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잠부 '회란기'

clint 2026. 5. 12. 06:10

 

 

총명하며 자색이 빼어난 재주꾼이지만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기생으로 살던 
장해당은 마을의 소문난 돈 많고 땅 많은 갑부인 마원외와 사랑에 빠져 
그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를 질투한 마부인이 남편을 독살하고 장해당에게 뒤집어씌운다. 
그것도 모자라 마부인은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장해당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동네 산파와 이웃을 매수해 거짓 증언을 하도록 한다.
장해당과 오빠인 장림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포청천은 땅바닥에 석회로 동그라미를 그려 
아이를 그 안에 세운다. 그러고는 장해당과 정실부인에게 
"아이를 원 안에 세워라. 두 여인은 아이를 석회 원 밖으로 끌어당겨라!"
아이의 양팔을 각각 잡게 하고 원 밖으로 끌어내는 쪽이 친모일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과연 어미는 누구인가.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대표작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원작으로도 알려진 이 작품은 

마씨 집안의 첩(妾)이 낳은 아들을 질투하는 정실부인이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벌이는 이야기를 다룬다. 생모를 가려내고 사건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포청천의 지혜와 모성애의 숭고함은 시대를 넘어선 언어의 힘으로 감동을 전한다.
동서고금을 관통해 700년이 지나도 유효한 이 이야기의 각색과 연출을 모두 맡은 고선웅은 

자신만의 탁월한 변주를 통해 ‘사랑은 모든 역경을 뛰어넘어 승리해야만 한다.’는 명제를 

우리에게 건넨다.

 



 <회란기>는 중국 원나라 때인 1200년대 중반 극작가로 명성을 구가하던 이잠부가 쓴 

잡극으로, 브레히트의 대표작 <코카서스의 백묵원>과 '솔로몬 재판'의 원작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박력 있는 언어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연극의 원형을 

이해하는데 가치 있는 작품이다. 사람의 목숨을 쉽게 해치고 아이의 생명도 함부로 하는 

냉혹한 시대. 돈 있으면 무죄가 되고 힘 있으면 그물 사이로 잘도 빠져나가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엇비슷하다. 여기 700년 전부터 중국에서 올려진 이 작품은, 여전히 시사한다.
거짓은 탄로나고 부정한 사람들은 결국 응보를 받게 된다는 것...
아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세상이 좀 덜 살벌하고 더 상식적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백묵의 원을 그린다.

 

 

 

<회란기>13세기 당시 중국에서 전해지던 두 여인의 한 아이 다툼 모티브를 주요한 내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실 이 문학적 모티브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동서양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우선 서양에서는 구약성경, <열왕기>의 솔로몬 왕 이야기나 이슬람교 <코란경>의 슐레만 왕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 동한 시대에 응소가 지은 <풍속통의>에 소개된 황패의 이야기나 북위 시대에 불승 혜각이 번역한 <현우경> (46)에 소개된 고대 인도의 아파라제목거 왕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의 명 판결 이야기들은 두 여인의 한 아이 다툼 모티브를 공유하고 있다거나 국왕· 판관 등 제삼자가 아이를 칼로 가르거나 양쪽에서 잡아당기도록 명령하는 식으로 사건 해결 과정에 개입한다거나, 아이의 고통을 괴로워해 친권을 포기한 생모가 결국 승리한다는 등의 줄거리를 공유한다. 이 중 어느 이야기가 <회란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개개의 이야기들이 서로 시공을 달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 속의 두 여인의 한 아이 다툼 모티브가 모성애라는 인류 공통의 주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시공의 제한 없이 만인에게 받아들여지고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이잠부는 <회란기> 창작 과정에서 이 모티브를 근간으로 땅바닥에 석회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아이를 세운다는 극적인 줄거리를 새로 설정하는 한편, 상청의 행수 장해당과 오라비 장림의 갈등, 장해당과 마 부인의 갈등, 정주 태수 소순의 잘못된 판결, 마 부인과 조 영사의 간통과 장해당에 대한 음해, 장해당과 장림의 화해, 송대의 명판관 포증의 에피소드 등 몇 가지 부차적인 줄거리를 추가해 극적인 긴장과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처럼 재판관이 오롯이 자신의 지혜와 합리적인 분석에 따라 스스로 판결을 내리고 사건을 처리하는 장면은 여타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회란기> 14세기 희곡으로는 드물게 연극적으로도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불행행복 불행-행복으로 수없는 기복과 시련을 겪는 장해당의 에피소드를 주된 이야기로 삼으면서 동시에 마 부인과 장해당, 마 원외와 처첩, 장해당과 장림 등,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복잡 미묘한 갈등과 충돌을 교묘하게 안배하고 있다. 이러한 극적 설정들은 작자가 임기응변으로 시도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과 서로간의 인간관계에 대한 분석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란기>는 언어적으로도 상당히 독특한 특정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의 언어는 메시지 전달을 주된 목적으로 히는 대사뿐 아니라, 고도의 함축미와 운율미를 강점으로 하는 가사에서조차 상당히 간결하고 질박하며 평이한 구어체를 선호하고 있다. <회란기>의 이 같은 언어적 특정이 작자 개인의 독특한 그러나 일상적인 수사적 경향인지, 아니면 등장인물 다수가 서민이라는 점을 고려한 의도적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진 관중과의 소통과 공감대 형성이라는 점에서는 상당히 큰 효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보인다.