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평 - 까미이으 아마리 Camille Amary
「장엄한 예식」에서 「대관식」에 이르기까지, 「건축사와 아씨리 황제」에서 「쾌락의 정원」에 이르기까지, 아라발은 자아에 대해 일관된 탐색을 계속해 왔다. 이 희곡들은 통과의식 (通過構式)들 로서 등장인물들이 경험한 여러 사건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청년기의 세계를 되뇌게 하며, 어른의 세계를 통해 아이들의 푸른 천국을 보여 준다.
「장엄한 예식」은 타인들과의 교섭을 위해 고독과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쓰는 까바노자의 부산하고 비장한 생애를 통해 우리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정화시켜 주었다. 「대관식」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 - 두 얼굴의 아내 모두의 도움을 얻어, 정신적 금욕 즉 깨달음과 사랑에 의한 행복의 탐색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건축사와 아씨리 황제」에서 건축사는 황제한테 어머니의 코르셋를 괴상하게 입히고 모자를 씌워 놓고는 황제를 삼켜 버림으로써, 아라발은 야만적이면서 ‘축제적’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 적인 주제를 취한 것이다.

이제 아라발은 유명하긴 하지만 고독한 한 젊은 여배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불행한 여인은 몽상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작가는 실은 절묘한 기교로 꿈과 현실을 뒤섞어 놓은 현란한 이야기를 짜나가고 있다. - 우리가 어떤 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 셰익스피어의 「태풍」에 나오는 프로스페로가 보여 주듯이, 우리는 ‘우리가 꾸는 꿈과 똑같은 천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스는 추억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반인반신인 제농(원숭이)과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그는 살과 뼈가 있는 진짜 인간인가? 무대에는 또 다른 사람들, 어릴 때 알았던 마술사 떼록과 그녀의 분신이며 복사판이기도 한 학교 소꿉친구 미아르까가 동장한다. 여배우는 고독을 후광으로 얹고, 사악하고 파괴적인 세상, 참아 내기 힘든 수녀들의 세계, 스페인의 종교 재판의 실상(작가가 감옥에서 출소하고 나서 이 희곡의 창작을 끝맺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소비 사회의 떠들썩하고 거짓된 세계,
불순한 센세이션을 탐하는 사회 (여기서는 텔레비전으로 보여준다)를 휘저어 놓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허구에 도전하고 있는 만큼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망상이다)
라이스는 샤리브드와 실라 사이를 왕래하면서 그녀 예술의 최고봉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쾌락의 정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친구 미아르까를 희생시켜야만 한다. 이 극에 나오는 네 사람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제각기의 모습을 지닌 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이 희생은 위대했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을 상기시키는 너무나도 끔찍한 잔혹 속에서 시행될 것이다. 결박당하고, 눈을 찔리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가사 직전에까지 이른 미아르까는 우리가 보는 눈앞에서 라이스가 휘두르는 커다란 식칼에 잘려서 죽어 간다. 관객들은 이 극에서 넘쳐나는 소리와 광란을 확연하게 보게 될 것이다.
라이스는 지옥으로 내려가기 위해 떼록을 안내자로 삼는다. 그는 악사이며 마술사이고 단테의 버질과 똑같이 깨우침을 주는 아버지가 되기도 하며, 문어가 우글거리는 저 깊고 깊은 무의식의 심연을 가리켜 주기도 한다. 그 곳은 파우스트의 ‘어머니들의 왕국’으로, 아무리 찾으려 애를 써도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다. 미아르까와 떼록은 희생을 자처하면서까지, 라이스가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는 가증스럽고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둔다. 그들은 잠시 무서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증오에 찬 얼굴을 해 보인다. 그것은 라이스가 길을 되짚어,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 어린 시절과 즐거웠던 추억의 미궁 속을 헤매고 다니겠다는 마음을 아예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라이스가 제농과 함께 알 속으로 들어가, 하늘로 새로운 승천을 하면 반인반신은 드디어 말더듬이를 멈추고 인간의 말을 하게 되며, 라이스는 완전한 남녀 양성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라이스와 같이 ‘쾌락의 정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제롬 보쉬의 「쾌락의 정원
이 희곡이 쓰이어지게 된 동기는 대단히 기이하다. 선동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자, 작가 아라발은 「쾌락의 정원」을 쓰기 시작하면서, 돌연 부정한 사회, 폭력 경찰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라발의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고 비극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 틀림없다. 지하 감방의 어둠 속에서, 간수의 감시 아래, 우물 밑바닥에 버려진 채 잊혀진 것처럼 (이 강박관념은 「건축사와 아씨리 황제」를 상기시킨다), 그는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숨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변신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이전의 희곡들(특히 「두 사람의 사형집행인J)에 이미 언급됐다. 아라발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세상에 두 번 태어나게 된 것이며,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 연대 의식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쾌락의 정원」은 이 경험의 흔적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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