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피트와 제인, 쏘냐와 레온은 부부다.
레온은 술집에서 제인을 처음 만나 싸구려 모텔방으로 간다.
피트는 술집에서 쏘냐를 처음 만나 싸구려 모텔방으로 간다.
동시적 불륜.
레온과 제인은 하룻밤을 같이 보내지만 피트와 쏘냐는 포기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쏘냐는 레온을 떠난다.. 피트는 제인을 떠난다.
레온은 술집에서 우연히 피트를 만나 이야기한다.
제인은 술집에서 우연히 쏘냐를 만나 이야기한다.
쏘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레온은 갈색 브로그를 신은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인은 여자의 하이힐을 공터 쪽으로 던진
이웃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2. 닐은 지난날의 연인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다.
사라는 자신의 상담치료사에게 이야기하는 중이다.
발레리는 외딴 길가의 전화박스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닉은 경찰에게 진술하고 있다. 응답받지 못하는 도움을 향한 모든 절규들.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사라는 닐의 옛 애인이다.
발레리는 사라의 상담치료사이다. 닉은 발레리를 집까지 태워준다.
발레리는 집에 가지 못한다.
3. 레온은 존에게 아내가 사라진 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는다.
사라는 발레리에게 옛 애인과 현재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발레리는 사라에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존은 아내가 전화를 건 시각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음을 고백한다.

스피킹 인 텅스’은 인간 내면에 똬리를 튼 근본적인 욕구, 소통의 갈망을 전제로 한다.
각 인물들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감정을 묘사함으로써 상대방과의 진정한 소통을
시도하지만, 이들의 말은 상대방에 닿지 않고 허공에 부유한다. 공감과 이해를 바라고
절규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소통의 태생적인 일방향성, 그리고 그로 인한 고독을 지적한다.
1996년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SBW 스테이블스 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이듬해 호주작가협회상 공연부문을 받았다. 이후 2001년 보벨이 직접 희곡을 시나리오로
각색, 영화 '란타나'로 옮겨져 미국, 유럽에서도 개봉했다. 2001년 미국 오프 브로드웨이
그래머시극장, 2001년 영국 웨스트엔드 햄스터드극장에서 현지 초연하는 등 영미권에선
친숙한 작품이다. 아시아 국가 중에선 한국에서 처음 선보였다. (2015년 5월)

같은 배우가 한 작품에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연극이 인간 관계를 다룰 때 사용하는 장치 중 하나다. 배우 4명이 연기하는 등장인물 9명은 총 3막에 걸쳐 교묘하게 이어지고 만난다. 1막에서 네 인물이 겪은 사건이 2막, 3막의 다른 인물들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스피킹 인 텅스'의 김동연 연출은 "등장인물들이 이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밝혔다. "인물들마다 처해진 상황이 다르다. 한 사람마다 느끼는 외로움과 소통의 부재는 원인이 다 다르다. 그런데 한 배우가 한 공간에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관객들이 캐릭터를 일반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그 내면에 들어가는 효과가 있다." 결혼을 했지만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색다른 자극을 원하는 원하는 부부, 늘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며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돼 있는 여자,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남자 등 표면적으로는 정상이나 그 안에는 결핍으로 가득찬 군상을 그린다. 김 연출은 이번 한국 공연의 부제로 '잃어버진 자들의 독백'을 붙였다.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즉 소통의 부재를 다룬다. 말을 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각자가 외로운 상황이다. 극은 독특한 형식이다. 기승전결로 가는 게 아니라 나중에 퍼즐로 맞춰진다." 그런 모습들이 실제 세상과 닮았다고 여겼다.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그 사건이 다른 데로 가서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또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발전되는 거다." 작품의 형식이 어려워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고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행복하게 끝난다고 말씀은 못 드린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의미나 잃어버린 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극 제목은 방언(方言)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지역 사투리의 그 방언이 아니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성령에 힘입어 자신과 주변 사람들도 못 알아 듣는 언어다. 김 연출은 "사투리가 아닌 종교적 단어"라면서 "기도를 하고 있음에도 어떤 의미인지 본인이 잘 모르는 말이다. 남들도 그 말을 모른다. 그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륜이 다뤄지나, ‘막장’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거의 유일무이한 작품이라 평가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도덕의 어느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인간의 처절한 모습, 무언가 잃어버린 인간들의 외로움과 방황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SPEAKING IN TONGUES는 인간 감성의 옳고 그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사이 파괴되고 마는 기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절과 가변적 윤리 규약으로서 정형화된 감성적 풍경에 대한 조망이다. 의미를 희구하고, 찰나의 희망에 의지하는 사람에 대한, 점차 비대해져가는 비정함과의 전투를 향한 유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은 두 갈래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색을 지닌다. 극은 아홉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네 명의 배우를 위해 쓰여졌다. 극은 세 개의 막으로 나뉜다. 각 막은 네 사람 사이의 관계에 천착하지만, 상호 배척적이지는 않다. 인물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막 안에 내재하는 동시에 막 사이를 넘나든다. 인물들은 재등장하고 또 사라진다. 하나의 막에서 언급된 이야기는 다른 막에서도 중대하게 다뤄진다. 의혹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모든 해답은 이미 그 안에 있지만, 묘연하다. 이야기는 앞으로만 향해 가지는 않는다. 옆으로 튀거나 역행하기도 한다. 이미 보여주었던 장면을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극이 구조적으로 다소 난해하다는 것을 안다. 이 작품은 어떤 관습적인 극작의 규범을 따르지 않다. 관객들이 극에 내재한 좌절의 수순에 동조되는 것이 두려운 한편으로, 관객들이 그 안에서 다른 형태의 이야기와 극적 교환의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관객들이 극장을 나서서도 극중 인물의 환영으로부터 쫓겨 다니다가, 내가 그랬듯이,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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