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몰리에르 '아내들의 학교'

clint 2015. 11. 16. 11:31

 

 

 

 

 

 

<줄거리>라 수슈 나리 M. de la Souche라고 불리는 마흔 두 살의 아르놀프 Arnolph는 자신의 피후견인 아녜스 Agnès를 시골에서 완전히 순진무구한 상태로 키우게 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자기에게 충실하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부인을 맞기를 희망했다. 그의 친구의 아들인 오라스 Horace가 갑자기 등장하는데, 그는 순진하게도 라 로슈라는 작자에 의해 갇힌 매력적인 처녀를 유혹한 이야기를 본인에게 말한다.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한 아르놀프는 아녜스에게 오라스에 대한 자백을 강요하고, 오라스가 다시 오면 드에게 돌을 던지라고 한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는 지체 없이 자신의 아녜스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다. 아르놀프는 아녜스에게 결혼의 계율에 대하여 설교하고 지옥에서 부정한 부인들을 삶아 버리는 악마에 대해 말한다. 오라스는 아르놀프에게 가서 아녜스가 자신에게 더할 나위없이 애정에 찬 편지가 매어 달린 돌을 던졌다고 속을 털어 놓고, 아르놀프에게 자신이 아녜스 집에 들어가 밤에 그녀를 빼내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아르놀프는 결혼계약서를 준비시키고 하인들과 함께 매복한다. 하인들에게 잡혀 반쯤 죽은 오라스는 죽은 체 한다. 아르놀프는 도망나온 아녜스와 다시 만난다. 그녀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그는 아녜스를 유혹한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뜬 처녀는 그에게 정면으로 대항한다. 우스꽝스러운 아르놀프는 그녀에게 간청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때 아녜스의 아버지인 다메리크 d'Amérique가 나타나서 딸을 오라스와 결합시킨다.

 

 

 

〈아내들의 학교〉는 형식상에 있어서나 내용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연극이었다. 우선, 이 연극은 운문 5막 극이다. 생리적으로 웃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던 중세의 기독교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인해 민중들의 저급한 오락거리로 전락해 버렸던 희극, 그래서 소극적 전통 속에서만 이어져오던 희극이 “위대한 비극의 형식인 운문 5막 극으로 씌어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비극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었던 기존 시각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했다. 〈아내들의 학교〉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운문으로 쓰인 장문의 대사들이다. 우리말 번역에 있어 이 아름다움을 살려내기에는 역자의 능력이 어림없이 모자라 원문의 청각적 아름다움을 포기한 채 의미전달에 충실하기 위해 산문번역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프랑스어 원문에서, 12음절 시구인 알렉상드랭들이 꿰어 놓은 구슬처럼 이어지며 그 이어짐의 연속을 통해 생산해 내는 언어의 음악성은,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연주되는 오페라의 장면들과 비교될 만하다. 심지어 어떤 문장은 12개의 알렉상드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배우가 이 긴 대사를 운문의 묘미와 함께 전달할 때 관객은 그 곡예 같은 문장의 연결 솜씨에 경탄하게 된다. 이러한 운문의 묘미, 특히 알렉상드랭의 묘미는 이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는 온전히 비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몰리에르는, 부알로에 따르면. 로마의 작가 테렌시우스 이후 1800년 만에 비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희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희극에서는 창조적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 우아한 표현들이 소극적 웃음과 조화를 이룬다. 형식의 파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몰리에르는 당시 파리의 모든 극단들이 '숭배'하고 있었던 연기의 규칙들, 그리고 코르네이유 이후 확립된 소위 고전주의적 극작법들을, 그것이 존재이유가 상실된 채 형식만 남은 것이라면,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것이라도 '사물이나 현상의 본래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자연' 을 벗어난 것이면 그것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숭상되고 있는 형식이라 하더라도 과감히 벗어 던졌다.

 

 

 

몰리에르는 극작과정에서 성문화되어 있던 고전주의적 극작법을 가장 많이 어긴 고전주의 시대의 작가였다.
다음, 이 연극은 미묘한 동시대의 문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물론 몰리에르가 동시대의 풍속을 소재로 삼은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몰리에르는 〈우스꽝스런 프레시외즈 들〉에서 당시 풍속의 한 단면을 무대에 올린 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현상에 대한 소묘였을 뿐 그 현상의 원인에 대한 근 원적인 질문은 아니었다. 몰리에르는 〈아내들의 학교〉에서 이 근원적인 질문을 시작한다. 그것은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이 희생되어서는 안 되며 또 어떤 지배자나 이데올로기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몰리에르의 자유주의 사상이 근간이 된 인본주의 적인 문제의식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단면적인 가치관의 노예인 아르놀프가 아네스를 대상으로 벌이는 실험은 단순한 남녀관계 문제 이상의 것이다. 아르놀프는 아네스를, 자신이 세상의 악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시킨 채 성장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여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아르놀프는 그렇게 성장하는 아네스가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 첫째 무구한 상태인 한 존재에게 일정의 가치체계를 주입하게 되면 그 가치체계가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아르놀프의 생각은 틀렸다. 주입 되는 가치체계가 억지와 거짓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일 때 인간은 별다른 후천적 교육 없이도 그 가치체계에 대해 회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내들의 학교〉에서 그 능력을 일깨워 주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오라스에 대한 아네스의 사랑은 아네스가 무구해서 더욱 순수하다. 그 순수한 사랑은 아네스로 하여금 아르놀프가 강제한 모든 교육의 부당성을 깨닫게 한다. 아네스에게 거짓 논리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반박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머리가 아니고 가슴인 것이다. 그것은 후천적 교육을 통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뇌를 위한 교육을 통해 판단능력을 빼앗아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진실을 자각 하는 인간의 인지 "본능은 위대하다. 더구나 아르놀프의 모든 시도는 불손하다. 그가 꾸민 계획은 그의 아내가 될 여인의 순수함을 보존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무구한 상태는 무지한 상태에 다름이 아니다. 그에게 이상적인 여인은 절대적으로 무지하여 먹고 자고 집안일을 하는 것 이외에는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삶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의 그러 한 상황에 만족하고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준 남편에게 감사하는 여인이다. 다시 말해 아르놀프의 모든 행위는 아네스를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선(善)‘ 그 자체로 만들려는 윤리적 고뇌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영위하기 위해 동반자를 길들이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이 점에서 아네스와 아르놀프의 관계는 유럽의 근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상징이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가치관을 옹호하려는 기득권층과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눈을 떠가는 근대적 개인들과의 대립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타르튀프〉와 〈돈주앙〉을 거쳐 〈상상 병 환자〉에 이르기까지 몰리에르의 창작활동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될 질문이었다. 몰리에르는 이 질문을 통해, 르네상스 정신혁명을 거꾸로 돌리려는 전체주의 반동세력들에 의해 생산되어 당시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모든 억지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또 그 수구세력들이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려 자행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아내들의 학교〉는 불합리한 기득권 행사의 부당성에 대한 연극적 그리고 사상적 도전이었다. 그 당시의 연극적 정론과 사상적 토대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도전은 형식적으로는 20세기의 반연극 적 시도에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21세기 탈 모더니즘적 시도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