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막
아내는 작가인 남편의 '가출기'라는 작품에 대해 따지려고 한다. 책의 내용과 남편의 상황이 비슷하고, 작품 안에서 남편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이 아닌 작품 속 인물인 민수가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전화가 계속 와 아내의 의심을 풀어줄 수가 없다. 남편은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화를 걸어 의심을 풀어주려 하지만 실패한다. 아내는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현실에 재현하려 한다. '둘은 사소한 것으로 다툼이 시작되고 남편은 가출을 시도한다. 남편은 가 본 적이 없는 가수원행 기차표를 산다.' 현실에서 다시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고 아내의 의심은 가중된다.
2막
부부는 가출기 내용의 연극을 연장시킨다. '남편은 가수원행 기차표를 산 여자를 찾지만 그 여자를 끝내 만나지 못한다. 역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 찾지만 찾지 못하고, 그는 마을을 처음 오는 남자 손님만 받는 주막에 들어가게 된다.' 아내는 남편이 역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따지고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에겐 향기가 없다고 불평한다. '주막에 들어선 남편에게 주인 여자는 왜 남자를 받았는가 설명한다. 남편은 그녀가 가수원행 표를 산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연극 속에서 아내는 남편을 떠보고 남편은 사실 그대로 아내가 싫다고 말한다.
3막
아내는 다시 처음부터 따지기 시작한다. 남편은 소설과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설득하려 하지만 아내는 다시 연극을 시작한다. '남편과 여자는 기약된 삼일간의 사랑을 나눈다.' 현실로 돌아온 남편은 소설과 같은 내용의 현실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그 증거로 여러 사실을 말해 준다. 아내는 의심을 풀고 남편에게 안긴다. 이때 전화가 오고, 윗층 남자가 아내의 화난 음성 때문에 전화를 끊었다고 말한다. 부부가 포옹을 하는 중 다시 전화가 걸려 온다.

작품<코하나 눈둘>은 현실 속에서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허구이며,
허구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현대인의 이중적사고가 인간의 소외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말//윤조병
<<내면의 언어>>
당신은 그동안 몇번 가출하였는가, 당신의 가출은 생의 종말인 주검으로 가는 가출까지 포함해서 일생동안 몇 번이겠는가, 하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은 아니다. 인간은 주위의 사물과의 접촉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누린다. 그 접촉의 실패가 가출의 동기가 된다. 접촉의 실패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사물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고와 언어의 의미를 잃었을 때 당신은 가출하게 된다. 그런데 가출을 전후해서 인간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면의 언어를 갖는다. 삼십대 후반의 부부가 내면의 언어를 갖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열다섯 해 안쪽이 되는 긴 기간을 스무평 안팎의 좁은 공간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오면서 서로가 서로의 인격과 육체를 완전히 드러냈고, 지혜와 본능으로 엮어온 애정표현의 방법이 그 분량에서 바닥이 났고, 정육(情肉)으로 애정행위의 감지감응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상대가 아직 동경과 신비의 대상이었던 옛 모습을 틈틈이 되새기게 되는데 그것이 순간순간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라고 하면 자칫하다가 도덕과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는데 여기에서는 자제능력과 지적사고력의 결핍이나 삶의 방향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연 다른 그런 쪽의 위험스런 열망을 말하는 게 아니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사색하고 가꾸고 하는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쪽의 애정표현의 새로운 기법을 계발하는 영혼의 열망을 말한다. 내면의 언어는 은밀하게 모색된다. 그 매체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꽃, 커피, 언어,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간음하지 말라는 성구(聖句)도 썩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러나 동기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고, 존재의 부활이고, 사랑의 확인인 만큼 내면언어의 몸짓은 신선하고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까 허구와 사실의 양면을 갖게 된다. 사실로서 충족되지 않으면 허구로 자극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자극이란 표현이 적당치 않다면 보충이라고 해도 좋다. 내면의 언어가 중년부부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사춘기, 청춘시절, 노년기에도 나타난다. 내면의 언어의 양면성이 허구와 사실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그쪽에 시선을 보냈을 뿐이다 허구가 인생을 즐겁게 해준다는 건 결코 잘못된 이론이 아니다. 허구가 인생의 폭을 넓혀준다는 것도 옳은 이론이다. 허구가 곳곳에서 인간의 시선이 자기에게 머물러 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이론도 명확한 증거를 뒷받침해서 생겨난 것이다. 작자가 작품을 작품이외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데는 큰 위험이 따른다. 그 설명이 작품보다 덜 선명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출자와 연기자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졸작을 위해 애써주신 극단, 기획, 연출, 연기, 뒷일을 맡아주신 모든 분, 문예진흥원, 그리고 객석의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며, 원고를 끝내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몰려온다는 심정을 알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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