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1975년 11월 18일 인도네시아 가루트 영웅묘지. 양칠성이라는 조선인의 관과 일본인 2구의 관이 함께 재매장된다. 그 이유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 당시 외국인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운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양칠성, 1915년 조선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군에 지나치게 저항하거나 마지못해 순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지나친 열성을 가진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 누구 못지않은 일본에 대한 통렬한 복수와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그가 끊임없이 복종하던 그의 직속 상관 아오키를 언젠가는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일념을 갖게 하고 본심이야 어쨌든 일본의 충직한 개 노릇을 해왔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귀환선을 타기 전 목아지 확인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그들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로 한다. 아오키는 양칠성의 이러한 마음을 막연하게 직감하며 불안해하면서도 그를 끝까지 자신의 부하로 복종시킨다. 양칠성과 아오키의 복잡미묘한 관계는 양칠성의 인도네시아인 처 루카야가 개입하면서 보다 심각성을 나타낸다. 루카는 양칠성에게는 고국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여인이다. 양칠성은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간 조국의 아내가 증오스럽지만 그럴수록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밀려 루카야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가담한 조선인과 일본인 그리고 인도네시아인들은 정글에서 화란인들의 포위망 속에 마지막 최대의 공격목표가 되고, 아오키는 수카르노의 후퇴작전에 반발하여 마지막 전쟁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에서도 아오키는 양칠성을 공공연히 식민지의 개라 무시하고, 후송업무를 담당하였던 양칠성은 공격조로 나가 오히려 역공을 당하게 되어 그 과정에 양칠성은 부상 당한 아오키를 복수심에도 불구하고 구출해내게 되나 결국 사로잡히게 된다. 그들은 함께 사형 언도를 받아 1949년 8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
해설 – 이현희 교수
이번에 국립극단의 정기공연인 <반도와 영웅>이라는 연극도 그 내용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쟁을 소재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인으로서 인도네시아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숭앙되는 양칠성과 일본인 아오키가 주역이 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이 전쟁· 폭력· 파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선(善)함이 악(惡)함을 이기고 교화시켜 다시는 전쟁이라는 파괴, 불행을 발본색원하자는 교훈적인 의미로 후세인에게 절실한 메시지를 남기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세계 제2차대전 중 일본군 제6군(남방군)의 포로 감시원으로 끌려간 양칠성 외에도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이상문이나 박창원 등 70대 인사들의 제한적인 한계성을 극복하고 편 독립투쟁 사실이 숨김없고 과장이나 억지가 아닌 현실감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인도네시아가 무대이고 1943년으로부터 1975년에 걸친 오랜기간 동안의 사실이 차분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반란자와 영웅의 구분이 명백해지고 전쟁, 파괴, 폭력이 얼마나 자유, 평화, 진리, 양심을 좀먹고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가를 웅변 이상으로 잘 대변해 주고 있어 호감이 간다. 일본은 구라파의 독일이나 영국처럼 자연 지리적 조건이나 영토적 집착 때문에 해외 식민지 확보정책을 써 왔다. 1942년에 일본군을 환란의 오랜 식민지를 해방시킨다는 이름 아래 인도네시아에 상륙해서 해방군으로서 군림하고 은인으로까지 자처함을 엿본다. 마치 압박과 신음에 떨고 있는 피 압박민을 위해 자신을 베푸는 척하는 것도 보기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러나 전쟁이 일제의 패전으로 쉽게 끝나자 일제 군인은 실의와 좌절 그리고 죄를 스스로 감지하게 된다. 자기 나라가 세계 최강의 일등 국가이고 참가군인들 역시 권위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패전으로 인해 낙담하거나 부끄러워 자살하는 자도 생겨난다. 일본인의 역사적인 습성이 그러했듯이 자결로 보국한다는 단순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일본 군내의 분위기는 인도네시아가 환란에 저항해서 독립전쟁 5년을(1945~50) 일으켰을 때 이에 적극가담하고 있다. 양칠성도 그랬고, 이상문, 박창원 등 한국 포로 감시원도 그랬다. 이상문이나 박창원 등 한국 청년들은 오래 항일청년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투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은 그 사실이 발각되어 실형을 선고 받는다. 대개 7년 이상씩이었으나 8.15 패전으로 인해 실제 복역 일수는 그리 많지 못했다. 이들은 실형 복역에 관련된 재판 판결문을 입수하지 못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도 아무런 공식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그들의 끊임없는 항일투쟁의 사실이 단지 근대사전공의 역사가에 의해 한국 근현대사에 기록되고 있음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인 동시에 묻힌 역사 사실의 재평가라는 측면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믿어 안도가 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연극을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역사 바로세우기는 이런 경우 매우 절실한 조명이며 평가의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방면에 관심 갖고 있는 역사가로서 의당 이들의 항일투쟁의 역사를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신명감에서 그의 소감의 일단을 피력하는 것이다. 공연의 큰 성공을 기원한다. 이를 통해 국민은 묻힌 민족정기와 역사의 바른 평가에 도달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양칠성과 상상력의 죄 - 작가의 글
‘반도와 영웅’은 1993년도에 집필하였다. 당시의 윤탁 극장장이 상당수의 희곡을 보유할 계획을 세우고 원고료를 대폭 인상하여 청탁을 하였다. 그런데 ‘반도와 영웅’은 연출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았다. 3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빛을 보게 되니 안타깝고도 다행한 일이라 해야겠다. 이 작품의 상연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새 작품을 쓸 수 없었다. 묘한 경험이었다. 이 작품의 소재는 일본 여성 작가(內海愛子)가 지은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赤道下 朝鮮人反亂’ (勁草書房. 1980)에서 얻었는데. 세계 제2차 대전 중 남방군 일본군 제6군의 포로 감시 요원으로 뽑혀 갔던 양칠성이란 실존 인물에 관한 것이며. 물론 대부분은 허구(Fiction)이다. 일본은 이미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계의 자카르타 시장을 낼 정도로 소위 남방에 대한 원대한 포부가 18세기로부터 시작된다. 태평양전쟁 중의 1942년 초, 일본군은 이 화란이 오랜 식민지를 해방시킨다는 형식으로 인도네시아에 상륙, 상당한 은인으로서 군림하기도 하였다. 세계전쟁이 끝났을 때 많은 일본 제국군인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진다. 세계 최강의 일본군이라는 권위와 자부심은 완전히 무너지고 조국에 돌아가기에도 부끄러웠다. 간단히 설명할 수야 없지만, 이러한 일본군 내의 분위기는 인도네시아가 화란에 대항하여 독립전쟁 (1945~1950)을 일으켰을 때. 분연 이에 적극 동조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이때에 조선인 청년들도 다수 가담하였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양칠성은 바로 그러한 사람 가운데의 하나이다. 일본은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여러 나라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에 따라 포로의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었다. 이 포로를 수용할 병력이 너무 모자라게 되자 그들은 조선과 대만에서 포로감시요원을 뽑아 갔다. (조선에서만도 3천명이 되었다.) 2년 근무에 월급 50만원이라는 호조건이었다. 양칠성은 포로 감시 요원으로 뽑혀 갈 때 (그것은 자원이라는 형식의 강제징용이었다.) 이미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바에서 근무하는 도중에 그의 아내가 애들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편지를 받고 실의에 빠졌다. 그는 조실부모하여 그의 형제들이 고모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로움을 타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바에서 한 현지 여인을 사랑하여 결혼하고 인도네시아독립운동에 가담한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모가지 확인'이 두려워 귀국선 타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모가지 확인'이란 화란, 호주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그들을 학대한 일본군인과 조선인 포로감시요원을 (이름을 모르니까) 얼굴을 보고서 '저놈'하고 지목해서 소위 악질군인/ 감시원을 잡아낸 사건을 말한다. 양칠성은 그를 지독히도 못살게 군 일본군인 아오키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다. 그에게 복수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그것은 그의 깊은 내면에만 숨어있는 잠재의식일 뿐이었다. 햄릿은 그의 지적 상상력이 풍부하여 굳이 그의 복수의 살인행위를 즉각 실천에 옮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라고 어느 학자는 해석한 일이 있지만, 양칠성 역시 상상 속에서 복수를 꿈꾸기만 한 인물이었을 수 있다. 어쩌면 어떤 한국인에게서 발견하는 철저하지 못한, 실천력 부족한 ‘원수에 대한용서도 안하고 본때 있게 복수도 못하는', 시원치 않은 덕목일지도 모른다. 그리고서. "우린 평등하게 묶여서 같이 죽지 않아요?"하고 그의 원수에게 내뱉고 죽어 간다. 나 개인의 못난 성격의 일단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일제 때의 암울하고 쓰라린 기억들을 잊어버리고자 한다. 구질구질한 얘기 말고 재미있는 얘기도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지난 백 여 년에 걸친 저들의 비인간적 행위들을 우리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얘기해 주고 싶다. 유태인들은 끊임없이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들을 만들어 낸다. 마치 잊어버릴 만하면 '그러면 안 돼'하면서 기억의 약을 먹이는 것 같다. 나는 이 얘기들을 가능하면 사실의 역사에서 뽑아다 기술하고 싶다. 시극(詩劇)은 역사와는 달리 있었던 일이 아닌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을 다룬다.' 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와는 의도적으로 달리한다. 내 연극 속에서의 사실들은 좀 더 지식 노릇을 하게하고 싶다. 앞으로 자유스런 현대극을 쓸 작정이지만, 지금까지 해 온 사극 내지는 역사를 소재로 하는 사화극(史話劇)이랄지 하는 것을 성급하게 포기할 생각이 없다. ‘반도와 영웅’의 상연을 위해 애써 주신 모든 스탭, 캐스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연출가의 말 “일본의 역사 왜곡은 아직도 우리에게 새로운 상처를 주고 있다” - 장진호
왕의 독살과 왕비의 시해. 항일이냐, 친일이냐의 갈림길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얼룩져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념. 분단, 전쟁, 휴전 그리고 쿠데타와 데모.. 아직도 무엇이 남은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사치스러울지도 모를 이런 질문 앞에 연극 ‘반도와 영웅’이 우리에게 전설처럼 전해졌다. 그 질곡의 시대에 왕도 귀족도 아닌. 애국자도 매국노도 아닌 그 무엇도 되지 못했고, 될 수조차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애가 무언가를 집요하게 요구하며 우리를 잡아끌고 있었다. 그 당시 아무 소리가 되지 못했던 그들의 처절했던 회한과 분노, 절망과 원한이 말이 되고, 외침이 되고, 질문이 되어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권위에 의한 결정과 종속, 노예보다 더 비굴한 삶 속에서 그래도 무언가를 찾아 숨 막히게 달렸던 그들을 향해나도 묻고 싶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이며. 진실은 무엇이냐고 이렇게 뒤늦은 시각에 우리를 뒤덮은 이 커다란 연민은 누구의 몫이냐고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집념으로 아직도 잠들지 못한 그들. 그것을 위해 먼저 이념과 국적을 버렸다. 분노와 수치심을 버렸다. 과장하지도 미화시키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그들을 보여주자! 관객이 깨닫고 나 또한 언젠가는 보다 더 알게 되리라..... 함께 이 작품을 타고 표류했던 극단원들과 작가 선생님 그리고 스탭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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