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나탈리 사로트 '침묵'

clint 2026. 5. 25. 13:13

 

 

나탈리 사로트의 첫 희곡 <침묵>은 무명의 인물들과 화제의 중심에 선 

장피에르가 대립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 작품이다. 

극중 인물들은 침묵을 고수하는 장피에르를 대화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원하기도 하고 재담도 떨어보지만 무거운 침묵이 계속된다. 
그리고 이런 침묵은 불안과 동요를 일으키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성경 구절을 인용한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장피에르의 침묵은 구원보다는 

부정적인 압박으로 다가오며,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언어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장피에르가 침묵하는 이유를 내성적인 성격이나 지적 우월감 같은 심리적· 사실적 
잣대로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작품의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중요한 것은 침묵이 일으키는 파장 자체이기 때문이다. 

작가 사로트는 ‘왜’라고 묻는 대신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느낌에 집중할 것을 제안하며,

침묵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욕망과 질투, 두려움의 감정들을 포착한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도 침묵과 언어가 팽팽하게 대립한다. 형체 없는 6개의 목소리가 
침묵이라는 공허를 중심으로 맴도는 원추형 구조를 띠고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의 

개별성보다 소리의 질감을 강조하는 사로트의 문학관을 잘 보여 준다. 

사로트는 인식 이전의 미세한 심리적 진동인 ‘트로피즘’을 구현하기 위해 시각적 무대 대신 

청각 매체인 라디오극을 선택했다. 대화의 표면적 의미가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심신의 

미세 변화를 음색, 강약, 속도 그리고 침묵의 무게를 통해 변주해 낸 것이다. 

특히 라디오라는 매체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장피에르의 양면성을 

상상력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침묵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1964년 독일 방송 당시 홀로코스트의 책임 문제와 맞물려 집단 불안을 자극했던 이 작품은,

전쟁과 부조리가 여전히 만연한 21세기 관객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침묵>은 완강한 침묵이 일으키는 내적 경련을 소리 예술로 실험한 걸작으로, 낭독을 통해

미세한 변화가 만드는 출렁임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특별한 문학적 경험을 선사한다.

 



사로트는 음색의 다양 화와 균형을 위해 남, 여로 배역을 나눴다고 말한다. 그녀의 문학 전반에서 등장인물의 개별성과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디오극으로 첫 희곡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한때 배우를 꿈꿨지만 희곡을 집필할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트로피즘, 즉 인식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몸과 마음의 미세 진동을 시각적인 연극무대에서 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각 매체인 라디오에서는 소리의 질감이 자연스럽게 부각되기에 자신의 집필 방식과 상응하는 측면을 느꼈을 것이다. 창작할 때 소리 내어 말하면서 자신의 귀에 들리는 형태로 작업하는 사로트의 글은 청각적이다. 이러한 측면은 <침묵>에서 유감없이 나타난다. 의견 충돌이 연상되는 다양한 목소리, 웃음소리(헛웃음, 억지웃음, 코웃음, 폭소...), 터져나오는 한숨, 웅성거림이 지문으로 배경음처럼 깔린다. 머뭇거림, 헐떡임, 분노, 떨림 등 변화무쌍한 어조도 눈에 띄는데, 작가는 무거운 침묵에 의해 나타나고, 자극받고, 흔들리고, 몸부림치는 대화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침묵>이 라디오극으로 구상되면서 꼿꼿이 앉아있는 장피에르의 옆모습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말 없음으로 존재하는, 따라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장피에르를 라디오극에서는 자연스럽게 상상에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대변자인 장피에르는 양면성을 상징하는 매개체 같다. 친절하면서 교활하고, 겸손하면서 위협적이며, 친구라고 하지만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천사의 순수함을 지녔으면서 슬그머니 침입한 위선자이며, 필요한 존재이면서 아무 쓸모가 없고, 시인이면서 시를 증오하고, 악마 처럼 상대의 혼을 빨아들이는 파괴자이면서 단 한마디 말로 평온함을 줄 수 있는 막강한 존재다.
여기서 잠시 독일 라디오 방송을 타고 전파된 1964년을 떠올려 보자. 홀로코스트 책임문제가 연일 대두되고 있었던 당시, 장피에르의 '침묵'은 어떻게 들렸을까? 침묵으로 인한 집단 불안감이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장피에르는 하급 인간들과 섞이는 것, 더럽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당시 관객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작품은 전쟁과 첨예한 대립, 역사를 되돌리는 부조리가 여전히 만연한 21세기 관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침묵>에는 시사성이 은은하게 녹아 있다. 또한 눈으로 읽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미세한 변화가 만드는 출렁임을 연극으로 체험하고 표출하는 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년 7월 18일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공부한 뒤, 베를린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파리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 후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1932년 《트로피즘(Tropismes)》이라는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해 7년 뒤인 1939년에 출판했다. 1940년 반유대 법률로 인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사로트는 문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대표작 《황금 열매(Les Fruits d'or)》, 《저 소리 들리세요?(Vous les entendez?)》, 자전적 소설 《어린 시절(Enfance)》을 비롯해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달리 내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 작품들이다. 누보로망(Nouveau Roman) 선구자 격으로서 추상적 문학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현대성과 혁신성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로트의 특징적인 글쓰기 방식은 극문학 작품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침묵(Le Silence)〉, 〈거짓말(Le mensonge)〉, 〈아름다워라(C'est beau)〉, 〈이스마(Isma)〉, 〈그녀는 거기에 있다(Elle est l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불리는 것(Ce qui s'appelle rien)〉 등의 희곡을 발표하며 프랑스 현대 연극사에서 혁신적이며 탁월한 극작가로 자리 잡았다. 1999년 10월 19일 파리에서 99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탈리 사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