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브레히트 '투란도트 또는 결백조작대회'

clint 2015. 11. 16. 11:45

 

Turandotoder Der Kongreß der Weißwascher

 

 

 

『천일야화』에 들어 있는 『칼라프 왕자와 투란도트 공주 이야기』는 18세기에 유럽에 번역 소개되었으며,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름답고 고집이 센 투란도트 공주는 결혼을 기피한다. 부왕의 명을 거역하기 어려워 그녀가 궁리해 낸 계략은 수수께끼 세 개를 푸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지만, 못 푸는 남자는 목을 자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 많은 구혼자가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북경에 숨어 지내던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는 정답을 말할 수 있었다. 칼라프는 투란도트가 결혼하기 싫어하는 걸 알고 거꾸로 그녀에게 내기를 건다.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맞히지 못하면 결혼하고, 알아내면 자신이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투란도트의 시녀가 우여곡절 끝에 왕자의 이름을 알아낸다. 그러나 그 사이 칼라프를 사랑하게 된 투란도트는 이름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내기에 진다. 1762년 카를로 고찌가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고, 1802년 실러는 고찌의 작품을 개작하여 투란도트 중국의 공주』를 썼으며, 1923년에는 부르크그라프가 고찌의 드라마를 오페라 풍으로 개작한 바 있다.

 

 

 

'지식의 오용' 내지 권력과 이윤에 봉사하는 지식인의 행태를 주제로 삼고 있는 이 작품에 브레히트가 본격적으로 매달려 작업한 것은 1953년 여름이었고, 그 해 9월에 초고를 탈고하였으며, 이듬해 여름에 다시 손보아 8월에 수정 본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투란도트 소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19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최초의 작품 구상은 1930년경에 나타난다. 30-40년대의 망명 기에 브레히트는 지식인 문제를 대규모로 다루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단편적인 글들을 많이 썼으나, 이 주제를 '투란도트 소재' 와 결합하여 독자적인 드라마 작품을 집필하는 데까지 진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임종하기 2년 전에 비로소 완성된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대작이 되었다.
최초의 구상에서 집필까지의 기간이 길었던 만큼 동시대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역사적 사건과 경험들이 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히틀러의 출세와 지식인 탄압, 중국 혁명과 마오쩌뚱의 승리, 동독의 건설 과정과 문화 정책에 나타난 문제점 등이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인용될 뿐 아니라,히틀러, SA 돌격대, 힌덴부르크, 마오쩌뚱, 마르크스, 아도르노 등 역사적 인물의 특징을 담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 작품에는 네 가지 계열의 사건들이 전개된다.
첫째, 전승된 투란도트 소재를 변형한 이야기들: 남자를 혐오한 나머지 결혼을 피하기 위해 수수께끼를 내어 맞히지 못한 구혼자를 죽였던 천일야화의 투란도트 공주가 여기서는 '멋진 표현을 하는 남자에게 성적으로 매료당하는 색골로 등장하며,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먹물들에게는 수수께끼를 푸는 대신 황제가 폭리를 취하기 위해 매점매석한 솜의 행방을 설득력 있게 해명 (실질적으로는 은폐) 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둘째, 먹물들의 행동 방식을 다루고 있는 사건들: 다양한 성분의 먹물들이 벌이는 행동을 여러 장소 (학교, 다방, 시장, 시험장, 먹물대회 등) 에서 보여 준다.
셋째, 고거 고그의 출세 역정을 담고 있는 사건들: 먹물이 되고 싶어 하지만 먹물협회의 회원자격시험에서 계속 낙방한 노상강도 고거 고그가 국가적 위기를 틈타 권력을 장악하고, 기존의 먹물들을 제거 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먹물로 나서는 과정을 보여 준다.
넷째, 센 노인의 학습 과정을 보여 주는 사건들: 먹물을 존경한 나머지 솜을 팔아 먹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한 농부 센이 먹물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들이 멸시했던 카이 호의 혁명군 대열에 동참하기까지의 의식 변화를 다룬다. 앞선 세 줄기의 사건들에 대해 센은 관찰자 및 논평자 역할을 맡음으로써 서사적 기능을 갖는다. 이상에서 언급한 네 계열의 사건들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전제주의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지만 토지 분배를 약속하는 카이 호의 혁명군이 북경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시대 배경과 맞물려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장면마다 상이한 계열의 사건들이 교묘히 결합됨으로써 이 작품은 상당히 복잡한 구성을 보여 준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제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했다면, 이 작품은 지식이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로 전락한 현실을 폭로한다. 여기서 먹물들의 지식은 철저하게 사유물이며 동시에 상품이다.

 

 

 

지식을 가진 자는 그것을 이용하여 지식을 갖지 못한 자를 착취한다. 창녀가 몸을 팔듯 먹물들은 정신을 판매하며, 그들을 통해 부도덕한 권력과 이윤에 봉사하는 지식이 지닌 외설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몸뚱어리를 보여 주려는 투란도트의 노출증과 정신적인 것에 대한 그녀의 탐닉은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는 사회 속에서 지식과 사고와 정신이 지닌 외설성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