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정복근 '태풍'

clint 2018. 1. 14. 11:00

 

 

 

생의 결정적인 위기가 닥쳐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에 대해 본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일어서기에 우리는 얼마나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장애에 맞부딪쳐 좌절하고 있는가. 안이하고 달콤한 좌절에 빠져 허우적이다가 얼마나 엉성하게 태풍에 휘말려 파멸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보고 싶었던 결과가 이번 작품이 되어진 것 같다.

(1978년 초연 작가의 말)


새마을 성공사례를 소재로 한 이번 작품에서 첫번째 문제점은 어떻게 하면 통속적이고 표피적인 면에서 탈피해야 하는가 였다. 우리는 일련의 성공사례에 무감각해졌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빨간 슬레이트 지붕이라든지, 뚝 완공이라던지 이런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이 결과를 이루기까지의 그 상황에 처해있는 인간들의 절실함 그리고 그들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시련과 도전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였다. 그것은 엄청나고 위대한 것도 아니지만 현실 속에서 바로 우리들이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의 순응과 도전의 맥락이다. 그 속엔 어처구니 없는 쓴 웃음과 분노와 소외감과 눈물이 얼룩져있다. 둘째론 세실이란 작은 무대에 걸맞지 않게 많은 등장 인물들과 무대공간과의 조화였다. 근 열댓명이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을 처리키 위해서 우리들 스스로 공간의 축소에 대한 약속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어떠한 양식이 선택되어졌다. 물방울처럼 압축된 무리와 일렬종대적인 행렬, 또는 콩알이 뿌려진듯한 확산된 무대 등. 시간과 공간과 감정에 대한 많은 생략과 압축이 이 무대엔 필연적인 것이다. (1978년 초연 연출의 말)

 

 

 


가난하고 황량한 어느 섬마을, 항상 태풍과 파도에 시달려 오던 끝에 임기봉은 섬의 서남쪽 끝머리에 물목을 막아 태풍의 피해를 막고 새로운 농토도 얻어 가난을 씻어보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이에 반대한다. 자기들 힘으로 물목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거기에 둑을 쌓아 봤자 원통하게 죽은 넋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미신 때문이다. 그러나 기봉은 굽히지 않고 혼자 물목 막는 일을 시작한다. 드디어 마을 사람들은 감동해서 생계를 도모하던 양식장 일을 집어치우고 둑 쌓는 일에 나선다. 마침내 둑이 완성된다. 그러나 기쁨은 한 순간, 다시 둑이 터져 모두 실의에 빠지고 예전의 양식장으로 돌아가려 한다. 기봉의 아내마저 남편을 버리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이때 약삭빠른 양식장 주인이 자기가 돈을 투자할 테니 모든 권리를 내 놓으라 하고 기봉은 할 수 없이 동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일을 마치 개에게 넘겨주듯 할 수는 없다고 생각, 다시 스스로 둑을 쌓기 시작하는데 그때 태풍이 다시 몰아쳐오기 시작한다.

 

 


줄거리
1장
섬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은 모두 아무 탈없이 1년을 보낼 것을 기원한다. 어디선가 울음 소리가 들려오자 기봉은 아버지가 정재의 빚독촉으로 인해 죽게 된 것을 생각한다. 기봉은 정재에게 원한을 품는다. 기봉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산을 헐어 둑을 만들자고 한다. 지난번 태풍으로 방파제 역할을 하던 큰 바위가 깨진 것이다. 사람들은 둑을 만들지 않으면 한번의 태풍으로도 섬전체가 휩싸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둑을 막으면 정재의 양식장이 없어지므로 선뜻 찬성하지 못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생활에 양식장 일마저 못하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기봉은 태풍이 닥쳐올 것을 염려한다.
2장
기봉은 양식장 일은 하지 않고 혼자 둑을 쌓는다. 기봉을 미친 사람 취급하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기봉과 함께 둑을 쌓기 시작한다. 덕수는 군청의 간척허가를 받기로 하고, 기봉은 상팔을 설득해 선산을 허물도록 하기로 한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둑을 쌓기로 하지만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봉의 쇠고집으로 허가는 받아냈지만 끝내 상팔을 설득하지 못한 채 둑 쌓기를 시작한다.
3장
쌓아 놓으면 물에 휩싸여 무너지는 둑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한숨을 쉰다. 모두들 빚을 얻어 투자한 일이 되지 않자 다시 양식장 일을 하기로 한다. 정재는 기봉에게 양식장 일을 하라고 하지만 기봉은 끝가지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기봉과 덕수는 고집만 부릴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마을 잔치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봉과 덕수는 불도저와 트럭으로 둑을 쌓자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기대하며 찬성한다. 그러나 트럭 길을 내려면 논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에 이 노인은 반대한다.

 

 


4장
땅에 누워 길을 막는 이 노인을 무시한 채 기봉은 불도저로 밀어 부친다. 이 노인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고 둑 쌓는 일에 참여한다. 둑 쌓는 일이 진척되자 정재가 돈을 투자해서 재료비와 인건비를 마련하겠다고 한다. 사람들은 둑 쌓는 일 때문에 끼니도 잊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더이상 재정에게 집을 지려하지 않는다. 드디어 둑이 완성되고 사람들이 땅을 나누어 갖는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 돈을 벌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때 둑이 터지고 물이 밀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당황한다. 덕수는 정재가 무슨 짓을 한 것이 아니냐며 정재를 의심한다.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돈을 마련해 다시 공사를 하기로 한다. 기봉의 아내 박씨는 더이상 기봉의 행동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기봉은 아내의 말을 무시한 채 경찰서에 오라는 전갈을 받고 경찰서로 간다.
5장
기봉은 사람들의 돈을 챙기고, 자재비를 빼돌린 혐의로 유치장에 갇힌다. 형사는 증거로 마을 사람들의 서명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봉을 둑 쌓는 일에서 손떼게 하려는 박씨의 소행으로 사람들이 박씨의 말만 믿고 그냥 서명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기봉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결국 기봉은 무죄로 풀려나고 박씨는 친정으로 간다. 기봉이 마을에 돌아온 이후에 둑이 또 샌다. 기봉은 바람이 불기전에 둑을 막자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지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무당은 인신공양을 한다며 둑에서 뛰어내리고 기봉은 울음을 터뜨린다.
6장
기봉은 마지막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다. 사람들은 일을 벌려놓고 자살한 기봉을 탓한다. 박씨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기봉은 목을 매 자살하려다가 실패한다. 기봉은 다시 둑에 틀을 만들자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안된다며 반대한다. 정재는 기봉이 둑 쌓는 일에서 손을 떼면 돈을 대기로 한다. 기봉은 할 수 없이 물러나기로 한다. 그러나 정재는 태풍이 곧 몰아칠 것같다는 말을 듣자 돈을 투자할 수 없다고 잡아뗀다. 사람들은 절망과 불안에 몸부림친다. 이때 기봉이 혼자 돌을 나른다. 이 노인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기봉의 뒤를 따른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바다를 막기로 한다.

 

 

 

 

작가의 말//정복근(鄭福根)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어떤 고정 관념을 지니고 싶다. 사람이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산다는 일에 대해서 조차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나이를 먹은 결과로 가끔은 역부족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다는 감상에 젖기도 하지만 그래도 때묻은 일상의 슬픔 이쪽에서는 꺾이지 않는 고집이 꿈틀거려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내게는 마음의 평화가 없다. 그래서 작품의 주제는 촌스럽게도 항상 살고 죽는 이야기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생(生)의 결정적인 위기가 닥쳐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에 대해 본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일어서기에 우리는 얼마나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장애에 맞부딪쳐 좌절하고 있는가. 안이하고 달콤한 좌절에 빠져 허우적이다가 얼마나 엉성하게 태풍에 휘말려 파멸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보고 싶었던 결과가 이번 작품이 되어진 것 같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살고 죽는 일의 진실과 아름다움은 물과 같지만 그것을 담아 표현하는 사람의 안목과 역량에 따라 보여지는 단면이 변한다. 작품을 하나 완성해 놓을 때마다 나는 자신의 몇동이의 물이라도 퍼담을 수 있는 크고 웅성깊은 그릇이 아니라 한 숟갈 반 모금도 못담는 작은 양념 종지 밖에 못됨을 깨닫곤한다. 한정된 목숨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의 끈질긴 슬픔을 애초에는 거창하고 우람하며 위대하게 표현하겠다고 의도했었으나 쓰고 또 쓰고 고쳐가며 완성하는 동안 평범한 한 필부 밖에 담지 못한 이번 작품이 연출과 연기자들의 도움으로 더 짜고 더 맵고, 더 달게 맛보여 졌으면 싶다. 이름 없는 신인의 작품을 연극제에 내어놓는 모험을 해주신 극단 대표 이승규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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