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브로드스키 '대리석'

clint 2015. 10. 30. 14:58

 

 

 

 

 

 

 

대리석의 작품 해설과 장진 작 '허탕'의 표절
호텔 같은 감옥. 두 명이 살기에 이상적인 주거지의 모습.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는 감옥. 감옥에 이미 익숙해진 한 사람(연장자)의 방에 새로운 죄수가 오며 시작되는 극. 형량도 모르는 채 갇힌 두 사람의 끝없는 '언어유희'적 대사. 같이 못 살겠다고 싸우면서도 뭔가 통하는 듯한 대화를 나누고, 결국은 친해지는 두 사람의 등장인물. 그 생생한 구어체. 무의미한 일에 집착하는 연장자 죄수. (요일별로 바다의 공기, 숲의 향기까지 풀어놓는) 철저히 컴퓨터로 관리되는 공간. 음식 혹은 주문한 것이 도착하면 불이 켜지는 승강기. 여자와 성욕을 잊지 못한 나중에 온 죄수와, 이것마저 초월한 연장자 죄수., 긴
역사를 지닌 사람의 로마 황제들의 동상... 숱한 감시 카메라, 스크린, 승강기, 욕실, 전화, 컴퓨터,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무대 공간..... 작품은 유폐된 두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들의 한계 상황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의미, 인간자유의 의미를 탐구하는 특이한 작품이다. 마치 현대 과학문명의 발달로 빚어지는 인간소외의 실상을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두 인물의 사고와 행위를 통하여 파헤쳐 보려고 시도한 듯하며 인류의 미래모습을 과거 인류사(주로 로마시대)와 견주며 형상화해본 작품인 듯하다. 이 작품 또한 브로드스키의 난해성을 담고 있으며 그 언어들은 때로 파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짧은 문장 속에서 그의 사상과 인생관이 번득이고 있다 하겠다. 때로 속어들의 남용으로 독자와 관객들을 당황케 하지도 하지만 그 해학과 재치로 탄성을 발하게 하고 있다.
'대리석'의 배경은 로마이다. 그러나 이 로마는 역사 속의 로마와는 많이 다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개혁에 의해 이유도, 형량도 모른 채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이 있다. 위에 언급한 대로 아무 것도 부족할 게 없는 감옥이다. 열 살 가량의 연장자는 이러한 감옥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나중에 들어온 죄수가 괴로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비난한다. 이 두 인물은 다툼과 화해를 계속하며 시간과 공간, 실존과 허무, 유토피아 등등 형이상학적인 많은 주제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작가 브로쯔끼는 놀라운 언어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언어의 다의성과 러시아어의 특성(남성 여성 중성으로 나뉘는 명사, 명사의 6격변화, 구어체와 문어체의 대비 등등) 등 각종 언어적 장치를 사용하여 유머와 위트로 가득한 글을 만들어낸다. 사소한 단어 하나까지도, 그것이 은어나 속어에서 갖는 다른 뜻까지 염두에 두고 글을 씀으로서 읽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해될 정도의 놀라운 언어 능력을 가진 작가가 바로 브로드스키였다. (그의 언어유희의 놀라움은 다 적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의 '언어유희'는 매우 고차원적일 뿐 아니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한다. '대리석'에서는 수준 높은 언어유희 뿐 아니라, 점잖은 문어와 함께, 경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속한 구어 단어들을 사용한 대비 효과 또한 만만치 않다.

 

 

 

 

즉, 장진씨의 '허탕'은 내용의 틀 뿐만 아니라 표현 수단 또한 '대리석'과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또한, 제3의 등장인물(여자)에 있어서도 이 같은 유사성이 보인다. 장진 씨의 '허탕'에서는 실어증 +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 주인공이 있다. 반면에 브로드스키의 '대리석'에는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무생물적 존재가 등장한다. 하나는 카나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침대 맡에 주로 두는 작은 장식장이다. '대리석'의 두 주인공이 키우는 카나리아는 울지도 날지도 못하는 새이며, 장식장은 말 그래도 무생물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 모두 러시아어에서는 여성 명사이며, 따라서 두 주인공이 외설적인 단어들을 섞어가며 이것들에 대해 나누는 대화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로 인해 나는 '대리석'의 등장인물이 둘이 아니라 셋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장식장이 배달되었을 때 연장자 죄수가 ≪그들이 네 아내를 보냈다≫고 말하는 것이나, 나중에 온 죄수가 장식장을 성욕 해소를 위해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둘은 러시아어 상의 특성과 맞아 떨어지며 '이성'에 관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무생물 같은 모습의 여성성이, 장진 씨의 허탕에서는 실어증 +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로 대체되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서..
≪두 사람이 살기에 이상적인 거주지. 방 한칸으로 된 아파트와 우주선 선실의 중간쯤 되는 어중간한 것. .......(중략)...........방의 중앙에는 기둥 같은 원통이 있고, 그 안쪽에는 승강기가 있다. 희곡 중에 무대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과 무대에서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이 승강기를 통해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 기둥 속에는 음식물 운반용 승강기와 쓰레기의 통로로도 사용되는 공간이 있다. 기둥의 양쪽에는 뚤리와 뿌블리의 침대가 있다. 여기에는 모든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욕조, 테이블, 세면대, 화장실, 전화, 벽에 고정된 원거리 스크린, 책들이 놓인 선반 등이다. 선반들과 벽장에는 고전작가들의 반신상들이 있다≫
'대리석' 1막 도입부의 무대 지문이다. 방 가운데 놓인 기둥과 욕조가 없는 것,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른 점, 그리고 선반에 놓인 고전작가(그리스 로마 시대를 포함)의 반신상 대신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것만 제외하며 정확히 '허탕'의 무대 장치이다.
카나리아가 울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두 주인공(대리석에서). 2막에서 그들은 카나리아가 노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카나리아를 여자로 대체해 본다면...? 게다가 '허탕'의 무대에서는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새소리의 음향까지 있다.
'대리석'의 2막 도입부. 한 죄수는 헤드폰을 쓰고 있다. '허탕'--- 한 죄수가 무언가를 쓰고 사이버 게임을 즐기고 있다. 영상과 무대가 어우러진 이러한 '사이버 공간'은 '대리석'의 2막에서 무대가 움직이며 나타난 아름다운 정원을 보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좀 더 세부적인 사항들의 유사성은 접어두고, 마지막 장면을 한번 보자.
여태껏 그다지 현실성 없이 진행되던 극은 연장자 죄수가 감옥을 나갔다 돌아오면서 ('허탕'에서는 사이코드라마를 벌이고, 여자의 진부한 과거가 되살아나면서) 삶 혹은 살아있다는 것의 현실성으로 바뀌어간다. ('대리석'에서는 두 주인공이 칼싸움을 하다가 하나가 피를 흘리게 되면서 살아있다는 것-실존에 대해 말한다) 그렇게 흐르던 극은, 연장자 죄수가, 격앙된 다른 죄수를 두고 허무할 정도로 조용히 감옥을 나가며 끝이 난다. '대리석'에서는 감옥을 빠져나갔다가 카나리아에게 줄 밥을 사가지고 돌아온 연장자가, 발작하듯이 흥분한 다른 하나를 그냥 둔 채 조용히 누워 잠이 드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물론 '허탕'이 '대리석'과 100%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에서 나열한 것들(그리고 모두 나열하지 못한 세부 사항들까지)이 전부 우연의 일치일까?
외면적 갈등이 없이도 갈등이 생겨나는, 그래서 당시에는 숱한 비난과 의구심을 자아냈던 체홉의 극이 지금은 연극사에 있어 고전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런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그 첫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부 사항만이 좀 비슷할 뿐이라면 우연의 일치로 여기며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큰 틀이 비슷하고 세부 사항들이 조금 다른, '구상 자체가 기발하고 신선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장진 씨의 '허탕'....
95년 예장문학상 수상, '창작극'이라고 하는 장진의 '허탕'을 브로드스키는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자신의 난해한 희곡 '대리석'이 발표 15년 만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인의 구미에 맞게 각색되어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에.... 하지만 어쩌면, 이걸 보는 한국의 관객 중 누구 하나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지하에서 슬퍼할 지도 모른다.... 그 후 장진은 표절에 대해 큰 해명 없이 문학상을 반납했다.

 

 

 

 

작가소개
'대리석'(MAPAMOP)은 브로드스키가 1984년에 발간한 희곡이다. 그는 詩作을 주로 해왔으나 최근 수필과 희곡도 발표하고 있다. 역자는 그간 브로드스키의 작품세계를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던 중 본 작품을 지난여름 우연히 발견하여 이 가을 들어 번역을 해보기로 작정하고, 지지부진하던 때에 마침 노벨상 대상자로 물망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손을 댔다. 이제 수상자로 확정되어 이러한 졸역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 한편 반갑기도 하지만 오역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어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번역이란, 특히 이렇게 난해한 人物의 작품에 대한 번역이란 기왕 반역이 되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 아닐까 한다.
그간 소련에서 금서로 취급되던 브로드스키의 작품을 최근 외신에서 보도된 내용으로 보면 소련의 문예지 '노브이 미르'(新世界)가 지난 9월 그의 작품을 해금 시켜달라고 소련당국에 건의했으며,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고르바초프 정권의 개방정책에 편승하여 소련에서 출간을 허락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간 빠스째르나크, 두진체프 같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와 더불어 이루어진 해금으로 소련문학계에 새바람이 불지않을까 기대된다.
자신의 망명을 인정치 않고 해외에 임시거주중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브로드스키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향수와 애정으로 더욱더 러시아문학의 전통을 잇는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이며, 세계문학 속의 러시아문학의 영향을 심화시키리라 여겨진다. 또 47세라는 젊은 나이와 왕성한 창작열로, 이번 노벨상을 받은 이후에도 많은 활동이 기대된다.
브로드스키의 작품들은 비정치성을 띠며 테마는 주로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신의 문제 등을 다루어 형이상학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성향은 러시아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이, 특히 안나 아호마또바와 오십 만젤쉬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존 던, 엘리엇 등 영국 시인들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그의 문학세계는 인간의 조건, 신 등 형이상학적 주제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으나 러시아문학 전통에 따라,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이 경감되어 있지 않고 상징화와 추상화를 봉하여 농축 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몽상적, 환상적 또는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특히 '언어를 사랑하기에 글을 쓴다.'로 할 정도로 말에 애착을 갖고, 뛰어난 언어능력을 구사하고 있다. 모국어를 아끼는 그는 미국에 망명해서도 주로 러시아 어를 구사하여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리하여 난해하기까지 한 그의 문체는 넘치는 재기에 의한 해학과 유머가 깃든 단어들로 추상성과 상징성을 담고 있이 독자에게 부단한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시는 흔히 脚韻과 頭韻을 맞추고 고려하여 시어를 골라 서정적으로 썼음에도 해석은 지난하기가 일쑤다. 전통적 기법을 현대감각에 맞게 되살려 쓰며, 절제와 풍요를 두루 갖춘 문장을 구사한다. 러시아문학사에서 그는 솜로비예프, 푸쉬킨, 빠스쩨르나크 둥의 전통에 충실한 것으로 평가 된다.
그의 시작품들은 주로 전통적인 장르인 짧은 서정시와 긴 장시(POEMA) 들로 나누어진다. 그 시들은 많은 경우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고 그의 수필과 희곡 '대리석'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의 작품들 속에는 페시미즘 적 철학이 질게 깔려 있다.
1965년에 출간된 그의 첫 작품집 '단시와 장시'는 1963년 이전에 씌어진 50편의 서정시와 9편의 장편시,1964년에 씌어진 9편의 서정시를 담고 있는데, 이들 중 몇 편은 억류생활 중 씌어진 것이다. 그의 성숙한 시구의 특징과 고독한 관점이 이미 여기에 나타나 있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John Donne 에게 바치는 비가'로서, 이 작품 속에서 사고하는 자의 영혼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과 물질을 초월하여 천상으로까지 승화된 이 시 때문에 슬피 울고 있다. Issac과 Abraham 의 이야기를 다시 함으로써, 회생의 효능과 구원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회고로 이끌어간다. 작품 행렬을 여러 문학적인 인물들의 독백으로 이루고 있는데 (Harlequin, Myshkin왕자, Hamlet 외 다른 인물들),여기에서는 각 인물들이 왜곡되어진 세계관 속에 갇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장편 시와 서정시 전편에 걸쳐 악마에 대한 무기력함이 흐르고 있다. 이 악마는 인간들이 갈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 유현, 살인, 전쟁이 외로움, 소외, 허무와 마찬가지로 어디든 널려 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성취와 온정을 갈구하고 있고, 죽음은 어디든 편재해 있으며, 동시에 무의미하다. 이러한 경향은 몇몇 작품의 제목과 서두행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영원한 전쟁', '푸쉬킨에 부치는 비문', '레닌그라드 근처의 유태인 묘지', 구어체의 구절들, 자유분방한 시구, 그리고 꼭 맞지 않는 운율 등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두 번째 작품집인 '황야에서의 멈춤'은 현재까지의 브로드스키 작품집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작품집은 58편의 서정시,8편의 장편 시, 긴 극적 대화체인 '두 정신병자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1962년과 1969년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몇 편의 시들은 이전의 작품집에서 뽑아온 것이다). 그의 작품들의 기본흐름은 변하지 않고 있지만, 새로운 장치, 기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는 기교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거기에는 별도로 한 부분을 할애하여 사랑의 주제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집에서 전에 없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이별과 상실의 고통이다. 여기서 한 편의 시에서는 후회하는 Aeneas를 바라보고 있는 Dido를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편 시들의 한 부분을 마무리 짓는 싯구로 '안녕, Veronika 아가씨'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사랑의 상실이 더 큰 상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북쪽지방에서 쓴 시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조그만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황량한 숲과 늪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그려놓고 있다. 억류생활 중 겪었던 고통에 대한 인상은 장편 시에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병 속의 편지' 가 그러하다. 이 '병속의 편지'는 난파선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침몰'의 느낌을 평범하게 나타내는 비유적 작품이다. 형식상으로는 사랑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브로드스키가 석방된 이후에 씌어진 서정시는 자서전적인 성질을 띠고 있지만, 특기할 만한 사건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장편시들 중의 몇 편에서는 문화의 본질에 대해 광범위하게 진술하고 있다. 제목 시인 '황야에서의 멈춤'은 레닌그라드에 있었던 그리스 정교교회의 파괴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것이다. 이 시의 결론에서 그는 각 문화는 문명에 대해 그 나름대로의 회생을 치러야 한다고 하고 있다. T. S 엘리엇의 죽음에 부치는 시'는 Eliot 이 세상에 대해 품은 사랑을 기려 바친 시이다. 극적인 시인 'Gorbunov i Gorchakov'는 고통이란 내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야기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집의 특징은 고전적 작시법으로 돌아갔다는 것과 약간 오보격의 운율을 사용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1972년에 이민을 한 이후부터 브로드스키는 두 새의 훌륭한 시집을 냈다. 1964년부터 19기년 사이에 씌어진 시들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시대의 종말' (1977)과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쓴 시들을 담고 있는 '연설의 일부"(1977)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 두 작품집은 그 성격이 다르다. '아름다운 시대의 종말'에서는 철수하고 난 후의 불모, 황량함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회의는 더욱 깊이지고 아이러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집의 시들에서는 이전의 작품집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온정에 대한 고통스러운 향수를 그리고 있지 않다. 제목 시에서, 시인의 세계를 나타내는 시어들이 비전이 전혀 없는 잔학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시들에서 명확해지는 짓처럼,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연설의 일부'에서, 대부분의 시들은 이주 중에 씌어진 것으로, 움직임을 반영하고 있지만 즐거움은 없다. 서구 문명은 다양성을 구가하며 안락한 것으로 그려지든지, 인공물로 가득 찬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항상 의미를 상실하고 외로운 것으로 나타난다. '로마의 비가'(1982)에서의 도시의 심미적 편향과 역사적 유산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단순한 쾌락주의에 대한 회의만 지배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