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괴테 '신들과 영웅들과 뷔일란트'

clint 2016. 11. 15. 22:55

 

 

 

 

 

 

 

뷔일란트를 향한 풍자극 신들과 영웅들과 뷔일란트1773년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쓰여졌다. 괴테는 뷔일란트의 작품 아가톤Agathon무자리옹Musarion.을 통해서 고대에 눈뜨게 된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서 괴테는 뷔일란트에 대한 존경심은 그대로 갖고 있었지만 그를 더 이상 스승으로는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177311일부터 뷔일란트에 의해 편집되었던 독일의 메르쿠어지에 대해 괴테와 그의 친구들은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으나 실망하고 말았다. 괴테의 풍자는 뷔일란트의 오페레타 알케스테를 향한 것이며, 특히 메르쿠어지에 실린 <어느 친구에게 보내는 오페레타 알케스테에 대한 서한들을 읽고 뷔일란트에 대한 풍자극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는 알케스티스 소재는 두 가지 모티프, 즉 다른 사람이 대신 죽음으로써 한 사람의 죽음이 연기된다는 모티프와, 죽음의 신과 싸워 이미 죽은 사람을 지하세계로부터 다시 불러온다는 모티프를 포함하고 있다. 페라이의 젊은 왕 아드메트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아폴로 신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죽는다면 그를 살려주겠노라는 특혜를 베푼다. 이때 젊은 왕비 알케스티스가 희생을 자처하고 죽는다. 아드메트의 초대를 받고 놀러온 헤라클레스는 한 시종으로부터 그 슬픈 소식을 듣고 알케스티스를 지하에서 구출하기로 결심한다. 생명을 건진 대신 눈이 멀게 된 아드메트는 알케스티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뷔일란트는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에 변화를 가하여 아드메트와 알케스테 부부의 관계를 더 내적이고 애틋한 것으로 형상화했다. 또 헤라클레스의 형상을 슬픔에 찬 왕의 궁정에서 시끌벅적한 연회를 즐긴 데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알케스테를 구원하러 지하세계로 가는 길을 떠맡는 것이 아니라, 우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에우리피데스 작품에는 없었던 알케스테의 여동생으로서 델피로부터 신탁을 전해주고 헤라클레스에게 알케스테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도록 암시하는 파르타니아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었다 여기서 뷔일란트는 알케스테의 죽음을 자발적인 희생이 아니라 신탁에 의해 세상이 다 아는 일로 만들었다 뷔일란트는 특히 헤라클레스콜 행동하는 영웅으로 이상화하려 하였고, 에우리피데스 작품에서의 희극적인 요소를 포기하고 남편을 살리기 위해 고독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알케스테를 통해서, 그리고 자기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아드메트를 통해 엄격한 비극성을 고수했다. 그런데 뷔일란트가 가한 이러한 변화들이 괴테에게는 고대의 위대함, , 숭고함을 약화시킨 것으로 생각되었던 데다가 뷔일란트가 메르쿠어지에 실은 <서한들>에서 보인 허영에 찬 자화자찬에 자극되어 괴테는 익살극 신들과 영웅들과 뷔일란트를 쓰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사자(死者)들의 대화형식을 취하여,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신들과 영웅들이 현재를 주제로 대화하도록 함으로써 신들과 영웅들에 의해 이미 구현된 차원 높은 가치와 보잘것없어 보이는 현재가 대비되면서 풍자의 효과를 상승시킨다. 이 익살극은 어떤 사건의 진행이 아니라, 뷔일란트와 에우리피데스 및 원래의 인물들, 알케스테와 아드메트, 그리고 헤라클레스 사이의 대립이 날카롭게 드러나는 일정한 주제에 대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괴테는 자기가 만든 인물을 통해 뷔일란트의 어느 한 작품에 대한 패러디에서 그치지 않고 뷔일란트에 대한 전반적인 풍자로 확대시키고 있으며, 그가 고대의 위대함과 삶의 위대함을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중에 괴테는 너무 개인적으로 날카로운 풍자극을 세상에 발표한 것을 후회하였다 더욱이 괴테는 사실상 뷔일란트의 작품에서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일방적으로 풍자만 한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런데 뷔일란트는 메르쿠어지에서 괴테의 이 작품을 훌륭한 풍자극으로 추천하였다. 그 후 괴테는 뷔일란트와 바이마르에서 만나 교류하게 되고 뷔일란트를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다.

 

 

 

 

크리스토프 마틴 뷔일란트(C. M. Wieland)는 1733년 남부 독일 오버홀트하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의 가정의 신앙적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작품을 썼으나 후일 계몽주의 사상에 접하면서 문학적 성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흔히 문학사에서 계몽주의의 철저한 실천자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계몽주의란 1720-1785년의 범 유럽적 정신사의 한 시기로서 비판적인 인간의 이성과 사유의 힘으로 근대적인 문화와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합리주의적인 정신운동사조이다. 윤시향에 따르면 계몽주의 문학은 관용을 사회적인 덕성으로 표방하고 세계시민사상을 고창햇으며 또한 문학은 유용하고 즐거움을 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주의가 종교 중심의 중세적 인간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합리적 판단 능력에서 절대적 진리 기준을 찾아 보려는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뷔일란트는 그 것의 한계를 너무나 명확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보여준 작가라고 보인다. 계몽주의로 계몽주의 세계관을 비평했다고할까! 절대적 가치 기준이 무너진 사회에서 정의란 결국 힘이 정의이며 그 힘들이 팽팽하게 대립된 구도 속에서 합리적 판단이란 얼마나 나약한 기준인가 하는 것을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뷔일란트의 예언은 맞아 떨어진다. 당시 가장 학문이 발달하고 기독교 국가이며 일등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독일이 세계 2차 대전의 핵심적인 주동자이자 민족을 우상화해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 한데까지 이른 것이 합리주의의 종말인 셈이다. 2차 대전 이후 인류에 대한 낙관론은 철퇴를 맞은 것이며 인간이 결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님을 비싼 대가를 치루고야 배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