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케트에 의해 1953년 쓰여진 희곡<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다 할 스토리 없이 정적인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의미 없는 대화만이 연출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건달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의 도착을 기다리며 전후사연을 알길 없는 자신들만의 시적인 대화를 나누지만 끝내 고도는 오지 않는다.
무대 장치는 ‘시골길, 나무 한그루’ 뿐이다. 그곳에 구두를 벗으려고 낑낑대는 에스트라공(고고)과 그의 친구 블라디미르(디디)가 있다. 그들은 작은 무대 안에서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으며 고도를 기다린다. 밤이 되자, 한 소년이 고도의 소식을 가지고 온다. 오늘은 오지 못하지만, 내일은 꼭 오겠다는 소식을. 2막도 마찬가지지만 화자가 바뀌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보이는 포조와 럭키가 1막에서는 포조와 럭키는 건강해 보이는 반면 2막에서는 포조는 장님이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두 막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1,2박 둘다 자살을 꾀하지만 실패한다. 2막이 끝날 무렵까지 고도는 오지 않는다. 또 다시 나타난 소년은 1막에서와 비슷한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고고와 디디가 나무 앞에 선 채로 극은 끝난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고와 디디가 고도를 기다린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고와 디디는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했을까. 고고는 벗겨지지 않는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디디는 고고의 잊어버리는 습관에 절망하다가도 금세 또 고고와 장난에 빠져들기도 한다. 서로 질문하고, 욕하고, 싸우고, 모자를 바꿔 쓰고, 목이나 매자는 이야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그들은 죽지 않고,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막 : 막이 오르면 저녁 무렵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시골 오솔길이 무대 위에 보인다. 에스트라공이 자신의 신발을 힘겹게 벗으려고 애를 쓸 때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뱉는 듯 한 대화가 두 인물 사이에 오고간다. 대화의 관점은 이 두 인물은 어떤 고도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만날 장소, 날짜, 그리고 고도의 누구인지 왜 오는지 확실하지 않다. 고도를 기다리며 이 두 나그네는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데 지쳐버린다. 두 사람은 시간을 보내면서 잠을 자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이내 화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 볼까 하는 공상을 한다. 에스트라공을 블라디미르와 함께 고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홍당무를 맛본다. 이 때 무시무시한 비명이 울리면서 다른 한 쌍의 인물이 무대에 등장한다. 주인인 포조는 자신의 이 땅의 주인이라고 소개하고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잠시 한담하고, 쉬어가기 위해 멈추어 선다. 포조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로 자신과 럭키의 노예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석양의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련할 정도로 애를 쓰고 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겐 혼란과 지루함이 더할 뿐이다. 포조는 이 두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럭키로 하여금 올가미 춤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도록 하고, 사색하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오히려 럭키의 엉뚱한 길고 긴 독백을 강제로 멈추게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 후 포조와 럭키는 두 인물에게 작별을 고하고 무대를 떠난다. 곧 이어 한 소년이 등장하여 블라디미르에게 오늘 저녁에 고도는 오지 못하고 내일 확실히 올 것이라고 전한다.

2막: 다음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 하지만 전 날에 벌거벗고 있던 나무에 몇 개의 잎이 달려있다. 블라디미르가 무대에 등장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어 무대에 등장한 에스트라공은 매일 밤 반복하여 두들겨 맞는 일에 화를 낸다. 곧이어 이 두 사람은 서로 화해를 하고, 지난 시간들과 전날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려고 애쓴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과연 전날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1장에서와 같이 이 두 주인공은 먹고, 자고, 신발을 신으려고 애를 쓰고, 모자를 서로 교환하고, 포조와 럭키의 흉내를 내며 논다. 에스트라공이 무대에서 나가려는 순간, 깜짝 놀라 다시 돌아온다. 잠시 이리저리 살펴본 후, 두 사람은 서로 다투고 이내 화해한다. 그리고 체조를 하듯이 몸을 움직이고는 하늘의 가호를 빌면서 나무의 모습을 만든다. 이 순간,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하지만 포조는 장님이 되어 있다. 럭키는 넘어지고, 그 상태에서 포조를 끌고 간다. 오랫동안 고심하고 난 뒤, 에스트라공은 그를 도우려 하지만 넘어진다. 네 사람은 서로서로 뒤죽박죽 엉겨버린다. 겨우 사태가 수습이 된 후, 포조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또한 럭키는 벙어리였다고 주장한다. 언제부터 럭키가 벙어리가 되었냐는 질문에 포조는 화를 내고, 럭키와 함께 무대를 떠난다. 다시 둘만 남게 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포조가 거짓말을 한 것일가, 포조가 혹 고도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 휩싸인다. 전날과 같이 소년이 무대에 등장하고는 자신은 이곳에 결코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전날과 똑같은 메시지를 남기고 퇴장한다. 전날처럼 이 두 인물은 자살을 해 볼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와 행동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작가가 의도한 논란의<고도>의 정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자들과 비평가들이 애를 썼다.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인 로브그리예는 ‘고도’를 ‘신(God)’으로 단정 지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고고와 디디가 바로 ‘고도’라는 답을 내놓기도 했다. 1953년, 프랑스의 바빌론 극장에서<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연출한 로제 블랭이 베케트에게 ‘고도’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병사의 군화를 뜻하는 프랑스어 고디요(Godittot)나, 고다스(Godasse)를 뜻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베케트의 대답은 ’고도‘를 더욱 더 미궁 속에 빠뜨렸을 뿐이다.
실체도 없이 고고와 디디를 기다리도록 만드는 ‘고도’는 꼭 시간을 닮았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시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시간은 정해져 있음, 즉 유한하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그토록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이 미지의 ‘고도’라는 작자 역시 극이 끝나도록 도착하지도 않으면서, 끝끝내 고고와 디디를 묶어놓고 있지 않은가.
만일 ‘고도’가 시간의 속성과 비슷하다면, 고도는 이미 도착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가 이미 도착한 것이고, 미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는 없다. 현재는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곧바로 과거가 되어버리고, 미래는 도착하는 순간, 현재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시간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베케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유토피아를 묘사한다. 인물들은 불구가 되어있고, 자연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회색이고, 역사는 종말에 이르렀다. 아직도 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것들은 살아간다기보다는 시들어가면서 종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면서 제멋대로 되어버린 항상 무의미한 행동들로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것들 간의 소통은 독백에 불과하다. ‘너는 더 이상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너는 바람소리만 듣는다’ 는 식이다. 바로 이러한 황량한 풍경으로 인해, 그것을 황량하다고 보는 우리의 인식속에서,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단초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베케트의 작품들이 따르는 논리는 분명 ‘괴멸의 논리’요 그것들을 대표하는 역사는 분명 ‘몰락의 역사’이다. 그러나 베케트에게서나 아도르노에게서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성을 발견한다.
부조리 연극에 속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현저하게 사랑이 결핍된 인간들과 그런 상황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이들 연극이 ‘否定의 연극’으로 불리고 있다. 부조리 연극이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방향감 그리고 인식감을 상실하고 있다. 이들에게 남아있는 감정은 세계와 자기자신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일 뿐이다. 부조리 연극의 작품들은 이러한 저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어떤 확실한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의 목적을 굳게 믿어야만 가능하다. 어떤 문제에 합당한 해답을 얻을 수 없을 때 그 행동은 자연히 탈선적이거나 엉뚱하거나 또는 파괴적으로 변한다. 따라서 부조리 연극의 작품에는 전통적 의미의 행동은 없다. 있다면<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나오는 반 자살적 행동이 있을 뿐이다.
아무런 다른 장식이 없는 무대 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마치 모두가 없어진 우주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생명체인 양 움직이고 있다는 역설적 상황을 우리는 확인한다. 이들은 결코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잔인하게 굴거나 아니면 공격적인 무관심으로 상대방을 대한다. 그러나 결코 헤어지지 않으며 헤어지지도 못한다.
부조리 연극의 세계는 무서움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모든 것이 상실된데 서 연유한 ‘없음의 공포’ 로서 한편으론 이것의 정반대인 경우 상실된 것을 모두 찾아내려는 ‘있음’의 세계에 대한 강력한 열망일 수 있다. 부조리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절망적이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허무주의자이면서도 결코 자살을 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케트의 대부분의 작품을 비롯하여 모든 부조리 연극에 속하는 작품들은 모두 금욕적인 연극이다. 종교적이다.
한때는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듯 베케트라는 천재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베케트 자신이 저만치 나아가 연극이 자기의 이상과 세계관을 따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작가적 위치가 너무나 두드러진 만큼 그의 사생활이나 인간성에 이르기까지 그에 관한 여러가지 면이 너무 신격화되어 있다. 어린 시절 그는 무뚝뚝하고 인사를 잘 하지 않아 어머니에게 무수히 매를 맞았고, 학창시절그의 성적은 중간정도였지만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 스페인어등 언어과목등은 우수했다. 성인으로 카드놀이등 도박을 즐겼으며 말이 없었으나 일단 말문이 열리면 번뜩이는 기지로 주도권을 잡았으며 준수한 용모에 여자는 많았으나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일단 사랑을 느끼는 상대와는 며칠밤을 침대에서 나오지 않을 만큼 뜨거운 정열을 가졌다. 그는 비정치적인 인간이었으며 실존주의 철학보다는 제임스 조이스와의 문학적인 교류 및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연구되어 진다. 조이스의 문학세계와 베케트의 그것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조이스가<율리시즈>같은 작품에서 사물을 종합하고 집적한 반면, 베케트는 가능한 사물을 세밀하게 분석해나가고 그 모든 것을 방치해 두는 편이다.

베케트 극의 등장인물들의 중요한 특징은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해체되며 따라서 수동적인 하나의 오브제라는데 있다. 사실 등장인물이 극이 전개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등장인물들의 그러한 수동화 현상은 우리로 하여금 극의 영위방식, 나아가 삶의 영위방식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를 재검토해보게 하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다음의 몇 가지 등장인물들의 수동화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이 극에 등장하는 네 사람의 행위자들은 각각 고유한 자기 동일성을 지니는 대신에 둘씩 짝을 지어 하나의 유형을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한 쌍이 이루는 존재의 유형, 포조와 럭키가 이루는 소유의 유형, 소년을 블라디미르 내면의 소리의 메아리로 보는 경향, 따라서 이러한 인격체로서의 인물의 붕괴, 쌍을 이루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인물, 더욱이 유형화되어 감으로써 복수적, 대중적 형상소가 될 뿐, 개인성을 상실해 가는 점등은 등장인물의 수동화 현상의 첫 단계이다.
둘째, 연극이 진행되는 전 과정을 통해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중요한 극적 행위는 ‘기다린다’ 는 것인데, 기다림의 특성이 정태적인 것으로 능동적인 행동을 유보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기다림의 대상인 고도가 오지 않는 한, 또 그들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수동적 자세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에스트라공의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도 오지 않는다’ 라는 대사는 위의 결론을 더욱 선명하게 해둔다. 셋째, 포조와 럭키, 두 인물에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를 들 수 있다. 1막에서 2막으로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포조는 장님이 되고 럭키는 실어증에 걸리는데, 육체적 기형을 등장인물이 피조물로 이동해 가는 첫 단계라고 보는 사라자크의 견해에 따르면 위의 현상은 인간의 해체, 즉 피조물의 첫 걸음이라고 볼 수 있다.
베케트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공간의 특성들을 제시함으로 관객에게 공간 구성의 자율성을 부여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사는 이 작품의 후렴처럼 되풀이 되고 있고 떠나고 싶다는 것, 그러나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강박관념임을 밝혀준다. 여기서 ‘떠난다’는 행위가 공간 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떠날 수 없음은 공간 이동의 불가능을 의미하게 되며 이 작품의 공간은 ‘갇힌 공간’ 이라는 특성이 들어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속해 있는 공간은 무대안의 공간 - 이곳 ‘고도’라는 무대밖에 속한 존재가 와야만 그들이 떠날 수 있음을 바로 고도가 온다는 사실이 고도의 현존, 즉 무대 밖의 공간인 저곳의 현존을 증명해 줄 수 있게 되어 이곳이라는 공간의 경계가 확정되고, 그렇게 이곳과 저곳의 공존은 공간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막이 내릴 때까지 고도는 나타나지 않음으로써<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적 공간은 여전히 출구가 없는 공간이 되고 만다.

이 작품은 부조리연극의 특징인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무의미함이라는 근원적 현실을 직시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부조리 연극은 교훈주의 연극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그저 삶의 무의미하다는 끔찍한 뉴스를 전해주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 무의미한 삶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아무런 암시조차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조리 사상 즉 실존주의 철학과는 다르다. 부조리 연극은 까뮈의 비합리적 우주의 관념을 받아들였지만, 삶의 부조리를 초극해야 한다는 까뮈의 도전은 거부했다. 부조리의 연극은 사르트르가 절대적 도전의 체계는 없다고 한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해결책의 제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무엘 베케트(S. Beckett)의<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가 화제가 된 것은 그 반극(反劇) 형식과 함께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주제 때문이었다.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주물러댈 수 있는 주제의 유연성이라 할까. 감옥에서 상연하면 ‘고도’는 석방의 상징이 되고, 레지스탕스 시절에는 자유와 해방을, 제3세계의 전 지역에서는 ‘고도’가 ‘빵’이 된다는 식의 변용은 널리 유포된 전설이다.
‘고도’는 죽음일 수도 있고, 구세주 예수일 수도 있다. 그렇게 마음대로 변화될 수 있는 주제의식이 이상하게 필자에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50년대의 부조리 연극과 반연극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주제의식과 인물의 성격 부여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고도를 기다리며>의 구조로 보면 모든 등장 인물들은 성격을 갖고 있지 못하며, 줄거리의 플롯은 상실되고 관념적 논리적 사고방식을 위한 도구로서의 언어도 그 기능을 박탈당한다. 종래의 희곡이 지닌, 행위를 둘러싼 플롯과 성격과 언어의 외피를 벗어 던지고 벌거벗은 연극적 행위만이 드러나 있는 것이<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연극적 행위만을 드러낸, 고도를 기다린다는 행동만이 중요한<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을 축내기 위한 행위만이 두드러져서 그 행위의 일관성이나 논리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무대에서의 행위는 연기적 감수성이 작용할 수 있도록 플롯화되고 배우의 연기가 가능해져야 하는데, 이 희곡에서는 서커스의 어릿광대라든가 판토마임곡예 등 민중극적 요소가 많이 도입되고 그런 것이 작품 내용의 표현과 결부된다.
작가 베케트의 세계를 정확한 표현으로 규정짓거나 논증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전통적 희곡론과 대치되고 있는 부조리 연극의 희곡론은 상황과의 관계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에서는 인물이 상황과 대립한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보여주는 것은 인물이 대립하는 상황에 작용해서 그것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을 축내기 위한 짓거리와 지껄임만이 난무한다. 상황이 바뀌어 주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두 떠돌이와 상황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며, 상황은 바뀔 수 없는 것으로 거기 있을 뿐이다.
바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바꿀 수 없는 치열한 내면적정신적 노력의 무위성(無爲性)은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무위의 가치를 갖게 한다. 그것은 무위의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피동의 행위가 아니므로 거기에 드라마를 드라마답게 하는데 불가결의 요건인 행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서 벌거벗은 연극의 행위만을 사면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논리적 사유가 쓸모없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이해 불가능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베케트의 지적 허무주의를 드러내고 그래서 마침내 ‘무대와 배우에 의한 시’를 겨냥한다. 시적 결합을 위한 정신적 에너지가<고도를 기다리며>를 발표하고 공연하던 시대정신이었다면 1985년, 시대의 추이와 함께 산화(酸化)된 이 현대의 고전은 이미 인간의 고립과 불안과 소외의 상황이 드러난 상태,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상성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무위의 행위밖에 보여줄 수 없음으로 그 녹슨 신화의 비극을 더 짙게 색칠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년 전 초연된<고도를 기다리며>는 습격과 충격이었으나, 85년 오늘의 ‘고도’는 일상적 관념이 되어 버려 따분함을 배가시킨다. 이미 작품을 읽거나 보면서 느끼게 되는 지독한 삶의 권태가 오늘의 시점에서는 바로 그것이 삶의 실천 형식으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기 때문에 더 따분해진다. 기다린다는 유예가 아니라 삶을 갉아 먹으며 시간을 탕진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고도’의 기다림은 낭비의 극한이고, 낭비임으로 해서 이 산화된 고전은 해체되어서 새롭게 해석된 자유 앞에 선다. 그 자유를 이미 체험한 연출가에 오태석이 있고 채윤일이 있다. 그런 초연 때와 마찬가지로 임영웅(林英雄)은 원작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행위의 창출에 그치고 그 이상 주장하는 바가 없다. 임영웅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는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일까. 이번<고도를 기다리며>의 말들은 전혀 번역어 같지 않다. 그만큼 말 자체가 우리 것이 되어 있다는 것은 상황도 우리의 이해 안에 있고 우리들 자신이 그런 상황 안에 산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기다리는 낭비의 극한에서 해체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무대에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고도’는 역설적으로 기다림을 폐기해서 기다리지 않는 행동의 반연극성을 연극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된다 하면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해지는 그런 당혹과 장난기와 불안과 권태 등이 뒤섞여진다. 그것이 50년대 서구 연극의 부조리 의식이었고, 반극사상이었고, 그런 현상이 일상을 넘어선 그로테스크의 실체였었다. 60년대의 우리에게 베케트나 이오네스코(Rugene Ionesco)는 늦은 바람이었지만 정통연극에 식상한 관객에게는 참신한 놀라움이었다.<대머리 여가수>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대사 돌려치기라든가<수업>,<의자>등의 괴기와 함께 연극의 불가사의를 보여준<고도를 기다리며>등은 우리의 시대가 난해한 시대에 들어섰음을 증명하는 한 시대의 시그널이었다.
그것은 1969년 12월 그러니까 15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일보소극장이 개관되어 임영웅이 처음으로<고도를 기다리며>를 그 작은 무대에 올렸을 때 우리는 아직도 봉건 잔재의 때가 덕지덕지한 의식 속에 살았고, 그런 사회에서 산업화 사회까지 가는 길목에 넘어야 할 고비는 숱하게 많으려니 했는데 어느덧 우리는 고도 정보사회의 한가운데서 메마른 삶의 밭은 기침소리를 실감하게 되었다. 잠든 의식의 관객들이 난해의 쇠망치로 얻어맞은 이후 15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초연 때의<고도를 기다리며>는 충격이었는데 오늘의 ‘고도’는 일상적 관념이 되어 버렸으므로….
임영웅이 지금은 연극계를 떠난 김성옥과 죽은 함현진과 함께 막을 올린 초연의<고도를 기다리며>는 69년 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함께라기보다는 연출의 선명한 해석과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 그리고 정갈스런 무대로 해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70년도의 재공연, 그리고 73년도의 명동 예술극장 진출로 이어졌었다. 15년 전은 좋은 세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모두 못 산다고 아우성이었지만 그래도 문화적 충격이 그대로 창조의 의식으로 바뀌어서 놀라워하는 만큼 신선한 감정들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감동도 없고 감격과 공감도 저버린 지 아주 오래된 것 같다. 무엇을 봐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고 편한 것만 채근한다. 그런 만큼 삶은 더 따분해지는데 그 따분한 삶을 갉아먹으며 그래도 기다리는 그 무엇이나 남은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우리, 남은 것은 죽음 그 자체뿐인데도….
그런<고도를 기다리며>를 몸으로 겪으며 삶의 불안과 권태와 헛된 소망에 사는 우리에게 이제 현대의 고전이 된 이 작품은 흐르는 시간에 산화되었다. 싱싱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15년 전의 무대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예감이 반영되어 있었으나 오늘 이 무대의 기다림은 우리의 일상적인 기다림이고 일상적인 현실이고 동시에 그것은 ‘보통일’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낡고 진부해져 버린 것일까.
그만큼 임영웅의 ‘고도’는 우리 현실에서 해체되었던 것이다. 79년도엔가 오태석이 창고극장에서 전무송과 이호재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으로 올린<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는 상황을 보다 현실로 접근시킨 연출이었다. 임영웅이 기다리는 삶을 반철학적으로 ‘철학’한데 반해 오태석은 그의 어릿광대 기질을 다분히 도입해서 철저히 철학을 배제했고, 분명히 그의 연출에는 우리의 민속적인 어릿광대 냄새가 풍겨지기도 했다. 베케트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져 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임영웅의 초연 작품과 오태석의 그것을 확연히 나눌 형상의 경계는 없다. 그런 뒤얽힌 형상은 임영웅의 이번 공연까지 연장되어서 서로 무질서하게 필자의 뇌리에 자리 박혀 있고, 어제 본 것이 15년 전의 것이었던지 오태석의 것이었던지 구별할 수가 없다.
거기다가 80년 봄에는 채윤일이 이 작품을 가지고 기다리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무료함을 달래는 실험극을 만들어 81년에 무언극<고도를 기다리는 두 피에로>를 연극회관 세실극장 무대에 올렸으며, 83년에는 극단 뿌리를 동원해서 제대로 된 정통<고도를 기다리며>를 세종회관 별관에서 공연했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공연은 세 연출가에 의해 시도된 셈인데 임영웅 연출 공연이 있기 전에 배우학원을 경영하던 한재수에 의한 명동 예술극장에서의 워크숍 발표와 채윤일에 의한 김성구(블라디미르), 김동수(에스트라공)의 무언극 형식은 길잡이와 곁치기 놀음 같은 별미로 그만큼 시간에 산화되는 현대적 고전의 해체를 가속화시킨 것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로프로 대신했던<고도를 기다리는 두 피에로>에서 자살소동은 로프이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으로 흐지부지된다. 현실과 환상이 그만큼 실험적으로 교체되고 병존하고 혼존하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체의 실험을 허용했던<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번 산울림소극장 개관 기념공연(1985. 3. 9일부터 무기한)에서 다시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본격적으로 그리고 고전적으로 한번 더 연출의 손에서 한국적 ‘고도’가 되어 부활한 것이다.
15년 전에 이미 이 부조리의 반극을 고전으로 해석했던 임영웅 연출의 방식은 부활되는 공연에서 역시 고전의 권위를 부여하려 했고, 그렇게 하여 성숙의 경지에 이른 연출은 이 작품에서 기다리는 종교적 입장에 대한 이해의 여유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 이해가 작품의 치열한 밀도를 묽게 만드는 역작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차피<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릿광대 피에로의 놀이판이다. 치열한 밀도는 놀이판에서 풀어지고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고도’에서는 주목의 대상이 되는 역할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다. 초연 때의 김성옥과 함현진의 경우처럼 이번의 전무송과 주호성은 같은 피에로라 하더라도 생각하는 어릿광대와 생각하지 않는 어릿광대를 대표한다. 실제로 이 두 어릿광대라 그런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지 판단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는 연출의 그러한 이원법에 따라서 두 피에로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피에로 전무송의 철학과 피에로 주호성의 반철학이 어우러지는 무대에 포조(조명남)나 럭키(김동진)의 역할은 아직 풀이 덜 죽은 생채같이 살아 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이 이 작품에서 시를 만들어낸다는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한다.
무대 위의 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연<고도를 기다리며>같은 부조리 연극은 에슬린(M. Esslin)의 말을 빌리면 줄거리를 말하거나 인물을 탐구하거나 이념을 다루고 문제 해결을 노리는 기능을 포기하면서, 그 대신 본질적으로 인간존재의 부조리나 신비에 대한 직감을 무대에 집결시킨다는 것이다. 존재의 직감적 표현이 서정시의 영역이니까<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우리의 존재를 행위로 보인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그대로 시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낱말 이상도 이하일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산울림소극장 개관을 기념하는 임영웅 연출의<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다시 한번 인물들의 시화(詩化)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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