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존재위치의 정립을 시도하는 뒤렌마트는 이 작품에서『죽음은 우리가 마지막 도달하게 되는 생의 극점이다. 그러나 죽음은 단지 앤티클라이맥스, 곧 최종적 전령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제 위에서 주인공 볼프강·슈비터의 움직임을 통해 비극과 희극사이에 놓여 있는 그로테스크 한 상황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얼마 전 한 병원에서 죽었다가 소생한 노벨상수상작가 슈비터는 두 번씩 발부된 사망진단서에도 불구하고 땅속에서 뛰쳐나와 끊임없이 작렬하는 생명력으로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차례차례 저세 상으로 보낸다.
이 작품은 66년에 초연 됐는데 관객은 물론 비평가들까지 당황시켰다. 이 작품만이 지니고 있는 웃음·놀라움·두려움의 두리뭉수리는 부조리의 작품 세계에서도 뚜렷한 조화를 이루고있다.

뒤렌마트의 『메테오』에서는 대부분의 전기 작품에서 보여졌던 혼란스럽고 불가해한 세계에 맞서 외롭게 투쟁하는 '용감한 인간'이라는 양극화된 구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뒤렌마트는 이 작품속에서 '우연'의 계기를 최대한으로 절대화시키는 가운데; 그의 코미디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계몽주의 이후의 합리적 경험적 가치체계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의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연극에서 늘 심각한 의미를 찾으려는 그릇된 경향에 대한 ‘모자이크’ 같은 에피소드를 연결하여 ‘즐거운 연극행위’를 제시해 보려는 이번 실험극장의<알 수 없는 노릇이군>(원명<메테오>)은 몇 가지 가능과 제한을 시사해 준다. 필요에 의해서는 제한에 도전하는 예술적 결단이 요청된다. 경쾌한 희극적 율동 속에 간간이 섞이는 멜로드라마적 경향은 전체적인 ‘톤’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의 일부는 처져 버린다. 비록 작품의 결함에서 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연출에 의해 차단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인 것이다.
상황설정은 죽음이 없는 축복 받은 삶, 부활이나 영생도 짐이 된다는 성서적 ‘패러디’이다. 기도의 대상이 된 죽음이라는 역설 때문에 1969년 1월 취리히 초연 때 ‘독신(瀆神)’이라고 규탄받기도 한 이 작품의 주인공 슈비터는 자의에 반해 자꾸 살아난다. 그래서 관객은 끝까지 허점을 찔린다. 주변에 있는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죽어 가는데 진작 죽고 싶은 주인공은 죽어지지 않는다. 낮이 계속되면 미친다는 이런 희극적인 비극의 상황 속에서 코미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반복의 형식과 무대시간은 권태와 자동 인형화되는 현대적 인간의 상황과 일치되어 있다.
슈비터 역의 오현경은 인간적인 온갖 세균이 득실거리는 죽음을 객관적으로, 즉 거리를 두는 희극으로 체현하는 데 몰두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속에 드러나는 사악에 대한 유기로서의 죽음이다. 에피소드의 연속 속에 등장하는 다른 등장 인물들은 성격으로서보다 도형(圖形)으로서의 효과가 적격이며, 그 점에 있어서 연출(황은진)과 연기는 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연출의 희극적 문제 제시의 수법은 모범적이다. 연극 일반에 대한 것으로 대사전달의 훈련은 역시 문제로 남지만 무대장치나 의상, 소품 특히 조명 등 보조기능의 계산적인 동원은 이번 공연의 앙상블에 활력소로써 기여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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