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렌마트는 1954년 라디오 드라마로 발표했던<헤라클레스와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을 1963년에 연극대본으로 개작해서 무대에 올리고 다시 1980년에 개작해서 발표했다.
이 작품은 헤라클레스의 열두 개의 노역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아우기아스의 외양간지기에 관한 패러디가 주요내용이다.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 중, 지상에서 가장 힘이 센 영웅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과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 이다. 헤라클레스는 그가 행한 열두 개의 노역(勞役)으로 유명한데 그가 왜 노역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신화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노역의 배경에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간계가 작용했다는 점은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헤라는 남편인 제우스와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를 용납할 수 없었다. 헤라가 헤라클레스에게 한 복수는 그녀가 제우스의 혼외자식에게 했던 복수들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집요한 방식이었다.
뒤렌마트는 이 작품에서 전 그리스인의 경탄과 찬사를 받았던 헤라클레스를 몰락한 소시민적 부르주아로 탈바꿈시킨다. 헤라클레스는 일반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일 뿐이다. 이 작품 속에서 헤라클레스의 노역은 그리스의 신화와는 정반대로 하나도 성취되지 못한다. 신화에 나오는 노역은 일감, 직업과 동일시되며 헤라클레스는 사례금을 받아 아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헤라클레스는 부채를 갚기 위해 엘리스국의 쓰레기를 치우는 노역을 하게 된다. 쓰레기 치우는 일 따위는 수치스럽게 생각한 헤라클레스가 외양간지기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애인 데이아네이라가 빚을 갚기 위해 매춘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쓰레기에 매몰되기 직전인 엘리스국은 쓰레기 처리를 위해서 헤라클레스를 고용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쓰레기 처리에 나선 헤라클레스는 쓰레기를 강물로 쓸어버리려고 하지만 수자원 국이 제동을 건다. 헤라클레스에게 엘리스 인들이 계속 관청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하자 의욕을 상실한 헤라클레스는 결국 쓰레기 처리에 실패한다. 이렇게 뒤렌마트는 제도와 규제에 얽매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게 만드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풍자한다.
이러한 풍자는 쓰레기 문제를 논의하는 시의회 장면에서 의원들이 각자 상이한 의견과 주장을 내놓자, 그 주장과 의견을 검토하기 위해서 또 다른 위원회가 구성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하나의 목표를 세웠으나 다양한 이유로 그 목표를 포기해버리는 민주국가 체제에 대한 풍자도 엿볼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가 복지부동의 관료주의 체제로 경직되면 결국 공허한 토론과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는 행정체계를 존속시킬 뿐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와 기구를 인간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기구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우기아스를 통해 법치국가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는데 아우기아스는 목표 달성과는 상관없이 오직 민주국가의 법을 준수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상황의 개선이나 목표 달성과는 배치되는 법치민주주의 원칙만을 고수하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를 보여준다.
쓰레기 처리의 실패로 더욱 궁핍하게 된 헤라클레스는 서커스에서 힘자랑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는 강한 육체적 힘을 가졌지만 정작 그 힘은 빚을 갚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술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그의 육체적 힘은 효용가치를 잃었다. 총알 하나가 헤라클레스의 힘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스의 대통령인 아우기아스는 여러 면에서 뒤렌마트의 또 다른 희극<로물루스 대제>의 로물루스를 연상시 키는 인물이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양계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는 현자이듯이 아우기아스는 감춰진 영웅으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성취하는 뒤렌마트 적인 용감한 인간이다. 아우기아스는 개인적 영역에서 쓰레기 더미를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면서 인간으로서 가능한 것을 성취한다. 아우기아스는 쓰레기 더미가 된 국가는 더 이상 변화하거나 개선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작은 파라다이스를 건설한다.
이 작품 속에는 법치국가와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 외에 학벌, 통신 기밀, 흥행 산업 등 현대사회의 제반에 대한 풍자가 나온다. 헤라클레스의 비서인 폴리비오스는 헤라클래스의 폭력으로 세 번이나 사지가 부러진 경험이 있지만, 헤라클레스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의 비서직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폴리비오스는 대학 졸업장이 없어서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잃을지언정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뒤렌마트는 학벌 위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이상 언급한 모든 풍자는 결국 영웅을 풍자하기 위한 배경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풍자는 영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영웅에 대한 풍자를 통해 영웅이 몰락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음을 강조한다. 힘과 영웅은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다. 헤라클레스의 무서운 괴력은 기술자본주의 산업시대의 직업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헤라클레스가 물리쳐야 할 거대한 괴물들은 환경보호제도에 맡겨졌으며 도둑들은 정치계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직업의 근간을 잃게 되고 엘리스국의 청소나 스팀팔리아의 새 떼 소탕작업에 투입된다.
이 작품의 드라마적 구상은 뒤렌마트 자신의 세계관의 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세계 자체를 하나의 괴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극 속에 등장하는 쓰레기, 관청, 인간들은 헤라클레스가 극복해야 할 괴물들이다. 괴물의 하나인 쓰레기를 처치하려는 헤라클레스의 노력은 또 다른 괴물인 관청과 새로운 것에 두려움을 갖는 인간들에 의해 좌초된다.
영웅은 뒤렌마트적인 용감한 인간으로 대체되고 아우기아스처럼 쓰레기 더미 위에 정원을 만드는 일이 뒤렌마트 적 용감한 인간의 과업이다. 뒤렌마트는 용감한 인간형을 제시하는 것을 그의 작품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 반 영웅의 시대에 영웅을 대체하고 있다. 뒤렌마트의 용감한 인간은 무의미로부터 의미를 산출해서 인간의 가슴속에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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