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강백 '불지른 남자'

clint 2016. 2. 26. 10:57

 

 

 

1980년대에 광주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던 정재현이 10년 넘게 형을 살고 나와 세상을 돌아보는 일종의 순회극이다.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니 세상이 좋아졌다고 이구동성이다. 그러나 재현이 둘러본 오늘의 세상은 10년 전 그가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던 때와 전혀 다름이 없다. 재현은 옛 동지들을 만나보지만 그들은 세상이 변했음을 오히려 더 과장되게 주장하면서 일상의 안일 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군사문화를 상징하는 폭탄주를 매일 마신다. 그들이 말하는 변화의 거짓됨과 거짓에 앞장선 자신들의 변절을 잊고자 함이다. 재현의 종말이 매우 충격적이다. 친구의 양로원에 식사보조원으로 취직한 그는 치매증을 앓고 있는 노인들에게 밥을 먹여주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맞아 죽는다. 외세의 지배를 당하던 때가 더 좋았다고 회상하는 노인들의 잘못된 시각을 고쳐주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작가는 노인들의 치매와 우리들의 건망증을 동일시한다. 10년 전 그가 사회를 향해 의식의 불을 켜기 위하여 불을 질렀지만, '우리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기분을 내면서 불지른 남자를 잊었다. 그가 오랫동안 갇혀 있던 망각으로부터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우리는 냉담하였고, 그의 과거 행위를 비난하였으며, 그를 조롱하다가 끝내 그가 죽은 줄도 몰랐다. 그러나 죽은 재현은 천국에서 다시 우리를 위해 성냥불을 켠다.' 이강백은 가장 주관적인 연극양식인 표현주의적 기법과 극구성을 적용하면서 흑백논리에 의한 인물설정의 결함을 극복했다.

 


YS정권 때 쓴 이 작품은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동자를 주인공으로 했다. 시간이 지나 민주화운동의 사회적 의미가 희석되고 모두가 이기주의자가 돼 좌절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대에 너무 '눌러 붙어' 이제는 공연 안 된다. 1995년 백상예술대상 희곡상을 받았고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작품으로 호평 받았으나 지금은 전혀 상연 안 된다. 희곡 작가들은 동시대에 메시지를 던진다는 점에서 시의에 민감해야 하면서도 생명력을 의식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경험한다. 이 희곡은 이강백의 작품으로 그에게 1995년 백상예술상 희곡상을 수상하게 한 작품이다. 첫 공연은 채윤일 연출로 성좌소극장에서 1993년 11월 3일부터 12월 25일까지 김학철 주연으로 무대화되었다.

 

주인공 재현으로 출연한 김학철.

 

 

작품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광주 미 문화원에 불을 질러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주인공 재현은 무려 10년 8개월이나 수감생활을 한 후 출감한다. 오랜 수감생활 동안 달라진 점은 신경쇠약증에 걸린 누나와 알콜중독 된 매형이라는 집안 상황과 달갑지 않게 맞이하는 조카들이다. 그는 다시 자신이 머물던 다락방에 숨듯이 살게 된다. 달라진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새롭게 시작하려는 재현에게 일어난 출옥한 3일 간의 일들이 이 희곡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3일 동안 재현은 친구와 선배, 형사, 옛 애인을 만나지만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은 사라지고, 그 어디에도 그런 정신보다는 황폐하고 어두운 면만이 가로놓여 졌음을 확인한다. 그의 출옥을 기다렸다고는 하지만 바뀐 게 없는 세상 속에서 바뀌었다고만 말로 표현할 뿐 그 어디에도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힘든 수형생활을 하고 나온 재현을 거사를 준비한 사람들마저 각자의 안일한 삶 속으로 들어가 아무도 위로하지도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국 출옥한  3일 만에 양로원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들 수발을 들게 된 재현은 노인들이 세상이 오히려 나빠졌다고 옛날을 회상하는데 다툼이 생겨 맞아 죽고 만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외면한다. 결국 죽은 재현은 누나와의 대화를 통해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가장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성냥불을 켰을 때 행복했다고 말을 한다. 세상을 위해 불을 질렸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변의 사람들과 그의 삶만이 망가진 체 외면당한 현실을 드러내며 극은 종결된다. 다시 말해 90년대 현실에 전혀 때 묻지 않은 순도 높은 80년대 개혁아(改革兒)가 겪는 3일 동안의 90년대 현실 돌아보기인 셈이다.

 

 

 

 

모두 10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에피소딕 드라마의 구조를 통해 작가는 공동의 꿈이 있었을 때는 고난에 차 있었어도 희망이 있었는데, 꿈을 상실해 놓고 보니 대단히 우스꽝스럽고 괴기스럽게 보이는 세상의 형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한국연극 1995년 1월, 대담) 그렇기에 단순한 극의 내용에 비해 극에서 언급하는 바는 시대의 흐름과 견주어 만만치 않다. 미술평론가들, 변절한 선배, 형사, 매형이 보여주는 현실 순응의 논리, 훼절 또는 전향의 논리, 보수층의 논리, 소시민의 논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비젼(vision)과 누나인 재숙, 조카, 매형, 남수정 등이 보여주는 혈연의 정, 피해망상증, 보상심리 등등이 어우러져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 낸다. 재현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배치는 그런 점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갈등을 드러내는 데에도 시각적으로 조응한다고 하겠다. 다만 이런 갈등의 관계가 논리적인 구조와 상징적인 구조 사이에 놓임으로써 갈등을 심화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논리적으로 갈등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들 간의 내정된 성격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갈등관계에 비중을 두어 마치 나열된 장면 사이에서 각자의 목소리로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오히려 순수한 열정을 가진 개혁이 구체적인 현장과 실제적인 삶 속에서 부딪히고 좌절되는 양상을 보여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세상에 불을 지른 자의 용기와 희생 그리고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의 갈등 양상에 주목하여 감상한다면 재미가 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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