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인혜 '들꽃향기'

clint 2016. 5. 27. 19:49

 

 

 

 

늘상 만나는 할머니 한분이 계십니다.
땅에 닿을 정도로 꼬부라진 허리에 자그만 체구의 할머니는 늘 동네 앞의 쓰레기통 앞에서 빈병과 박스들을 정리합니다. 그것들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고 하는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일을 하십니다. 언젠가 동네 자판기 앞에서 무심코 뽑아 드린 커피한잔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담담하게 받아 드시는 할머니를 뵈며 생각했습니다.
 '나도 저 나이 돼서까지 나쁜 짓 안하고 저 할머니 처럼 깨끗하게 살 수 있을까.'
3대에 걸친 여성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눈물과 한숨의 역사가 아닌 피와 땀으로 가꾸어 가는 여성의 역사를. 땀흘려 일하기 보다는 미모를 가꾸어 신데렐라가 되길 꿈꾸는 여성들을 보며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떼돈을 버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님에도 묵묵히 일해 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강산이 열번 변해도 불황때면 어김 없이 정리대상자가 되어도 몸 사라지 않고 일해온 여성 노동자들의 희망의 노래를.
또 다시 꿈을 꿉니다.
이땅에서 살아 숨쉬는 여성 노동자들의 부지런한 기개가 이천만 여성 모두에게 내려 부디 살맛나는 세상을 열어갈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들꽃향기'는 현장에서 이중, 삼중으로 소외당하고 성적으로 농락당하기까지 하는 여성노동자들의 모습을 역사적인 조명까지 곁들여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극의 내러티브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전형적 무대극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마당극과 노래극 형식을 전폭적으로 수용해서 표현한 무대는 소박하면서도 역동적이었다. 특히 할머니 정학자 역을 맡은 노배우 김정자의 안정적인 연기는 극의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극단 현장 출신의 중견 백은숙도 순발력있는 연기로 극의 재미를 더해 주었다. 꾸준히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작품 속에 담아 온 극작가 박인혜는 일제 시대의 정신대 문제에서부터 현 IMF시대 정리해고 문제까지, 여성문제에 대한 통시적인 시각을 한 가정의 여자들 이야기로 그다지 무리 없이 풀어내고 있어 고무적이었다. 다만, 액정 프로젝트로 쏘아지는 화면의 사진이나 모습이 하나의 무대장치로 시위 현장의 분위기를 담아내는 데는 성공했다고 해도, 식상한 느낌으로 관객들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준 점은 새로운 표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노동문화 전반의 고민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였다. 고개 들어 주변을 돌아보자. 의료보험법을 고치니 오히려 약사들과 의사들의 수입은 늘어나고 보험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뿐이다. 월드컵을 준비한다고 제일 먼저 힘없는 노점상들이나 포스터 붙이는 연극인들을 죄인 취급하는 이 군사문화에 젖은 천박한 정부가 도대체 1천2백만 기독교인이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집단 이기주의라 강력히 제재해야 할 집단에게는 약하면서 노동자들이나 노점상, 연극인에게는 무자비한 현정부나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불감증을 양심이 있는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더 가슴 아픈 상황으로 치달아 가고 있을 뿐…' 이런 불행한 질주의 원인 중 하나가, 이런 문제들을 과감하게 작품으로 다루거나 기타 사회적 행위로 결집시키던 공간의 축소 또는 쇠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올해만 해도 1월에 계획되어 있던 노동연극 전문 극단 한강의 공연이 무기한 연기된 바 있고, 기독교 사회운동단체에서도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못하고 있다. 목소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악순환은 계속될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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