴한 사랑에 빠지게 되어 1846년 5월 26일 그 여자와 결혼하고 행복스러운 여생을 보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